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출애굽기 강해 제93강(출22:5-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4. 20. 04:07

출애굽기 강해 제93(22:5-6)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826()

 

고대 이스라엘의 율법에서 발견이 되고 있는 민폐(民弊) 또는 이웃에 대한 불법방해행위’(nuisance)와 그 무과실(無過失) 책임에 관한 규정(22:5-6)

 

신기하게도 고대 이스라엘의 율법에서 오늘 날 현대국가가 규정하고 있는 이웃에 대한 폐해 또는 불법적인 방해에 해당하는 ‘nuisance’ 조항이 엿보이고 있습니다; “사람이 밭에서나 포도원에서 짐승을 먹이다가 자기의 짐승을 놓아 남의 밭에서 먹게 하면 자기 밭의 가장 좋은 것과 자기 포도원의 가장 좋은 것으로 배상할지니라. 불이 나서 가시나무에 댕겨 낟가리나 거두지 못한 곡식이나 밭을 태우면 불 놓은 자가 반드시 배상할지니라”(22:5-6). 전자는 가축이나 애완용 동물을 잘 관리하지 못하여 남의 밭 작물을 해친 경우에 충분한 배상을 하라는 율법의 조항입니다. 후자는 밭에서 불을 일으켜서 무엇을 태우거나 벌레를 죽이다가 그만 예상하지도 못한 바람의 변화로 그 불길이 이웃의 밭으로 옮겨 붙은 경우에 대한 율법의 규정입니다. 역시 반드시 배상을 하도록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주인이 키우고 있는 가축이나 애완용 동물을 잘 관리하지 못한 책임이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과실이 있느냐 없느냐를 가지고 시비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갑자기 바람이 방향을 바꾸어서 이웃의 밭으로 불기운이 번져나갈지 꿈에도 생각하지를 못했다고 변명을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불이 이웃으로 번지지 아니하도록 사전에 충분히 주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불이 번졌다고 주장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소위 무과실이므로 책임이 없다고 하는 이론입니다”. 그런데 22:6’ 절에서는 그 주장을 받아 들이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무과실을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배상의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고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람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서 그렇게 불지 어떻게 예측을 할 수 있겠느냐고 변명을 하지 말고 불을 놓은 당사자가 반드시 배상의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조항입니다. 그것은 현대국가가 도입하고 있는 일종의 무과실 책임에 해당이 됩니다. 물론 무과실 책임을 져야만 하는 당사자는 억울합니다. 왜냐하면, 이웃에 방화를 하고자 하는 고의성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사자가 불이 번지지 아니하도록 계속 지켜보고 있었기에 과실이 있었거나 의무에 태만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어느 사이에 바람의 세기가 달라지고 풍향이 바뀌어서 순식간에 울타리 가시나무에 불이 옮겨 붙었습니다. 그리고 이웃의 밭으로 번져서 그만 밭 작물을 태워버린 것입니다. 일견하기로는 정상참작의 대상으로 보입니다. 아니면 무과실이므로 책임을 묻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하는 주장이 성립이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무과실이라고 하더라도 배상의 책임이 따르도록 율법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오늘 날은 이웃이 불을 다루는데 있어서 사전에 기상조건을 충분히 고려해야만 하며 더 많은 관심과 대비책을 가지고 불을 관리해야만 한다는 뜻에서 배상의 책임을 면제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현대국가에서 그렇게 규정할 수 있는 이유는 기상분석과 예보제도가 상당히 발전이 되어 있어서 좀더 주의를 기울인다면 충분히 안전하게 불을 관리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모세의 율법은 여건이 그러하지 아니한 3,500년 전의 고대사회에서 적용이 되고 있는 법입니다. 왜 그렇게 율법조항을 무리하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그 밭의 생산물이 주 소득원이 되고 있는 농업사회이기에 그렇게 엄격하게 책임을 묻지 아니할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배상을 받지 못하게 되면 그 밭의 농작물이 몽땅 타버렸기에 그 이웃은 생계가 막연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배상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것은 율법이전에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갑자기 불이 번져서 이웃에 배상을 해주고 나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요? 그 사람 역시 먹고 살 방도가 막연해집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래서 그런지 율법에서는 가난한 이웃이 먹고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규정을 별도로 마련하고 있습니다; 첫째, 추수를 할 때에 일부를 밭에 놓아 두도록 합니다(24:19-21). 그것은 가난한 이웃들이 주워가는 것입니다. 룻기가 그 사실을 적고 있습니다(2:3, 8, 23). 둘째, 제사를 드리고 일부를 제사장과 함께 먹을 수 있도록 만들고 있습니다(14:29, 26:12-13). 셋째, 먹고 살 도리가 없어서 종이 된 경우에도 안식년이 되면 해방을 맞이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25:39-43). 넷째, 친지들이 종이 된 일가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기업을 무르는 자의 책임을 지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25:47-55).

 

현대법률에서 규정하고 있는 ‘nuisance’에 대한 규정이 이미 모세의 율법에서 발견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무엇을 알 수 있게 되는가?(22:5-6)

 

현대인들은 과학문명이 엄청나게 발달이 되어 있는 21세기 후기 산업사회에 살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산업화 또는 근대화가 되지 못한 국가나 사회를 미개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지역간에도 그러한데 그 옛날 과학문명이 발달하기 이전 시대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 미개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이전 시대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생각이 미개하고 그 법률의 체계도 원시적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을 살펴보게 되면 소위 무과실 책임론까지 조문화하고 있으므로 결코 미개하다고 말할 수가 없게 됩니다. 3,500년의 세월의 경과가 무색해지고 있습니다. 그 율법을 오늘 날 현대사회에 그대로 도입을 하더라도 별로 불편할 것 같지가 아니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아무래도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영이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세상에 선물해주신 것이기에 그 율법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지혜의 빛을 여전히 발휘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