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출애굽기 강해 제105강(출25:1-1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4. 24. 19:44

출애굽기 강해 제105(25:1-10)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98()

 

예물은 누구에게 어떤 마음으로 바치는 것이며 그 받는 손은 누구인가?(25:1-2, 24:9)

 

첫째로, 예물은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25:2a). 사람에게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물을 사람에게 바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경우에는 심각한 폐단이 발생을 하게 됩니다; 첫째, 사람에 의하여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는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그 결과 그 사람에게만 잘 보이고 그 사람을 잘 섬기게 되면 재앙과 화를 면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까지 움직일 수가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소위 무당신앙에 푹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사람의 눈치를 보고서 예물을 바치게 됩니다. 또는 상명하복의 명령체계에 의하여 무조건 갹출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윗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직급을 따라서 예물의 양까지 할당하게 되는 사례도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직접 예물을 자신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시고 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모세를 불러서 그렇게 하라고 명령을 내리시고 계시는 것입니다(25:1). 그리하면 모세가 그 명령을 백성들에게 전달을 합니다(25:2). 물론 그러하지 아니한 경우가 그 옛날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하여 약속의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바치라고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22:1-2). 참으로 예외적인 특이한 명령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그 명령에 순종을 하려고 하자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시어 급히 막습니다(22:10-12a). 그것은 순전히 아브라함이 깨달은 부활과 영생의 신앙이 진실한 것인지(21:33, 11:9) 아니면 수식어적인 장식 곧 일종의 립 서비스에 불과한 것인지를 알고자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이제야 아브라함이 진심으로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22:12b). 그리고 여호와 이레의 축복이 그 모리아 산, 곧 훗날 예루살렘 성전이 자리를 잡게 되는 그곳에 임하게 됩니다(22:14, 대하3:1).

  그것이 메시아의 오심을 상징하고 있는 진짜 예외적인 경우에 속하는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이레의 전통에 따라 먼 훗날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속죄양으로 오기 때문입니다.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이 스스로 준비하신 숫양을 제물로 이삭 대신에 번제로 바치라고 아브라함 앞에 제시하고 있습니다(22:13). 그와 같은 맥락에서 훗날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1:29)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게 되며 역시 예루살렘에서 대속의 제물이 되고 맙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 가운데 단 한번 이루어진 대사건입니다. 따라서 라인홀드 니버는 그것을 impossible possibility’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하나님께서 예물을 바치라고 당사자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로, 그 말씀을 모세로부터 전해들은 백성들은 기쁜 마음으로 예물을 바쳐야 합니다. 만약 기쁜 마음이 들지 아니하면 바치지 아니하여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 때문에 그 어떠한 불이익을 주었다고 하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예물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모세와 아론이 받아들입니다. 물론 아론의 아들들과 열두 지파의 장로들이 모세와 아론을 위하여 그 일을 도왔을 것입니다(24:9).  

 

시내 산 정상에 강림하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백성 가운데 거하시기 위하여 모세에게 집을 지으라고 명령하고 계시는데 그 설계도, 건축자재, 가장 먼저 만드는 궤짝 등의 특징과 하나님의 하산의 이유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25:3-10, 왕상8:27-61, 1:14)

 

첫째로, 성막의 설계도는 사람이 구상한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모양대로 천막의 모습을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는 기구들을 제작한 것입니다(25:9).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슨 모습을 본보기로 삼아서 성막을 만들도록 지시하시고 계신 것일까요?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는 일관성과 역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사고를 해보면 그것은 아담부부와 함께 동거하시던 에덴동산의 모양을 본뜬 것으로 보입니다; “그곳에서 아담부부와 대화를 나누시던 하나님이십니다. 그 모습이 지성소와 성막의 뜰에서 발견이 되고 있습니다(25:22, 29:42). 그리고 에덴동산의 출입구가 동쪽에 있듯이 성막과 성전의 출입구도 동쪽에 있습니다(3:24, 27:13-16, 40:6, 43:1-4)”. 그 모습은 하늘에 있는 성전과도 동일한 것으로 보입니다(8:5, 9:23-26).

둘째로, 건축자재는 금과 은과 놋, 청색 자색 홍색 실, 가는 베실과 염소 털, 동물들의 가죽, 향료와 향품, 그리고 보석 등입니다(25:3-8). 그와 같은 예물들은 출애굽을 할 때에 하나님의 배려와 명령으로 이미 애굽인들에게 청구를 하여서 받아온 것들입니다(12:35-36). 그것의 사용처가 나중에 이렇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뜻하지 아니하게 얻은 것 곧 전리품과 같은 것들은 반드시 훗날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보람 있게 사용이 될 수가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 넉넉하게 짐작할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14:16, 20).

셋째로, 증거궤를 가장 먼저 만들라고 하십니다(25:10). 그 증거궤는 증거판을 넣어두기 위함입니다(25:21). 증거판은 하나님께서 친히 언약의 말씀 곧 십계를 기록하신 돌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16:34, 25:21, 32:15-16, 19, 34:12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막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계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간수하고 있는 돌판과 그것을 넣어서 보관하고 있는 증거궤입니다. 그 궤의 뚜껑이 속죄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증거궤에서 생성이 되며 그것이 속죄소를 울리며 음성으로 대제사장에게 전달이 될 것입니다.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모세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25:21-22).

넷째로, 산 위에 강림하셔서 모세를 만나고 그를 통해서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달하시던 하나님께서 갑자기 이동식 성막을 지으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당장은 두 가지로 추정이 됩니다; 첫째, 이제는 모세만을 상대하시던 방식에서 모든 백성을 직접 상대하시는 시스템으로 전환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둘째, 백성들의 강점과 약점 그리고 애로사항을 직접 그들과 동행하면서 살펴보시겠다는 것입니다. 먼 훗날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발견이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이 있을 것임을 미리 예고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1:14).

본래 시내 산 정상에 처음으로 강림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음성으로 백성들에게 모든 율법을 듣게 해주고 싶어하셨습니다(19:19). 그러나 그 음성 듣기를 백성들이 두려워했습니다(20:19). 하나님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우레와 번개가 발생하며 나팔소리가 구름 가운데서 크게 울려 나오는데 그것이 무척 두려운 것입니다(19:18, 20:18). 하나님과 음성으로 가까워졌다가는 언제 실수를 범하여 죽임을 당할지 몰라서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모세 혼자서만 시내 산 정상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음성으로 듣고서 하산을 합니다. 그 말씀을 간접적으로 전해 듣게 되면 백성들이 안심을 하고서 율법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간접신앙을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거처하고 있는 들판으로 내려오시려고 하십니다. 그리고 직접 대화를 시도하려고 하십니다. 그것이 성막을 짓도록 말씀하시는 첫 번째 의도입니다.

그 다음 의도는 백성들과 함께 사시면서 함께 동행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백성들과 함께 인생을 사시면서 그 애로사항을 직접 겪으며 관찰하고자 하십니다. 당장은 이동식 성막이라도 지어서 함께 움직이고 싶어하십니다. 그리고 그 성막 안 지성소에 증거궤를 배치하고 그 속에 말씀의 돌판을 넣어서 하나님의 음성이 울려 나오도록 만들고 싶어하십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의도가 훗날에는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과 공생애로 나타나게 됩니다.

성막이 솔로몬 시대에는 성전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솔로몬은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을 아름답게 지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기능은 제한적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것을 홀로 운영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람이 지은 성전에 모신다고 하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하지만 그곳에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지켜보시는 눈을 둘 수는 있습니다”(왕상8:27-29).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에는 그 성전에 거처를 하실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솔로몬 성전을 향하여 기도를 드립니다(왕상8:30). 그 믿음은 이스라엘의 국경을 넘어서 이방인들에게도 퍼져나가고 있습니다(왕상8:41). 그래서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됩니다(21:13, 56:7). 그와 같은 기능이 있다는 사실을 솔로몬 왕이 상세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왕상8:27-61).

성막을 만들게 하는 하나님의 마지막 의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 생애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3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2:1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