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출애굽기 강해 제134강(출32:21-3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5. 4. 19:37

출애굽기 강해 제134(32:21-30)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08()

 

모세의 추궁과 아론의 변명(32:21-24), 그리고 아론과 백성들의 행위에 대한 모세의 판단(32:25). 나아가서 모세의 응급처방과 레위인들의 행동이 말하고 있는 것(32:26-30, 1:12-13)

 

 

모세가 아론에게 상황설명과 변명의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아론에 대한 질문이 참으로 묘합니다; “이 백성이 당신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당신이 그들을 큰 죄에 빠지게 하였느냐?”(32:21). 모세의 부재기간 중에 그를 대신하고 있는 자가 아론입니다(24:14). 그러므로 그 동안에 발생한 금송아지 우상숭배사건에 대한 모든 책임은 아론이 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론) 당신이 그들(백성들)을 큰 죄에 빠지게 하였다”(32:21b)고 모세가 지적하는 것은 지당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아론의 잘못을 지적하기 전에 먼저 귀책사유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이 백성이 당신(아론)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당신이 그들을”(32:21a). 한 마디로, 모세는 아론의 큰 책임을 상당히 경감해주고 있습니다. 잘하면 백성들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아론이 자신의 친형이기 때문에 그의 책임을 경감해주고자 그렇게 묘하게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하나님의 산에서 방금 하산을 했기 때문입니다. 눈 밝으신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 아래에서 어떤 일이 어떠한 경로로 발생을 하고 있는지 훤히 아시고 계십니다(32:7-10). 한 마디로, 지도자 모세의 하산을 기다리지 못하고 큰 불안에 빠져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임시 지도자인 아론에게 강하게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32:1). 그와 같은 경과를 모세는 산에서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와 아론의 답변이 일치를 할 것인지 그 점만 직접 확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 하기에”(32:23).

여기까지는 객관적인 설명이므로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론이 앞뒤로 덧붙이고 있는 말은 전혀 대제사장답지가 못합니다; 첫째, 이 백성들이 악하다고 하는 사실을 모세 당신도 익히 알고 있지 아니하냐?는 것입니다(32:22). 둘째, 아론 자신은 그저 백성들에게 금붙이를 가지고 오라고 명령을 했을 뿐인데 그 금들을 모아서 불에 던졌더니 금송아지가 탄생을 했다는 어처구니가 없는 변명입니다(32:24). 삼척동자가 들어도 그것은 말이 되지를 않습니다. 참으로 치졸한 해명입니다. 인위적으로 송아지 모형의 틀을 만들고 끓인 금물을 그 틀 사이에 부어서 주조를 해내었거나 아니면 송아지 목각을 만들고 그 위에 금박을 입히거나 하였기에 그 금 송아지 우상이 탄생을 한 것입니다(32:4). 그런데 어떻게 금붙이를 불에 던졌더니 금 송아지 우상이 자연발생을 했다는 해명입니까?(32:24)

아론의 태도는 마치 아담부부의 변명을 다시 보는 것과 같습니다(3:11-13). 그렇다면 아론의 잘못에 대하여 하나님은 아담부부에게 내린 처벌과 같은 징계를 해야만 합니다(3:16-19).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는 단지 아론의 잘못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을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32:25). 모세는 아론에 대한 징계를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진문에 서서 외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32:26a). 그러자 아론을 위시하여 레위 지파가 모두 모세의 옆에 와서 서게 됩니다(32:26b). 모세가 단호하게 레위 자손에게 다음과 같은 취지의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인정과 사정을 보지 말고 여호와 앞에 나아오지 아니한 자들을 닥치는 대로 칼로 치라!는 것입니다(32:27). 실로 잔인한 명령입니다. 동족상잔(同族相殘)의 현장이 되고 맙니다. 어제까지는 소속 가문과 지파를 뛰어넘어서 서로가 이스라엘의 자손으로서 함께 지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생사를 걸어놓고서 서로가 칼부림을 해야만 합니다. 특히 레위 지파는 나머지 열한 지파를 상대로 하여 전쟁을 해야만 합니다.

그 결과 피아간에 삼천 명 가량이 살해가 되고 맙니다(32:28). 아무리 모세의 명령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레위 지파가 나머지 열한 지파를 상대로 하여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결과를 미리 예측을 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 목숨이 위태로운데 아무리 모세의 명령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뻔히 자신의 목을 그냥 레위인들에게 맡겨놓고서 마냥 서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을 지키고자 모두가 칼을 빼어 들었을 것입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전투는 실로 처참했다고 하겠습니다. 둘째, 레위 지파의 결단과 용기가 진실로 대단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편에 선다고 하는 것은 나머지 열한 지파와 적대관계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의 명령에 따라서 111이라는 어처구니가 없는 전투에 나서야만 합니다. 열 배가 넘은 사람과 전쟁을 쳐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위 지파는 그 전투에 나서고 있습니다. 셋째, 레위 지파의 태도는 단호합니다. 모두가 이스라엘의 자손이며 같은 민족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모세의 편에 섰다고 하여 그의 명령에 따라 동족을 살해하는 전투를 벌일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그 옛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시던 사건을 되돌아보게 합니다(22:1-2). 그 명령에 아브라함이 순종을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는 인정을 받게 됩니다(22:12). 그리고 이삭의 목숨이 구원을 받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제물 숫양이 대신 바쳐지게 되는 여호와 이레의 축복이 발생하고 있습니다(22:13-14). 본문에서는 레위 지파가 아브라함처럼 모세를 통하여 내리고 있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편에 섰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동족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상대방은 열 배가 넘습니다. 그러므로 그 전투의 결과는 레위 자손들의 출혈이 더 컸다고 추론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이유는 희생자가 삼천 명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32:28). 전투가 오래 계속이 되었더라면 장정 60만명이 서로 칼부림을 하고 있으므로 그 희생은 수만 명에 이르렀을 것입니다(12:37). 그러므로 모세가 그 정도의 선에서 얼른 전투의 종료를 선포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전투를 더 계속했다가는 남자의 수가 이만 이천 명에 불과한 레위 인들이 전부 몰살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3:39). 하지만 그 전투로 인하여 레위 인들의 잘못은 전부 탕감을 받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아론의 잘못에 대하여 이미 언급을 하였지만 그 징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가 없는 것입니다(32:21, 25).

그 정도로 일단 사건을 종료시킨 모세는 아론과 백성들의 잘못을 전부 탕감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산으로 다시 올라가고 있습니다(32:29-30). 만약 하나님께서 추인을 해주시지 아니하시게 되면 아론의 징계를 피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피해도 더 발생할 것입니다. 애초에 금송아지 우상숭배사건의 책임을 물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없애버리고 모세의 자손만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드시겠다고까지 언급하신 하나님이십니다(32:10). 따라서 모세의 발걸음이 한없이 무겁다고 하겠습니다(32:30).

참고로, 레위 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님께 헌신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결단입니다(32:29).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는 동족에게 칼을 휘둘러야만 합니다(32:27).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한다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동족상잔의 위험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복음을 따른다고 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찍이 다음과 같이 언급하시고 계십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다”(12:51),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15:18-19). 결론적으로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