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강해 제56강(출14:4-10)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년 7월 14일(월)
바로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자는 바로인가 아니면 하나님이신가? 만약 하나님이시라고 한다면 어떻게 바로에게 그 책임을 물으실 것인가?(출14:4, 8)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예언의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출14:4). 예언의 말씀 그대로 실현이 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출14:8). 한 마디로, 사람의 마음을 철저하게 지배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잘못을 행한 책임을 물으실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고 계시는데 어떻게 선택의 잘못에 대하여 꾸중을 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에서 태어난 카인이 동생 아벨을 시기하고 살의가 가득할 때에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경고를 하시고 계십니다; “여호와께서 카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카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카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창4:6-8). 살인을 하려고 하는 마음을 억누르는 일은 카인이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대목입니다. 그렇지만 카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할 수 있는 억제력이 없습니다. 그의 자유의지와 선택권은 나약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경고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제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지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출7:3-4, 10:1, 11:10, 14:4, 8). 사람이 지배하고 제어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카인에게 대해서도 그 살인의 책임을 물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형제살인의 죄를 물어서 카인을 유배지로 떠나 보내고 있습니다(창4:12-14).
그와 정반대의 사례가 요나의 글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니느웨의 왕과 백성들이 선지자 요나의 경고를 듣자마자 모두 크게 회개를 한 것입니다(욘3:5-9). 그 결과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고자 하시는 계획을 철회하고 있습니다(욘3:10). 여기서 회개를 하려는 마음을 누가 심어주고 있는 것일까요?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는 회개하려는 마음을 주고 구원을 베풀어주면서 반대로 또 어떤 자에게는 완악한 마음을 주어서 재앙을 끝까지 당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컨대, 심판과 구원 그 자체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선택권도 자유의지도 전혀 개입이 되어 있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왜 모세는 사람들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일까요?(신30:15-20)
여기서 중요한 깨달음이 하나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주었으나 그것이 부패하고 타락하여 제 기능을 발휘하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과 사망 가운데 생명을 선택하려고 해도 자유의지가 약합니다. 사람의 의지와 능력으로써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자력의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진리로서 입증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조치로써만 가능할 뿐입니다. 그 유일한 조치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입니다. 사람의 의지와 능력으로 불가능하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인성과 더불어 신성을 가지고 그 십자가 대속의 제사를 지내시고 있습니다. 그것이 유일하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구원 자체를 요구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와 같은 메시지를 풍성한 사례 가운데 수 없이 반복적으로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이 있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구약인 히브리인의 성경 곧 모세의 오경이며 이스라엘의 역사서와 시가서 그리고 여러 선지자들의 글입니다(눅24:44-49).
바로의 병거, 선발된 병거 600대, 애굽의 모든 병거, 지휘관들(출14:6-7), 그리고 마병과 그 군대가(출14:9) 의미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의 수는 장정만 계산해도 60만명이나 됩니다(출12:37). 전체의 수는 240만명 가량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모두 잡아서 포로로 끌고 오자면 어느 정도의 군대와 무기체계가 필요할까요? 모세가 상세하게 적고 있습니다; “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새, 선발된 병거 600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출14:6-7),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 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들이 장막친 데에 미치니라”(출14:9). 분석을 해보자면 첫째, 바로가 자신의 친위대를 이끌고 앞장을 서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병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출14:6-7). 둘째, 수도권과 고센 땅에 가까이 있는 애굽 지역에서 급히 병거와 마병과 군대를 동원하고 있습니다. 셋째, 그 수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10만명은 족히 넘는다고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장정 60만명을 무력화시키고 200만명이 넘는 포로를 끌고 오자면 그 정도의 군사력과 기동력을 갖춘 무기체계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두 가지 사항을 여기서 검토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바로와 백성들이 왜 마음을 바꾼 것인지? 둘째, 바로는 어디에서 출발을 하고 있는지?
첫째로, 유월절 밤에 장자의 죽음을 맞이하여 바로와 애굽의 백성들이 모세에게 애걸을 한 적이 있습니다(출12:29-32). 부디 재앙의 덩어리이며 화근(禍根)이 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애굽 땅을 빨리 떠나달라는 간청이었습니다(출12:33-36). 그런데 왜 그들이 변심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나고 나자 이제는 모든 재앙이 그쳤습니다. 위기가 끝나고 평상심을 되찾게 됩니다. 그러자 본전생각이 나고 있습니다. 엄청난 수의 노예를 한꺼번에 떠나 보냈으니 그 손해가 무지막지합니다. 다시 되찾아오고 싶은 생각이 크게 일어나고 있습니다(출14:5). 둘째,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워낙 수가 많기에 그 행진의 속도가 한참 느립니다. 바로에게 그 느려빠지고 무기력해 보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형편이 계속 첩보로서 올라오고 있습니다(출14:3). 다시 그들이 만만해 보이는 바로입니다. 자신의 백성을 그렇게 나약하게 이끌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이제는 그 위력이 다한 것이 아닌가 하는 교만한 생각이 완악한 마음과 함께 고개를 다시 들고 있습니다(출14:4).
둘째로, 상이집트의 수도였던 나일 강 중류의 ‘테베’, 하이집트의 수도였던 고센 땅의 ‘아바리스’, 그리고 옛날 고 왕국시대의 수도였던 나일 강 하류의 ‘멤피스’ 가운데 바로가 주로 모세를 만난 황도는 어디였을까요?(출14:5-6) 그 실마리가 다음과 같이 제시가 되고 있습니다; “아침에 너는 바로에게로 가라. 보라, 그가 물 있는 곳으로 나오리니 너는 나일 강가에 서서 그를 맞으며 그 뱀 되었던 지팡이를 손에 잡고”(출7:15),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 그가 물 있는 곳으로 나오리니”(출8:20). 첫째 재앙과 넷째 재앙을 예고할 때에 모세가 나일 강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아침 일찍 바로를 만나려고 합니다. 그때는 3월경입니다. 바로가 하이집트의 수도였던 나일 강 하류 멤피스의 궁궐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나일 강 하류의 드넓은 삼각주 동쪽 끝자락에 고센 땅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세와 아론이 동족들이 살고 있는 고센 땅에서 멤피스로 바로를 만나러 가기가 그리 어렵지는 아니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가 멤피스에서 추격하기도 쉽다고 하겠습니다. 4월 중순 유월절 기간 중에 바로는 고센 땅이 가까운 멤피스에 계속 머물고 있었기에 추격에 용이했습니다. 하지만 여름이 지나고 날씨가 추워지면 바로는 따뜻한 나일 강 중류 테베로 옮겨갈 것입니다. 그렇게 별궁을 계절적으로 사용하는 사례를 훗날 페르시아에서도 엿볼 수가 있습니다; 페르시아의 황제는 동족들이 살고 있는 바사 곧 이란 지역 따뜻한 수산 궁에서 집무를 보고 있습니다(에1:2, 5). 그러나 날씨가 더워지면 약간 북쪽 바벨론 곧 이락 지역의 중심이며 고도(古都)인 바벨 궁으로 옮겨갑니다(창10:10). 그리고 한여름기간에는 티크리스 강 상류 메대의 왕도(王都) 니느웨의 별궁에서 지내게 됩니다(욘1:2, 3:2, 6).
참고로, 멤피스에 머물고 있었기에 바로가 순식간에 엄청난 군대를 동원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바로는 동방에 살고 있는 힉소스인들의 내침에 대비하고자 고센 땅을 요새화하고 병참기지화하고 있습니다(출1:11). 지금 그 고센 땅의 군대를 출동시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추격에 나서고 있습니다. 소집과 출동이 빨랐기에 애굽의 군대는 어렵지 않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덜미를 잡고 있습니다. 홍해가 바다 앞에서 마주치고 있는 것입니다(출14:9).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엄청난 위기가 찾아오고 있습니다(출14:10a). 너무나 두려워서 그들이 하나님께 다시 부르짖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출14:10b). 과연 생명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다시 나타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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