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출애굽기 강해 제61강(출15:22-2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4. 4. 19:22

출애굽기 강해 제61(15:22-27)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720(주일새벽)

 

홍해를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로에 나타나는 이상한 세 가지 현상과 그 교훈(15:22-27)

 

밤새 홍해를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벽에 바다에 떠오르고 있는 애굽 병사들의 수 많은 주검을 목격할 수가 있었습니다(14:30). 그 광경을 보고서 그들은 승리감에 도취가 되어 무작정 구름기둥 불기둥을 따라 3일간 광야 길을 진행했습니다(14:31, 15:22). 그러자 그들 앞에 세 가지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 그 광야의 정체가 에담인지 수르인지 불분명합니다(15:22, 33:8). 둘째, 전혀 물을 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 이상하게도 쓴 물 마라에 하나님이 가리키는 한 나무를 던졌더니 단물로 바뀌고 있습니다(15:25).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 동안 애굽의 고센 땅에서만 지내왔습니다. 특히 최근 124년 동안에는 비돔과 라암셋 등 신도시 건설현장에서 노예생활을 하면서 강제노역에 시달렸기에 국경바깥으로 전혀 나가본 경험이 없습니다(1:11-14). 유일하게 모세가 40년 전에 개인적으로 애굽을 탈출하여 아라비아 서북부 미디안 땅에서 양치기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미디안 광야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시나이 반도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믹돌에서 홍해바다를 건너 동쪽 시나이 반도로 건너온 이후부터 백성들의 길잡이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도하고 계시는 그 행로가 참 이상합니다.  사람이 살지 아니하고 또한 다니지도 아니하는 길만을 골라서 가도록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이 통과하고 있는 곳이 에담 광야인지 아니면 사흘 동안 걸었기 때문에 이제는 수르 광야로 접어 들었는지 도통 분간을 할 수가 없게 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모세의 기록에 있어서도 출애굽기에서는 수르 광야로 기록을 하고 있으며 민수기에 있어서는 에담 광야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15:22, 33:8). 그와 같은 이중적인 표현은 모세 자신도 마라로 가는 길이 어느 광야에 속하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만약에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면 모세가 그곳의 지명을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파악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구름기둥 불기둥을 따라서 진행하고 있는 길에는 이상하게도 현지 주민들이 전혀 없습니다. 그 넓은 광야에 유목민도 없으며 약탈부족도 출몰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코스는 철저하게도 침략자들로부터 배제가 되고 있는 예외적인 행로입니다.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의도가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는 코스입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13:17). 어쨌든 그와 같이 지명이 헷갈리고 있다는 것은 사람이 전혀 살 수가 없다는 사막과 같은 광야임을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전혀 내왕을 하고 있지 아니하는 광야에 200만명이 넘는 백성을 집어넣고 계시는 하나님의 속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가지 훈련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면 전혀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각인을 시키고자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떼시면 모두가 죽은 목숨들입니다. 그들의 생사가 정확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에 절대적으로 의존이 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확실하게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탈바꿈이 되는 첫 번째 인식의 전환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마실 물조차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으로 출애굽을 시킨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째서 물도 구할 수 없는 곳으로 계속 인도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가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꾸어주시는 장면에서 다음과 같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쓴 것)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15:22-25). 물을 구할 수 없게 되자 갈증을 참지 못한 백성들이 모세에게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한 처지에 밀어 넣고 있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전혀 문제의 해결방법이 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유일한 해결의 방법은 모세처럼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15:25). 애굽에서 장자의 죽음을 면하게 해주시고 출애굽의 해방까지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열 번의 이적을 베푸셔서 하나님의 신위를 깨닫게 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물을 구할 수 없는 위기가 도래했다면 다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부르짖으면 됩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그 모든 하나님의 능력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불신하기에 바쁜 그들입니다. 한 마디로 배은망덕한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올바른 믿음을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정신상태도 고쳐야 합니다. 요컨대, 한번 하나님을 믿었으면 끝까지 믿으라고 하는 것이 이 대목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귀중한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면서 그것을 마라의 쓴 물에 던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세가 그렇게 했더니 신기하게도 쓴 물이 갑자기 단물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제 백성들은 못 마시는 물을 마실 수 있는 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러한 종류의 나무를 찾아서 그것을 쓴 물에 던지면 되는 것입니다. 마치 신통한 약방문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못 마시는 물이 나타나면 그렇게 처방을 할 것입니다. 순식간에 모든 염려가 떠나가고 있습니다. 오늘 날 많은 학자들이 그 나무가 바로 십자가의 예표(豫表, 미리 보여주는 상징)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십자가의 죄 사함의 은혜를 믿기만 하면 거룩한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러할까요? 현실적으로, 그러하지가 못합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손쉽게 죄 사함과 용서를 얻을 수 있는 도구로서만 인식을 하게 되면 거룩한 성도가 아니라 기복적이고 미신적인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더 깊은 교훈을 발견하기 위해서 그 대목을 다시 묵상을 해야만 합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12과 종려나무 7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15:25-27). 한 나무를 가리키시고 그것으로 쓴 물을 단물로 만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상한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첫째, 이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들을 시험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에게 치유의 은혜를 베풀겠다는 것입니다. 셋째, 그 다음에 그 나무가 없어도 단물과 안식을 한꺼번에 얻을 수가 있는 오아시스 엘림이 마치 기적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 그와 같은 오아시스의 등장이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마라에서 그렇게 이상한 말씀을 하시고 계실까요?

사람들은 그 기적의 나무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 수 있도록 그 나무를 주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제 그와 같은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그 비결을 사용할 것입니다. 그 나무를 찾아서 쓴 물에 던지면 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가지고 믿음이 무엇인가를 시험하겠다고 언급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올바른 믿음이 무엇인지를 밝히시는 대목입니다. 올바른 믿음이란 그 나무에 집착을 하거나 그것을 자신의 도구처럼 휘두르고 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할 때에 그 나무가 효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서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믿음입니다. 마치 앙꼬 빵에 앙꼬가 빠지고 없으면 앙꼬 빵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십자가의 은혜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대속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셨기에 십자가의 속죄를 믿는 성도들에게 칭의의 은혜가 임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시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방식이 옳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셨기 때문에 복음의 의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1:16-17). 그러므로 십자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과 그리스도의 헌신적인 대속의 정신이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확하게 생각하고 행동을 하는 그것이 치유함을 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7:21). 그 길에 십자가가 놓여 있습니다. 만약 그 전제를 잊어버리고 마치 십자가를 만병통치의 묘약처럼 섬긴다고 한다면 그것은 기복신앙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을 드립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고통을 참으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가운데 함께 고통하고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희생과 사랑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대로 생각하고 행하고자 결심하는 자에게 성령님의 충만하신 능력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24:49, 1:8, 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