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출애굽기 강해 제106강(출24:10-2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4. 24. 19:45

출애굽기 강해 제106(24:10-22)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99()

 

증거궤의 크기, 금박치장, 운반용 고리, 이동방법, 보관물품 등에 관한 사항(24:10-16)

 

  첫째로, 증거궤의 크기는 생각보다 작습니다. 길이, 너비, 높이가 각각 2.5규빗, 1.5규빗, 그리고 1규빗입니다(25:10). ‘1규빗45센티미터로 환산한다면, 길이가 1.125미터, 너비가 0.9미터, 높이가 0.45미터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별로 크지가 아니한 상자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말씀의 취지가 뚜렷이 새겨져 있는 십계명 돌판이 들어가 있게 되므로 큰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증거궤보다 약간 길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의 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 심령에 새겨짐으로써 큰 변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이 담기어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그 상자나 육신의 값어치가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증거궤 속에 귀중한 하나님의 말씀을 새긴 증거판을 보관할 것이기에 그것이 귀하게 치장이 되고 있습니다(25:11, 16, 21). 증거판이 그 속에 없다면 그것은 소위 외화내빈’(外華內賓,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빈약함)이 되고 말 것입니다. 증거판을 그 속에 보관할 것이기에 증거궤의 바깥을 금박으로 둘러싸고 위쪽 가장자리에는 금테를 두르고 있습니다(25:11).

셋째로, 광야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들어갈 때까지 유목생활을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축이 먹을 풀을 찾아서 떠도는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집은 이동식 천막입니다. 자연히 성막도 이동하기에 편해야만 합니다. 같은 이유로 그 속에 들어갈 기물도 모두 운반할 수 있도록 디자인을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증거궤를 마치 가마처럼 사람들이 옮길 수 있도록 고안을 하고 있습니다; “증거궤의 발치에 금고리 네 개를 달고 있습니다. 발치 각 모서리에 금고리를 하나씩 단 것입니다. 그리고 금박을 입힌 조각목 채를 양쪽 고리에 꿰어서 어깨에 멜 수 있도록 합니다”(25:12-15).

넷째로, 증거궤 속에 증거판을 일단 보관하게 되면 그때부터 그것을 빼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취지를 적은 증거판은 항상 증거궤 속에 넣어두도록 되어 있습니다(25:16).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의 취지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번 마음 판에 새겨지면 마치 하나님의 임재와 같이 변함이 없습니다.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 말씀의 취지를 증거궤 속에 항상 보관하라고 조치하신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은 증거궤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말씀의 뜻이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운반용 채를 그 고리에서 빼내지 아니하고 계속 걸어두라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고 있습니다(25:15). 그 뜻은 우리 성도들도 항상 이동용 채를 걸어두고서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면 즉시 움직일 수 있도록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옳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이 정상적이며 적극적인 성도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른 바 노마드 인생’(nomad life style)입니다.

 

속죄소에 관한 묘사와 기능(24:17-22)

 

속죄소는 증거궤의 뚜껑입니다. 그런데 성막의 설계에 있어서 증거궤가 가장 중시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지성소 안에 오직 증거궤만이 배치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성소는 사람이 접근할 수가 없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임재를 하고 있는 지극히 거룩하게 구별이 된 장소입니다. 그 속에 증거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이유는 증거판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취지를 새겨놓은 십계명 돌판이 증거궤 속에 들어 있기에 그 궤짝이 존귀합니다. 마찬가지로 그 뚜껑인 속죄소도 거룩한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 말씀의 취지가 울려나올 때에 증거궤 뚜껑인 속죄소가 한 가지 기능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이름 그대로 그것은 속죄의 기능입니다. 실제로 증거궤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울려 나오는 경우는 백성들의 죄를 사해준다는 신탁의 경우입니다(16:2, 13-17, 29, 34). 그것은 속죄함을 받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 기쁜 소식이 뚜껑을 들썩이면서 흘러나와 일종의 음성으로서 대제사장의 귀에 들리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광경을 모세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25:21-22).  

속죄소는 증거궤의 뚜껑입니다. 그러므로 가로와 세로가 증거궤의 크기와 일치하고 있습니다(25:17). 증거궤가 거룩하므로 그 뚜껑인 속죄소도 거룩합니다. 그래서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있습니다; “금으로 그룹(천사)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한 그룹은 이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어리로 연결할지며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25:18-21).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으로 세상을 섭리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닮도록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1:26-27). 그렇다면 사람의 심령과 모습을 보면 어느 정도 하나님의 성품과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입으로 말을 하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그 입에서 울려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이 진면목이며 창조주의 영광의 빛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21:23, 22:3-5). 그것을 보게 되면 부활과 영생의 은혜를 입지 못하고 있는 옛 하늘과 옛 땅 그리고 삼라만상이 모두 녹아 내리게 됩니다(벧후3:12-13, 21:1). 그래서 하나의 예방조치가 취해져 있습니다. 그것은 천사들의 날개로 하나님의 보좌와 얼굴을 가리고 있다는 것입니다(33:20-23, 1:11, 20-28).

결론적으로, 똑 같은 의미로서 속죄소를 두 천사의 날개가 덮고 있습니다(25:20).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 나오고 있는 발생장소를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증거궤와 속죄소는 마치 하나님의 보좌와 같은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마치 증거궤와 속죄소를 대하는 것과 같은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적혀있는 성경을 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천사들이 그 날개로 보호하고 있는 성경말씀입니다. 함부로 접근해서도 아니 되며 함부로 다루어서도 아니 됩니다. 옷깃을 여미면서 말씀을 보고 들으며 말씀의 취지를 깊이 묵상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는 자는 주님의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진심을 만나게 되는 행운을 누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의 성령님의 역사라고 하겠습니다(14:17, 26, 1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