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출애굽기 강해 제132강(출32:8-1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5. 4. 06:30

출애굽기 강해 제132(32:8-14)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06()

 

이스라엘 백성들의 금송아지 우상숭배사건에서 엿볼 수 있는 하나님의 시간 카이로스의 임재와 목이 뻣뻣한 백성들의 관성(慣性, 습관적으로 움직이며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물질의 속성)의 법칙과의 충돌(24:4-11, 32:8-9)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산에 도착을 하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백성들과 언약을 맺습니다(24:7-8). 언약의 내용은 십계명을 비롯하여 모세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전달한 모든 율법을 그들이 그대로 준수를 하겠다는 것입니다(24:3, 7). 언약을 위한 예식은 엄중합니다. 소를 제물로 삼아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그 피를 백성들에게 뿌리는 것입니다(24:4-8).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되면 자신들의 피로써 속죄를 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언약의 증인으로서 백성들의 지도자 그룹을 모두 하나님의 산으로 초청을 하고 있습니다(24:9). 그들이 시내 산 정상에 좌정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발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그 앞에서 먹고 마시는 영광을 누리고 있습니다(24:10-11). 그것은 하나님의 십계명과 율법을 어기지 아니하고 그대로 준행을 하는 경우에 누릴 수 있는 엄청난 혜택을 미리 맛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때부터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의 시대가 열린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19:6).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며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려줄 수 있는 위대한 제사장나라의 탄생을 알리고 있습니다. 세계의 역사에 한 획을 긋고 있는 그 시간은 하나님의 시간인 카이로스입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구원과 영생의 복이 온 세상으로 흘러나올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게 되면 애굽에 내렸던 재앙이 그들에게 내리게 될 것입니다.

언약의 행사가 하나의 이벤트로는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식과 사고방식을 바꾸는데 있어서는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자라고 배운 그대로 생각하면서 행동하고 있을 뿐입니다. 당장 그들의 영적 정치적 지도자인 모세가 하나님의 산으로 불려 올라가고 나서 감감 무소식이 되자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의 말을 믿지 못하고 한없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24:14).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생활화하고자 하는 노력이 전혀 없습니다. 그저 그 불안을 극복하기 위하여 애굽에서 배운 방법대로 우상을 만들고 위안을 받고자 원하고 있습니다. 모세를 대신하고 있는 아론의 정신상태도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일사천리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출애굽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32:4-6). 그 광경을 주시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크게 분노하시고 계십니다(32:7-10).

 

하나님의 진단과 처방 그러나 신중한 결정, 백성들의 지도자 모세의 대속과 중보의 간구를 청취하시다(32:10-14)

 

금송아지 우상사건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진단은 절망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길을 그토록 속히 떠나버리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32:8). 그리고 고쳐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민족입니다. 그 뜻이 목이 뻣뻣한 백성이라는 진단의 결과입니다(32:8). 그래서 하나님의 처방은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 자손들은 전멸시켜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32:10a). 둘째, 모세와 그의 자손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을 일으키시겠다는 계획입니다(32:10b).

하나님의 산에서 그와 같은 진단과 처방을 듣게 된 모세는 모골이 송연합니다. 실로 두려우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 옛날 신화로만 알고 지냈던 전승이 다시 재현이 되려고 합니다. 노아의 시대에 악한 세상을 홍수로 전면 심판하시고 노아의 가족만으로 새로운 인류를 만드신 하나님이십니다(6:17-18). 그 역사가 시내 산 앞에서 다시 발생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노아의 가족처럼 모세의 가족은 새로운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모세의 가문만 좋으면 그만입니까? 아닙니다. 모세는 그럴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역적이 되더라도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결심하게 됩니다(32:11). 그래서 실로 놀라운 간구를 하게 됩니다(32:12-13). 그것은 마치 그 옛날 애굽의 총리인 요셉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있는 유다의 간청과 같습니다(44:30-45:3).

그 옛날 유다의 말이나 지금 모세의 말이나 모두 보통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복음적인 성격을 그대로 담고 있는 내용의 간구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하나님과 백성을 분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44:30, 32:11, ‘주의 백성). 이방인들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래를 보고서 여호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판단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갈등이 깊어져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두 광야에서 죽임을 당하게 된다고 한다면 이방족속들은 조소를 금치 못할 것입니다(32:12). 그 반대로, 그들을 무사히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고 민족의 번영이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찬양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32:13). 둘째, 모세는 자신의 이익과 영광을 내려놓습니다. 자신의 가문만으로 더 큰 제사장나라를 만들어주겠다는 하나님의 제안을 거절합니다(32:10-11). 그 대신에 부디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해달라고 간청을 하고 있습니다.

가장 복음적인 내용의 간구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결정을 하시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32:14). 그런데 여기서 좀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절대선(絶對善)을 행하시고 생명을 돌보시는 하나님께서(10:18) 과연 이스라엘 백성을 전부 한꺼번에 몰살시켜버리기를 원하셨던 것일까요? 비록 피로써 언약의 맹세를 했다고 하더라도 사람의 습관과 버릇이라고 하는 것이 하루 아침에 그렇게 칼로써 무우를 싹둑 자르듯이 단번에 완전히 바뀔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 사실을 창조주께서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겼다고 하여 당장 모두 쳐죽여버리겠다고 모세에게 엄포를 놓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백성들의 지도자인 모세의 태도를 점검하고자 하시는 의도가 농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옛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처럼 모세도 중보자의 역할을 수행할까요? 하나님의 관심사는 그것입니다. 그리고 최종결정을 하기 전에 모세의 중보자로서의 간구를 듣고 싶어하시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의 입장에서 정상참작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백성들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지도자 모세의 말을 직접 청취하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에 예수님의 변호에 의하여 정상참작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친히 사람으로 태어나서 인생을 살아보신 예수님께서 그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실정과 고충을 하나님께 정직하게 말씀을 드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점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아들에게) 주셨느니라”(5:27),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

참고로, 아브라함은 소돔에 살고 있는 조카 롯의 가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 성읍을 멸망시키려고 하시는 하나님께 매어 달렸습니다(18:23-33). 여섯 차례나 간구한 결과 드디어 의인 열명만 있어도 그 성읍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는 약속을 받아내게 됩니다(18:32). 마찬가지로 모세도 중보자로 나서게 됩니다(32:11-14). 그리고 모세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나중에는 대속자로 나서게 됩니다(32:11-14, 30-32). 요컨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더 가까이 나아가고 있는 자가 모세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모세의 글에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들어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24:27, 44-45, 5: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