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출애굽기 강해 제53강(출13:11-1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4. 1. 03:10

출애굽기 강해 제53(13:11-16)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711()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른 대문을 보고서 그 집에 있는 장자와 초태생이 전부 죽음을 면하게 되는 기적이 발생하고(12:6-13, 21-24) 이어서 살아남은 장자와 가축의 초태생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 된다는 선포가 나타나다(13:12). 또한 그 뒤를 이어서 대속의 제사가 언급이 되다(13:13, 15)

 

마땅히 죽어야 될 운명이 애굽에 있는 사람의 장자와 가축의 초태생에게 찾아옵니다. 그 죽음은 근본적으로 애굽 사람이거나 이스라엘 사람이거나 구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그들이 크게 다르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는 그들의 조상들과 하나님이 맺은 출애굽의 언약이 있다고 합니다. 그 언약 때문에 장자의 죽음을 면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심판을 면할 수 있는 완벽한 장치는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만민과 만물의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공의의 정신으로 사람과 민족을 차별하지 아니하고 공평하게 세상을 심판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을 무시하고 범신론적으로 그리고 유물론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애굽 땅의 모든 주민들과 그들의 가축을 공평하게 심판을 하는 것이 공의의 하나님에게 어울리는 심판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400년 이상 애굽의 고센 땅에서 살아오는 동안에 이미 상당히 애굽화가 진행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신앙에 있어서 견고한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특별하게 예외규정을 마련하시고 계십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대문에 바르게 되면 그 집안에 있는 것들은 사람이거나 가축이거나 모두 죽음을 면하게 된다는 입니다”(12:13, 23). 예외규정은 물론 특혜에 속합니다. 그와 같이 죽음을 면하고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엄청난 특혜를 베풀 수 있는 진짜 근거가 과연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와 같은 예외적인 조항은 훗날 무엇을 위하여 미리 준비가 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 두 가지 질문에 대하여 정확한 해답을 얻는 것이 앞으로 복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크게 도움이 되리라고 봅니다.

물론 모세는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2:24-25). 만약 전적으로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균형을 무너뜨리고 있는 편파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그렇다면 더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소위 넓고도 깊은 차원의 설명과 근거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본문 가운데 그것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설명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너는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과 네게 있는 가축의 태에서 처음 난 것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13:12). 하나님의 것이기에 죽음을 피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논리상으로는 생명과 장수함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의 소유물이기에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는 것은 당연합니다(30:20).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서 발견한 영생하시는 하나님’(21:33),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산 자의 하나님’(12:27)이 모두 그와 같은 이치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으로 의제가 되면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두 가지 의문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첫째, 선후가 뒤바뀌어 있습니다. 둘째, 왜 대속의 절차가 추가로 요청이 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첫째로, 먼저 죽음을 면하게 조치를 해놓고 나서 나중에 살아남은 장자는 하나님의 것이 된다고 선포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치로 따지자면, 선후가 뒤바뀌어져 있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 선포를 하고 나서 살려주는 것이 올바른 순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왜 자신의 집에서는 장자의 죽음을 맞이하고 어린 양의 피가 그 대문에 칠해져 있는 집에서는 장자가 구원을 얻게 되는지 그 이유를 먼저 알아야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의 그 권리가 인정이 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주권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는 인간의 이치와 납득을 넘어서는 것임을 초연하게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출애굽기를 참고하면,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구원을 먼저 베푸시고 계신다고 선포를 하고 있습니다(33:19). 그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이시라고 주권적으로 선포하고 있는데 대하여 피조물인 인간들이 감히 왈가왈부를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33:19, 9:20, 11:33-36).

둘째로, 그렇다면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함을 받은 자는 이제부터 영원히 하나님의 것으로 간주가 될 수 있도록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여전히 죄 가운데 살고 있으며 출애굽을 한 이후에도 광야에서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15:24, 16:2-3). 따라서 그들은 다시 심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또다시 하나님의 주권으로 무조건 긍휼을 베풀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너무나 형평성을 어기고 있는 처사입니다. 그러므로 대속의 제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설명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처음 난 모든 자는 대속할지니라”(13:13), “그 때에 바로가 완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모든 것은 사람의 장자로부터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다 죽이셨으므로 태에서 처음 난 모든 수컷들은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려서 내 아들 중에 모든 처음 난 자를 다 대속하리니”(13:15). 사람이거나 가축이거나 어린 양을 대속의 제물로 사용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림으로써 죽음을 면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출애굽 유월절 양의 피가 이제는 대속의 제사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 제사의 방법이 훗날 속죄제사의 원형이 됩니다(1:10-13).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의 십자가 제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3:14-18). 그 점을 세례 요한이 온 세상에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29).

 

특히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 땅을 무사히 차지하게 되면 그때부터 이 제도를 시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13:11-13, 16)

 

광야생활에서는 하나님의 신위적인 도움이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구체적인 도움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보내어 주십니다(13:21-22).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함으로써 길 안내를 받게 됨은 물론 냉난방 문제를 해결하게 됩니다. 백성들이 광야와 사막에서 무더운 낮에 행진하기 위해서는 구름이 해를 가려주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엄청난 밤의 추위를 막아주는 불기둥이 있어야만 백성들이 얼어 죽지 않습니다. 둘째, 만나와 메추라기가 제공이 되고 있습니다(16:4, 12-13). 광야에 먹을 것이 별로 없습니다. 24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광야에서 먹을 것을 구한다고 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먹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적으로부터 방어를 해주고 있습니다. 아말렉의 습격을 퇴치하는 과정을 보면 여실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모세가 산 위에서 팔을 올리고 기도를 하면 승리가 주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7:11). 그것은 이스라엘이 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말렉과 싸운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17:16). 이상과 같은 도움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있기에 하나님 신앙을 떠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무신론에 빠지거나 황금만능주의에 물들 우려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착식 농업을 경영하게 되면 백성들의 생각과 행동이 달라질 것입니다; 첫째, 광야에서 목축을 하던 시절과는 그 생산성이 다릅니다. 많은 식량을 손수 생산하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그때부터 생존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도움이 예전처럼 필요하지가 않습니다. 둘째, 생존문제가 해결이 되고 나면 이제는 생활의 여유를 누리고자 합니다. 나아가서 쾌락을 추구할 것입니다. 셋째, 자신의 힘으로 부와 권력을 얻고자 합니다. 그리고 부와 권력을 얻는 방법이 세속화되고 타락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광야생활보다는 가나안에서의 삶이 훨씬 위험합니다.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죄가 만연합니다. 그러므로 대속의 제사가 더 절실합니다. 그 점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주의사항을 일러주고 계십니다; “너를 가나안 사람의 땅에 인도하시고 그 땅을 네게 주시거든”(13:11),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이것이 어찌됨이냐 하거든 너는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곧 종이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실새”(13:14), “이것이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가 되리라. 이는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 할지니라”(1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