출애굽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출애굽기 강해 제133강(출32:15-2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5. 4. 19:35

출애굽기 강해 제133(32:15-20)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07()

 

모세가 지니고 있는 증거판의 특징(32:15-16, 24:12)

 

첫째로, 증거판은 두 개의 돌판으로 되어 있습니다(32:15). 그것을 두 차례나 만들고 있습니다(32:16, 34:1). 처음 만드실 때에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모릅니다.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해주시는 것을 그토록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돌판을 만드시고 손수 두 개의 돌판 양면에 빽빽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주시고 있습니다(32:15-16). 그러나 두 번째로 또 돌판을 만들고 글자를 새겨주실 때에는 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두 개의 돌판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땅에 던져서 깨어버린 처음의 돌판과 똑 같은 것을 이번에는 모세가 직접 만들어서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오도록 명령을 하시고 계십니다(34:1-4)”. 그러나 창조주 여호와께서는 한번 더 은혜를 베푸시는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33:19). 이번에도 모세가 만들어온 두 개의 돌판 양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새겨주십니다(34:28).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특히 무엇을 새겨주셨을까요? 처음에는 율법과 계명을 새겨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24:12). 물론 모든 율법을 그 돌판 두 개에 하나님께서 모두 새겨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양은 많은데 돌판의 면적은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율법의 말씀은 모세가 다른 매체 곧 파피루스나 양피지에 기록을 하고 중요한 것만 하나님께서 돌판에 새겨주신 것으로 보입니다(34:27). 처음의 돌판이 깨어지고 난 후에 두 번째로 만들어진 돌판에는 율법과 계명이 아니라 오직 십계명만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34:28).

왜 돌판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의 수가 줄어들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무래도 처음과 나중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금송아지 우상 숭배사건 때문일 것입니다(32:4-6). 모세가 두 돌판을 들고서 하산을 하다가 백성들의 한심한 모습을 보고서 크게 노하여 산 아래로 돌판을 던져버립니다(32:19). 그 뜻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미 전해주고 그대로 준행하겠다는 맹세와 언약식도 있었는데(19:6-8, 24:3-11)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제멋대로 우상을 만들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섬기고 있으니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 말씀이 그 백성들에게 필요가 없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32:17-19). 그것은 백성들의 지도자인 모세를 상대로 하여 시내 산 정상에서 하나님께서 이미 보여주신 그 분노를(32:7-10) 모세가 백성들 앞에서 다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두 번째로 제작한 돌판에는 그 글자의 수가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습니다(24:12, 34:28).

많은 말씀을 전달해주고 가르쳐 보아야 별 소용이 없다고 판단을 하고 있는 경우가 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직접 전파하신 경우와 제자 70명을 보내어서 전하신 경우입니다. 그때 주시는 예수님의 교훈이 다음과 같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7:6),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뭍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10:10-12).

 

증거판을 던져서 깨뜨리고 금송아지를 가루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마시게 하다(32:17-20)

 

어떻게 하면 백성들이 스스로 저질렀던 잘못과 실수를 반복하지 아니하게 될까요? 그 방법은 자신들의 잘못을 뼛속 깊이 새기고 반성을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뼛속 깊이 새기게 만들 수가 있을까요? 출애굽기에서 보여주고 있는 방법이 바로 금송아지를 가루로 만들어서 물과 함께 그것을 백성들이 아주 조금씩 나누어서 마시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금송아지를 불살라 부수어 그 가루를 시내에 뿌리고 있습니다(32:20a). 그 시냇물을 백성들이 마시게 됨으로써 스스로 반성할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32:20b). 그 물을 직접 마시거나 그 물을 사용하여 만나 요리를 하면서 그들은 매일 같이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우상을 섬긴 자신들의 잘못이 결코 반복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영적으로 먹고 마시느냐에 따라서 생각과 행동이 달라집니다. 세상적인 살기다툼의 방식만을 보고 그것을 먹고 마시게 되면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며 권력과 부를 가지고 많은 사람을 지배하고자 하는 사고와 행동만을 할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게 되면 그것이 소화가 되어서 생각과 행동의 변화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6:56-57). 예수님께서 마치 시내 산의 모세처럼 아버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생활화하고 있습니다(34:28, 4:4). 이제 예수님의 생애를 보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사는 자는 예수님처럼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6:58).

비슷한 말씀이 에스겔 선지자의 기록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 그가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3:1-3).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생활화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 일을 돕기 위하여 진리의 성령님께서 내주하시고 계십니다(14:16-17, 26, 16:13-14). 말씀을 먹고 소화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구한다면 그와 같은 기도는 복음전파의 차원에서 즉각 응답이 될 것입니다(24:49, 1:8, 14, 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