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출애굽기 강해 제58강(출14:21-3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4. 2. 10:44

출애굽기 강해 제58(14:21-31)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717()

 

홍해사건에 대한 몇 가지 검토(14:21-31)

 

하나님께서 큰 동풍을 일으켜서 홍해의 바닷물을 좌우로 갈라지게 하셨으며(14:21a) 동시에 해저의 바닥을 바람으로 말리신 것으로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14:21b). 출애굽기 제1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애굽에 여덟 번째의 재앙을 일으키실 때에도 동풍을 불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동풍을 타고서 수많은 메뚜기 떼가 애굽 땅으로 날아왔습니다(10:13). 이번에도 똑 같은 동풍이 불어서 홍해가 갈라지고 그 바닥이 드러나며 동시에 물이 말라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바닥을 이스라엘 자손들이 일일이 자신의 발로 건너고 있습니다(14:22). 반면에 애굽의 병사들은 바닷속에 수장이 되고 있습니다(14:28). 여기에서 검토를 해보고자 하는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왜 동풍을 사용하고 계실까요? 둘째, 왜 일일이 자신의 발로 홍해의 바닥을 걷도록 만들고 계시는 것일까요? 셋째, 애굽의 대군을 홍해의 바닷속에 수장시킴으로써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선호하고 계십니다. 사실 성막과 성전의 입구가 모두 동쪽입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의 입출구가 동쪽인 것과 같습니다(3:24). 그래서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도 동문으로 나오고 있습니다(47:1, 22:1-2). 자연히 하나님께서 성전을 출입하실 때에도 동문을 사용하고 계십니다(43:1-4).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와 성령님도 그 동문을 통하여 세상과 연결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43:5). 한 마디로, 태양이 떠오르고 있는 동쪽이 희망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고 있는 방향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빛은 동방에서라고 말한 것이 자꾸만 의미심장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둘째로, 단단한 바닥이 확실하게 드러나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발로 그 바닥을 밟고서 홍해를 건너가게 될 것입니다(14:22). 그 장면을 상상해보면 훗날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 위를 걸어서 제자들의 배로 오신 장면과 비슷합니다(14:25). 일대 장관입니다. 사람의 기술과 과학의 힘으로써는 어림도 없는 일이 역사 가운데 발생하고 있는 대목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자 그러한 기적을 연출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을 자랑하기 위함일까요?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온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티끌과 같은 존재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실 이유가 하등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홍해사건을 일으키시고 또한 베드로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갈릴리 호수 위를 걸어서 예수님께 와보라고 말씀하시는 의도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발로 걸어서 죽음의 바다를 지나 생명의 언덕으로 올라오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조상 한번 잘 만난 덕택에 유월절 어린 양의 은혜를 입어 장자의 죽음을 면하고 애굽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된 행운아들입니다(2:24-25, 12:13). 그런데 홍해사건에 있어서는 그 입장이 다릅니다. 어두운 밤에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체험하고 있습니다(14:21). 바닷물이 마치 높은 빌딩처럼 양쪽에 서 있습니다(14:22b, 29b).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서 그 사이를 자신의 발로 걸어서 건너가라고 하십니다(14:15, 22a, 29a). 만약 조금이라도 착오가 생기는 날에는 마치 베드로처럼 물에 빠지거나 애굽의 병사들처럼 순식간에 수장이 되고 말 것입니다(14:30-31, 14:28, 30b). 그것은 높은 절벽 사이에 걸려있는 나무 다리를 건너고 있는 것처럼 모골이 송연한 일입니다. 손에 땀을 잔뜩 흘리면서 눈을 질끈 감고서 밤새 바다 가운데 나있는 좁을 길을 건너가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14:29). 그 발걸음이 끝나는 곳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14:30a). 그 장면이 바로 완전하게 육체적으로 애굽을 탈출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요컨대, 자신의 발로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철저하게 믿고서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는 그것이 바로 좁은 문을 통과하는 신앙생활임을 적나라하게 가르쳐주고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7:13-14).

셋째로, 하나님께서 홍해 바닷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애굽의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신다는 것입니다(14:17). 그것은 마치 을지문덕 장군이 AD 612년에 수 나라의 군대를 살수(청천강)에서 모두 수장시켜버린 사건과 동일한 사건이 그 옛날 홍해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 비보(悲報, 비극적인 소식)를 접하게 되면 애굽 백성들이 모두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들의 주신(主神)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게 되면 창조주께서 애굽에서 영광을 얻으시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이 됩니다(14:18).

넷째로, 그 광경을 쳐다보게 되는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제 애굽의 압제가 완전히 끝났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너왔지만 애굽의 추격군들은 모두 수장이 되고 죽어버렸기 때문입니다(14:30). 그 때문에 모세는 그들이 보게 된 광경을 의도적으로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들이 다 그들의 뒤를 추격하여 바다 가운데로 들어오는지라.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과 구름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애굽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그들의 병거바퀴를 벗겨서 달리기가 어렵게 하시니 애굽 사람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앞에서 우리가 도망하자. 여호와가 그들을 위하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 도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들의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 하시니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14:23-28).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출애굽이 완벽하게 이루어졌음을 알고서 드디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찬송하게 됩니다(14:31a). 나아가서 하나님의 사자인 모세를 신뢰하게 됩니다(14:31b). 그러한 신뢰와 믿음 위에서 장차 제사장나라가 건설이 되고 운영이 되어나갈 것입니다(19:68).

 

바로의 마음은 스스로 완악해진 것인가? 아니면 완악함을 당한 것인가? 그 귀책사유의 행방에 대한 검토(4:21, 7:3, 13-14, 22, 8:15, 19, 32, 9:7, 12, 34-35, 10:1, 20, 27, 11:10, 13:15, 14:4, 8, 17)

 

바로의 완악함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묘사가 되고 있습니다; 첫째, 바로가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점이 10차례나 서술이 되고 있습니다(7:13, 14, 22, 8:15, 19, 32, 9:7, 34, 35, 13:15). 둘째,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두 10차례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4:21, 7:3, 9:12, 10:1, 20, 27, 11:10, 14:4, 8, 17). 왜 똑 같은 비중으로 두 가지로 기록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1:26-27). 비록 흙을 소재로 하여 인간의 육체를 지으셨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을 닮아 있는 영성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유일하게 이 세상에서 영성과 육체를 함께 가지고 있는 만물의 영장이 되고 있습니다(2:7). 그 결과 혼적인 작용이 가능해지고 있습니다. 지성과 감성 그리고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고 있으므로 짐승들과 다릅니다. 그저 반사적인 신경을 가지고 본능적으로 야성적인 삶만을 살아가고 있는 그들과 다릅니다. 사람은 이성적인 판단을 하고 영성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의 자유의지로 옳고 그른 것을 선택하면서 살아가는 존귀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동생 아벨에게 시기심을 느끼며 살의까지 품고 있는 카인에게 그 죄의 충동을 억제하라고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4:7).

그러한 사실에 비추어 보면, 애굽의 최고통치자인 바로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있다는 기록이 정당한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의 마음을 굳건하게 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있는 귀책사유는 분명하게 바로에게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된 선택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바로와 애굽에 임하고 재앙이 밀어닥칠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게 되면 영원한 파멸과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둘째로,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홍수심판 후에 노아의 제사를 받으시고 피조물을 대표하고 있는 노아 앞에서 무지개언약을 세우시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8:21-22, 9:14-17). 이제부터는 전면심판이 아니라 부분적인 심판을 행할 것이며 악의 뿌리를 도려내고서 사람을 살리겠다고 하는 정책의 선언을 노아의 가족에게 하신 것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계획이 출애굽기에서는 어떻게 드러나고 있을까요? 그것이 상당히 이상하게 기록이 되어 있는 표현 곧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강하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자부심이 강하고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있는 바로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잠시 순종을 했다가 여건이 좋아지면 다시 약속을 어기고 있는 바로입니다. 그런데 그 바로를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바로의 잘못을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대목이 바로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었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그것은 귀책사유를 자신의 잘못으로 끌어안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를 잘못 만든 책임을 창조주 하나님께서 스스로 감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아들이 그 모든 책임을 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되는 영원한 제사가 있게 됩니다(7:27-28). 그 완전한 희생의 제사로 그 사실을 믿는 자들의 죄가 사면을 얻게 되는 일이 역사 가운데 발생하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미 출애굽기에서 그 대목을 깨닫도록 기술하고 있습니다.

수치로 따져본다면, 출애굽기에서 바로나 애굽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해지거나 완강해진다고 하는 묘사는 모두 20번이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바로나 애굽 사람들이 그들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있는 것으로는 10번뿐이라고 기술이 되고 있습니다. 나머지 10번의 언급에 있어서는 모두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말씀을 드린 그대로 창세기의 기록을 참고한다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도록 창조가 되어 있는 인간은 지성과 감성 그리고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매우 이성적인 존재입니다. 냉철하게 판단하고 그 결과를 가지고 자유의지를 행사하여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언급하고 계시는 20번의 완강함 또는 완악함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고 있는 마음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절반인 10번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게 완악한 마음을 먹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바로와 사람의 책임이 열 번, 하나님의 책임이 열 번입니다. 10은 완전수입니다. 따라서 그 내용은 완전한 바로의 책임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창조주 하나님의 책임과 피조물인 사람의 책임이 하나로 귀결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표현입니다(44:30, 10:30, 14:20). 참고로, 창세기 제44장에서 드러나고 있는 그 대목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유다가 왜 막내 동생 베냐민을 살려서 아버지의 집으로 데리고 가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생명과 막내 아들 베냐민의 생명이 하나로 묶여 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만약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막내 베냐민을 살려서 아버지에게 데리고 가지 못하면 아버지가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언급입니다(44:30-31). 그것은 창조주의 생명과 피조물인 사람의 생명이 별개가 아니고 서로 하나로 묶여 있다는 사실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로 묶여 있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17:21).

둘째로, 유다가 아버지 야곱에게 막내 베냐민을 반드시 살려서 데리고 오겠다고 맹세를 했습니다(43:9, 44:32). 따라서 그는 동생 대신에 애굽 총리의 종이 될 터이니 부디 베냐민을 살려서 아버지의 집으로 보내어달라고 통사정을 하고 있습니다(44:33). 그 방법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두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유다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44:34). 그와 같은 유다의 설명과 행동이 있게 되자 비로서 요셉의 원한이 풀어지고 있습니다. 그들 형제들 사이에 놀라운 화해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요셉이 22년만에 아버지를 다시 상봉하게 되는 은혜도 찾아옵니다.

출애굽기와 창세기의 본문 내용은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가 왜 필요한지를 가장 간단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원형적인 모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설명으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속죄양으로 돌아가시게 되는 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생명이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기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훗날 부활까지 함께 경험하게 되는 은혜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6:4).

참고로,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바로와 애굽 사람들의 잘못이 분명한 것으로 보이는 귀책사유의 절반을 하나님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고 계십니다. 그 결과 바로가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희생이 되고 맙니다. 그것이 대속의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바로와 애굽의 백성들이 그 사실을 믿고서 회개를 한다면 그들은 구원의 대상이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AD 1세기에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자 애굽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중심지가 됩니다. 이른 바 곱틱 교회의 탄생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주전 700년경에 이사야가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지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이므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들을 고쳐주시리라. 그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19:22-25). 여기서 앗수르와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전 760년경 갈릴리의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앗수르의 니느웨 성으로 가서 말씀을 전합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멸망을 당한다는 내용입니다(3:4). 참으로 신기하게도 앗수르의 왕부터 시작하여 모든 백성들이 회개를 합니다(3:5-9). 그러자 멸망 대신에 구원이 있게 됩니다(3:10)”.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한 마디로, 애굽 역시 앗수르처럼 회개를 하고서 장차 하나님 앞에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만민을 구원하는 복음이 전세계로 퍼져나갈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물론 그 중심에 이스라엘과 애굽 그리고 앗수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세 시대에 1,500년 후에 있을 복음의 시대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 방법이 여기서는 바로의 잘못된 결정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책임이라고 의제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을 모두 감당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자신을 죽음에 처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어린 양이 자신을 희생하신 십자가의 대속사건으로부터 바로와 모든 애굽 사람들이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1:29). 자신들의 잘못을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대신 감당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셨다는 표현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환언하면, 모세가 언급하고 있는 알 수 없는 그 대목이 곧 바로와 애굽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투영되고 있는 문장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