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출애굽기 강해 제97강(출23:1-9)(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4. 21. 19:21

출애굽기 강해 제97(23:1-9)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831(주일저녁)

 

공의, 공정, 공평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율법(23:1-9)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의 입장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한번 생각해보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 해답을 얻자면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창조를 여섯째 날에 마무리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매우 만족해하셨습니다(1:31). 이 세상에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 있는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자식과 같이 소중하고 의미가 있는 존재의 창조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 세상을 경영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려고 작심까지 하셨습니다(1:26-28). 그렇게 결심하신 더욱 근본적인 이유는 영이신 하나님께서 물적인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생각을 물적인 세상의 경영에 반영을 하자면 영과 물의 합일체인 사람이 그 적임자였기 때문입니다(2:7). 그렇지만 사람 가운데 아무나 뽑아서 그 일을 맡길 수는 없었습니다. 수 많은 남자와 여자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고 있는 자를 선택하여 그 일을 맡기고 싶어하셨습니다”.

일차 대상자가 선정이 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이 아담입니다(2:7-8, 19).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지내시면서 세상의 경작과 문명을 일으키는 방법을 전수하기를 시작하셨습니다. 그 장소가 에덴동산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중매한 하와와 가정을 이루고서 하나님 앞에 의미가 있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던 아담이 사랑스러운 그 아내 때문에 그만 실족을 하게 됩니다. 사탄의 화신인 뱀의 꾀임을 받고서 자신들도 한번 하나님처럼 지혜의 근본이 되어보고자 결심을 하였기 때문입니다(3:1-7). 아무리 사랑스러운 피조물이라고 하더라도 창조주의 고유권한을 침범해서는 안됩니다. 동산 중앙에 심겨져 있는 선악과 나무와 생명과 나무가 소위 금기의 대상입니다(2:17). 그런데 피조물인 인간이 감히 하나님같이 되고자 하여 그 경계선을 침범하고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사탄의 특징인 거짓말과 책임회피 그리고 끊임없는 정죄와 탐욕 나아가서 정욕적인 안목까지 인간의 삶에 들어오고 말았습니다.

이제 생명나무의 열매까지 따먹게 되면 죄 가운데 영생을 하게 되는 저주스러운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3:2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부부를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시고 생명나무에 아예 접근을 할 수가 없도록 동산입구인 동쪽 길을 봉쇄하셨습니다(3:23-24). 그렇지만 그때부터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을 구원하실 계획을 또한 모색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후손은 언제 어떻게 에덴동산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되돌아올 수가 있을까요? 그것이 성경 66권의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1:29, 3:13-21, 21:6-7, 22:1-5). 이상과 같은 인식을 가지고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한번 정리를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인간은 하나님의 생각보다 자신의 생각을 앞세우고자 하는 존재입니다. 창조주의 생각을 무시하고 자신의 판단을 중시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천지만물의 창조와 운영의 이치를 깨닫게 되면 하나님과 같이 될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인간의 생각은 피조물이 마땅히 창조주 앞에서 지녀야만 되는 법도와 분수를 벗어난 것입니다. 원죄의 시작도 그리고 결과도 모두 그것입니다. 그것은 심판의 대상이며 영적인 어두움 가운데 헤매고 있는 인생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러한 죄악의 인생을 청산할 수가 있을까요?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생각대로 인생을 살다간 모범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범을 따라서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을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야만 합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성령님의 오심이 모두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23:34, 24:49, 1:8, 2:36-42).

둘째, 인간의 탐욕과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탐욕과 욕심은 자신의 생각과 이익만을 극대화시키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같은 피조물인 다른 사람들의 권리와 이익을 한없이 무시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공정하지 못하며 편파적인 사고이며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의 안목으로 공평하게 나와 너 그리고 우리들과 그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도록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율법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의 본문이 그러합니다. 이제부터 공의, 공정, 공평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담고 있는 율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유언비어를 만들어서 퍼뜨리지를 말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23:1). 사탄은 거짓의 아비입니다(8:44). 그러므로 사탄을 추종하고 있는 악인들이 거짓말을 지어서 퍼뜨리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사탄의 하수인이 되고 있는 악인들과 같은 행동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23:1a). 법정에서도 거짓 증언을 하는 자가 위증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거짓말을 하는 위증자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23:1b).

둘째로, 자신을 보호하며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하는 자는 다수를 따라 행하는 자입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세상에서 다수가 소수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물론 전문화와 분업이 진행될수록 소수의 전문가가 다수인 대중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산업선진국인 민주국가에서는 다수의 표가 소수의 표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다수의 편에 서는 것이 승리를 얻는 방법입니다. 나라의 통치권인 대권도 다수 득표자가 차지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양적인 것이 지배하는 사회의 모습에 불과합니다. 질적인 사회가 도래하게 되면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비록 소수라고 하더라도 창조주의 뒷받침이 있게 되면 그들의 주장이 세상을 이끌어나가게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진리는 세상의 인기와 무관하며 다수의 표로 증명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율법조항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며”(23:2).

이방인이 원주민에 비해서는 항상 소수입니다. 따라서 다수인 원주민이 이방 나그네에 대하여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도록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23:9).   반대로, 소수가 항상 의롭고 옳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번연히 다수의 의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수에게 동조하여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챙기지 말라는 경고의 뜻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공의는 피조물들의 다수의 의견과 표에 의하여 결정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세상에서 가난한 자라고 하여 항상 의롭고 옳은 사람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을까요? 반대로 부자라고 하여 늘 불의를 행하여 자신의 이익만 챙기고 있는 사람일까요? 율법은 그렇지 아니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지니라”(23:3),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정의를 굽게 하지 말며”(23:6) 라고 경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비추어볼 때 가난한 자의 입장이 옳은 것이라면 당연히 그 편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단지 약자이며 가난한 자라고 하여 항상 그 입장이 옳다고 간주하고서 두둔을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입니다. 만약 가난한 자라고 하여 무조건 옳다고 간주하고서 세상을 운영하게 되면 끊임없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반복이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되면 인간의 본성이 변하지 아니하는 이상 또 가난하게 된 자를 핍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그것은 마치 막스 웨버의 관료주의의 병폐또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무가치성이라는 주장을 되돌아보게 해줍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있었지만 세월이 지나자 노동자 농민들 가운데 새로운 부르주아가 탄생하여 쏘련 연방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 공산주의 간부들의 명단이 이른 바 노멘크라투라’(특권 엘리트)입니다. 국가를 이끌어가기 위하여 막강하고도 비대한 관료제가 항상 권력을 잡고 있는데 그 위에 지배세력이 바뀐다고 하여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그 지배세력도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그 옛날의 지배집단처럼 체제의 안정만을 희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월혁명으로 크레믈린 광장에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린 보람이 없지 않겠습니까? 막스 웨버의 지적은 유일하게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근본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개인적으로 원수나 적대자라고 하더라도 그 권리를 인정하고 나아가서 소유권을 존중해주라고 율법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23:4-5). 하나님께서는 어느 일방만을 두둔하거나 보고 계시지 않습니다. 나와 너와 우리 그리고 그들까지 모두를 보시고 계십니다. 모든 입장을 폭넓게 동시에 통시적으로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 앞에 자신의 입장만을 강조하면서 항상 자신을 의롭다 하시고 편을 들어 달라고 하는 것은 옳지가 않습니다. 반대로, 모두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견해만이 옳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의 성숙함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공정함은 그때 인간세상에서 성도를 통하여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것이 빛과 소금의 역할일 것입니다(5:13-14). 그와 같은 입장에서 원수나 적대자라고 하더라도 반대만 하지 말고 자신과 똑 같은 권리를 인정해주고 그 소유권을 지켜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5:44)는 예수님의 말씀이 금과옥조로 다가오게 됩니다.

다섯째로, 하나님께서는 죄악의 관영함을 보시고 거주민을 그 땅에서 쫓아내십니다. 구체적으로, 아모리 족속 등 가나안 족속의 죄악이 흘러 넘치는 것을 보시고 그 땅을 뺏어서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주시고 계십니다(15:16, 7:20, 9:5). 하나님께서는 마치 빗물의 양을 측정하는 측우기처럼 무죄한 자가 흘리는 피의 양을 측정하는 용기(容器, 그릇)를 가지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여서 그 피가 많아지게 되면 이방나라는 물론이고 제사장나라라고 하더라도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왕하21:11-16). 그 사실을 말하고 있는 율법조항이 다음과 같습니다; “거짓 일을 멀리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23:7).

여섯째로, 율법은 공정함과 공평함을 무너뜨리는 세상적인 방법 하나를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뇌물의 성행입니다. 혹자는 국가가 규제일변도의 법 체제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경제개발과 산업화에 있어서 애로사항이 많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뇌물이 일종의 윤활유 역할을 하여서 각종 규제완화 및 빠른 경제개발을 도와주고 있다고 지적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과업만 달성하면 된다고 하는 일종의 목표달성주의의 삐뚤어진 시각에 불과합니다. 뇌물을 받아서 챙기는 자가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뇌물을 준 자와 아니 준 자 사이에 공평한 잣대를 적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와 같은 뇌물의 효과를 모세의 율법이 정확하게 기술을 하고 있습니다;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23:8).

결론적으로, 피조물의 형편을 두루 살필 수 있는 눈은 창조주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 눈이 있어야 공의, 공정, 공평을 논할 수가 있습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은 시공간에 갇혀서 살고 있으며 생존의 본능 때문에 자신의 생각과 입장만을 내세우기 일쑤입니다. 그러한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의와 공평을 행할 수가 있을까요? 그 방법은 오로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묵상과 성령님의 인도하심 밖에 없습니다(11:2-5). 그것이 어렵다면 예수님께서 어떠한 판단을 하시고 어떠한 인생을 살아가셨는가를 열심히 연구하고 그 뒤를 따라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9:7). 그렇게 살아가는 성도에게 성령님의 도우심과 역사하심이 각별하실 것입니다. 한번 경험해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