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출애굽기 강해 제103강(출24:7-1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4. 24. 04:18

출애굽기 강해 제103(24:7-11)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96()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겠다고 맹세를 하고 언약의 피로써 제사를 지내고 나자 그들을 대표하여 모세와 아론 3부자 그리고 장로 70인이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다(24:7-11)

 

본문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줍니다. 특히 예수님의 새 언약과 관련하여 그러합니다; 첫째, 사람들은 예수님이 복음으로 전해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겠다고 먼저 고백을 하여야 합니다(24:7, 28:20a, 10:9-10). 둘째, 그리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대속의 피로써 깨끗함을 받아야만 합니다(24:8, 9:14-22). 셋째, 그러면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성도들에게 강림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을 합니다(24:9-10, 28:19, 24:49, 1:8, 2:1-4, 10:6-8). 넷째, 하나님의 존전에서 먹고 마시며 영적인 삶을 영위하게 되는 특혜가 성도들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24:11, 28:20b, 2:42-47).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기록했습니다(24:4). 그 내용을 백성들에게 낭독하도록 조치합니다(24:7a). 그러자 백성들이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그대로 지키고 행하겠다고 입으로 맹세를 하고 있습니다(24:3, 7b). 그것도 두 차례나 맹세를 하고 있습니다; 첫째, 모세로부터 말씀을 들었을 때에 일차 맹세를 합니다(24:3). 둘째,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언약의 피 앞에서 또 한번 맹세를 하고 있습니다(24:7). 그 뜻을 풀이해보면, 말씀을 전하여준 모세 앞에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준행하겠다고 맹세를 하고 나서 그 다음에는 제사를 드리고 그 제물의 피를 제단에 뿌리면서 하나님 앞에서 또 한번 맹세를 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겠다는 서약은 사람 앞에서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사람 앞에서 약속한 것은 쉽게 번복하거나 위약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번복한 책임을 지고 위약금을 물려주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영생의 하나님 앞에서 피의 맹세를 한 것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목숨뿐만 아니라 영생의 문제까지 연결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하여 위약을 할 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진노와 징계가 임하고 있습니다. 바로의 경우가 그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재앙이 임하자 바로는 일단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겠다고 약속을 합니다(8:8, 28). 그러나 재앙이 물러가고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면 다시 자신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약속을 이행하지 아니합니다(8:15, 32). 그러자 애굽 땅에 더 큰 재앙이 닥쳐오고 있습니다(8:16, 9:3)”.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배신을 함으로써 더 큰 재앙을 자초하고 있는 바로의 어리석은 전철을 밟지 말아야만 합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라는 모세의 율법은 그대로 새 언약을 지키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해석으로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9-1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28:20).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겠다고 하는 맹세가 부활하신 그리스도 앞에서 있게 되면 이에 따라서 성령님의 강림하심과 내주하심이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시사해주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겠다고 제사를 드리고 그 피를 두고서 맹세를 하고 있습니다(24:6-8). 그 옛날 조선 땅에서도 백성들이 백마의 피를 두고서 맹약을 했습니다. 그 뜻은 맹세를 어기게 되면 피로써 그 값을 치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수없이 어기게 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어서 약속을 지키도록 말씀하셨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예외적인 경우로서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다윗의 철저한 회개와 말씀의 순종 그리고 명예의 회복이 돋보이고 있습니다(삼하12:13-15, 22-23, 왕상1:4, 13:22). 그리고 이방인의 역사 가운데에서는 요나 선지자의 말을 듣고서 곧 회개를 한 특이한 경우가 있습니다. 니느웨의 왕과 백성들이 모두 회개함으로써 멸망을 면하고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3:3-10). 그것이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따라서 기타의 경우에 있어서는 이제 모두가 항명죄로 죽은 목숨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죽음의 대가를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대속의 어린 양이 되어 대신 치르고 있습니다(1:29). 따라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이제는 백성들에게 대속의 피 값을 청구하고 있습니다. 대속의 피로 다시 살아난 목숨이므로 이제 남은 인생은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은 남은 생애를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히브리서의 저자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의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9:14-15). 요컨대,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피를 믿고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감으로써 죄 사함을 받은 거룩한 인생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소위 그리스도에게 바쳐진 제자의 삶이며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살아가게 되는 성도의 삶입니다. 그 점을 다음과 같이 히브리서가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9:17-22).

셋째로,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들에게 사명을 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산으로 부르신 적이 많습니다. 모세가 그러하고 엘리야가 그러합니다(24:12, 왕상19:8). 그런데 새 언약의 시대가 되면 하나님께서 아들의 성육신을 통하여 인간세상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때부터 구태여 하나님의 산으로 백성들을 부르시지를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4:21),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4:23),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8:16). 예수님은 자신에게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함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8:29)”.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을 본 자는 이미 아버지 하나님을 보았다고 자신 있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14:9).

일맥상통하는 말씀을 사도 바울이 신명기에 실려 있는 모세의 기록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10:6-9). 참고로, 그 원형이 되고 있는 모세의 신명기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라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30:11-14). 요컨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의 성육신으로서 이 세상 백성 가운데 오셨다는 그 은혜를 너무나 실감나게 기술하고 있는 글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성육신하여 인간의 몸으로 한 평생을 사시게 되는 예수님은 육신적으로 시공간에 갇혀서 지내게 됩니다. 무척 답답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덤에서 부활하신 이후에는 그 불편한 몸을 벗어버리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영적인 부활의 몸을 입고 계십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다음에는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여 하나님의 영을 제자들에게 임재를 시키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몸이 성령님을 모시게 되자 그때부터 일종의 성전이 되고 있습니다(고전6:19). 그 자리에 영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임재하시고 계십니다(14:16, 18, 20). 그때부터 성도들에게 부활과 승천, 구원과 영생이 이미 영적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성령님께서 진리로 깨닫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 진리를 깨달아 확신하고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강화하기 위하여 또 다른 보혜사이신 진리의 성령님께서 오늘도 성도들의 속사람 속에 내주하시면서 계속 역사하시고 계십니다(14:16-20, 26). 그와 같은 확신이 세상을 이기는 유일한 능력이 될 것임을 예수님이 아시고 계십니다. 따라서 제자들에게 부디 성령님의 강림으로 능력을 받아서 복음사역에 나서라고 강조하신 것으로 보입니다(24:49, 1:8, 2:1-4). 한 마디로, 복음사역 그것은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차원을 이미 넘어서고 있는 과업이라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하나님의 존전(尊前, 존귀하신 분의 앞)에서 먹고 마시며 영적인 삶을 구가할 수 있는 것은 특혜 중의 특혜입니다. 그 특혜가 모세와 아론 그리고 아론의 두 아들과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족장들인 70명의 장로들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24:9-11). 하나님의 진면목을 보는 자는 죽습니다(33:20). 그리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19:20-21). 하나님께서 허락을 하셨기에 그들 74명의 지도자들은 240만명에 이르는 백성들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이를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하나님의 진면목을 본 것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발 아래를 보았을 뿐입니다. 그곳의 풍경이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였다고 묘사가 되고 있습니다(24:10).

그 대목은 사도 요한의 계시록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21:10-11). 74명의 지도자들이 올라간 그 자리가 바로 새 예루살렘 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훗날 예루살렘 성전에는 대제사장과 70인의 장로들이 산헤드린 공회를 구성하고 있습니다(11:47, 22:66, 23:50, 4:15, 5:34). 그들이 유대교의 경전을 해석하고 율법을 적용하여 백성들의 종교재판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유대교의 최고기관이 그곳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시내 산에서의 경험이 그와 같은 제도를 탄생시키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본문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어떠한 의미를 지니게 될까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존전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함께 먹고 마시며 성도간에 교제를 할 수가 있다고 하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먼저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생명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 풍성한 꼴을 얻습니다(6:48-51, 10:10). 그리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돌보게 됩니다(25:34-40). 그와 같은 공동체가 훗날 예루살렘에서 탄생을 하고 있습니다. 이른 바 오순절 성령님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형성되기 시작하는 초대교회의 탄생입니다(2:1-4, 4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