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출애굽기 강해 제54강(출13:16-2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4. 1. 03:12

출애굽기 강해 제54(13:16-22)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712()

 

출애굽의 역사가 있은 다음에 광야생활로의 인도함이 나타나고 있음. 그렇다면 지금까지 살펴본 유월절과 무교절(12:1-28, 43-51, 13:1-10) 장자의 죽음과 출애굽(12:29-42), 하나님의 것 선언과 대속의 제사(13:11-16) 등은 그 두 대목 곧 출애굽의 역사 및 광야생활과 어떻게 관련이 되고 있는가?

 

유월절의 제정과 출애굽의 사건은 직결이 되고 있습니다. 유월절 규례를 지킨 자는 장자의 죽음을 면하지만 그러하지 아니한 자는 장자의 죽음을 피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바로와 애굽의 귀족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부디 애굽을 떠나달라고 항복을 했기 때문입니다(12:29-36).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의 은혜와 출애굽 사건을 일회용으로 기억하기를 결코 원하시고 있지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애초에 유월절 규례에 무교절 규례를 결합시키고 있습니다(12:43-13:10). 뿐만 아니라 출애굽의 역사가 있은 후에 240만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나오자 마자 죽음의 운명을 벗어난 그들의 장자와 초태생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고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계십니다(13:12). 그 다음에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모두 어린 양으로 대속을 하라고까지 말씀하고 계십니다(13:13-16).

좀더 직설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출애굽 사건은 일회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생 가운데 그리고 민족의 역사 가운데 그것은 항상 재발(再發)이 될 수 있는 사건입니다. 그 이유는 애굽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깊이 있게 말씀을 드리자면, 애굽과 같은 세상의 영향을 벗어나서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삶을 영위하라고 하는 것이 출애굽기를 기록하고 있는 숨은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훗날 사도 바울이 거듭 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란 한 마디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2)고 명쾌하게 규정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도 사건적인 이벤트의 성격이 강한 것과 일상생활에 의식화해야만 하는 성격이 강한 것으로 규례와 선언 등을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첫째, 유월절의 제정과 출애굽의 역사는 아무래도 이벤트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장자의 죽음이 그 날 밤에 찾아오고 어린 양의 피를 대문에 뿌리고 집안에서 그 고기를 구어 먹고 있는 자들에게는 그 재앙이 미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12:13, 23, 29-30). 둘째, 죽음을 면하게 되는 은혜를 입은 장자와 초태생이 모두 이제는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고 하는 선언은 이벤트와 직결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4:22, 13:2, 12, 15a). 그렇지만 어린 양으로 대속의 제사를 드리라고 하는 명령은 이벤트적인 성격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13:13, 15b). 훗날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의 임함을 면할 수 있는 방법론으로서의 성격이 더 두드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무교절의 규례가 유월절의 규례를 보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애굽의 누룩을 제거하는 일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작업이 아니기에 무교절의 규례는 일상생활에 있어서 의식화를 계속해나가야만 되는 차원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유월절의 제정과 출애굽사건의 발생이라는 강력한 이벤트의 의미를 잊지 아니하고 뼛속 깊이 명심만 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후 거룩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은 순조롭게 영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깊이 있게 마음 속에 새기고서 참된 성도로서 한평생 살아가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경우에는 여기 출애굽기에 있어서 보완적인 차원에서 무교절의 정신, 하나님 백성이 되었다는 선언, 대속의 제사 등이 그 기능을 발휘할 것입니다. 사족을 더하자면, 그와 같은 바램을 가지고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면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유월절의 규례를 무교절 규례와 더불어 더욱 철저하게 지키라고 거듭 당부를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2:25-27, 13:5-10).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13:17-22), 그것은 출애굽한 백성들을 어떻게 만들기 위한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도적으로 사람이 살 수 없는 척박한 환경으로 인도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한시도 삶을 영위할 수가 없는 광야입니다. 그 속으로 백성들을 인도하고 있는 것이 낮에는 구름기둥이며 밤에는 불기둥입니다. 시나이 반도와 아라비아 반도는 사막성 기후를 가지고 있는 광야입니다. 낮에는 태양이 작렬하고 있어 뜨겁기가 그지 없습니다. 구름기둥이라는 차양(canopy)과 같은 장치가 없다면 행군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밤에는 반대로 무척 춥습니다. 천막을 치더라도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기둥이 따뜻하게 보호해주고 있는 그곳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컨대, 겉으로 보자면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백성을 지켜주고 있는 하나님의 배려하심입니다. 그러나 그 속 내용을 살펴보자면 그것은 한시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떠나서는 진로의 이탈이 불가능하도록 조치를 해놓은 것입니다(13:20-22).

하나님께서는 왜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로를 일일이 의도적으로 인도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두 가지 이유가 발견이 되고 있습니다;

첫째로, 전쟁을 피하기 위함입니다(13:17). 애굽의 고센 땅은 지중해 연안이며 나일강 삼각주의 동북지역입니다. 그곳에서 출발하여 지중해연안을 따라서 동쪽으로 계속 진행을 한다면 좋은 길로 시나이 반도를 지나고 블레셋의 땅에 도달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족속은 장신이며 전투력이 뛰어난 거인들입니다(13:31-33).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과 전쟁을 벌일 수 있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를 않습니다. 희생이 클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애굽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여론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 점을 미리 아시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13:17).

둘째로, 애굽의 누룩을 제거하고 애굽의 떼를 벗겨내기 위함입니다(12:15, 19, 13:3, 20-22, 16:3-4). 이미 애굽화가 되어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의식을 전환시킬 수가 있을까요? 세 가지 방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 요셉의 유언을 기억하게 만듭니다. 애굽의 총리로서의 영광을 누리고 죽었지만 요셉은 자신의 해골을 믿음의 조상들이 잠자고 있는 약속의 땅으로 이장시켜주기를 유언했습니다(50:24-26). 그러므로 요셉의 신앙은 애굽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가나안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의 하나님 신앙을 계승하는 것이 바로 출애굽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중요하기에 요셉의 해골을 가지고 행군을 시작하고 있습니다(13:19). 둘째, 홍해의 광야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13:18). 의도적으로 그곳으로 인도하여 애굽의 추격군대에게 덜미를 잡히게 만들고 있습니다(14:10). 그리고 절망 가운데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의 기적으로 홍해가 갈라지게 합니다(14:21). 자신들의 발로 그 길을 지나서 구원을 얻게 합니다(14:29). 반면에 애굽의 군대를 수장시켜버립니다(14:26-28). 완전하게 세상나라 애굽을 벗어났음을 깨닫게 합니다(14:30).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도록 의식화하고 있습니다(14:31). 셋째, 아예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떠나서는 삶을 영위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습니다(13:20-22).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배려로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이 되고 이제는 세속을 떠나서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아니하게 의식화하고 있습니다. 그 은혜는 마치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의 내주하심과 동행의 역사와 동일한 것입니다(14:16-20). 요컨대, 그 은혜로 오늘 날에도 성도의 삶이 거룩하게 유지가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