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출애굽기 강해 제47강(출12:1-1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3. 29. 01:14

출애굽기 강해 제47(12:1-14)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75()

 

유월절의 제정과 출애굽 사건의 일곱 가지 성격(12:1-14)

 

출애굽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유월절의 제정입니다. 만약 유월절이 시작되는 그 날 그 밤의 참혹한 사건이 없었다면 출애굽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 밤에 하나님께서 직접 강림하셔서 애굽 땅을 두루 다니시면서 애굽 인들의 모든 장자와 생축의 맏이까지 모두 죽여버리신 것입니다. 반면에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그 고기를 구워먹고서 출애굽의 준비를 하고 있던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모두 무사했습니다. 그 일을 경험하게 된 바로와 신하들은 너무나 놀라서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더 이상 버티지를 못하고 하나님의 위력 앞에 완전히 굴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디 애굽을 떠나달라고 통사정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장 출애굽시키지 아니했다가는 애굽 인들의 장남뿐만 아니라 지차까지 모두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팽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 밤의 사건을 규례로 정하여 자손대대로 기억을 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12:14).

위와 같이 유월절의 제정과 출애굽의 역사는 서로 얽혀 있습니다. 그 상관관계를 간단하게 살펴보자면, 세상나라 애굽의 노예로 살다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는 일이 하나님이 정하신 유월절 규례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처음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 본문입니다. 그것도 일곱 가지로 알기 쉽게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유월절과 출애굽 사건은 애굽 땅에서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을 하심으로부터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12:1).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기 시작하는 일도 아버지 데라가 머물고 있는 땅 하란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을 하심으로부터 발생하고 있습니다(12:1). 두 문장이 모두 제12장 제1절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어쨌든 언제나 새로운 사건과 새로운 인생의 창조는 세상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이 말씀을 하심으로부터 시작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대목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다면 그리고 자신과 민족의 운명을 바꾸고 싶다면 가장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만 할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시작이며 세속적인 삶과 방법론을 버리고 떠날 수 있는 자신의 출애굽의 시작입니다.

둘째로, 출애굽 사건은 새로운 인생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그 뜻을 기리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해의 첫 달로 삼으라고 하나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12:2). 태양력으로 4월에 해당하는 그 달을 유대인들의 달력으로 첫 달이 되는 아빕월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흔히 고대사회에서 새로운 왕조가 시작이 되거나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하게 되면 연호를 정하고 새해 원년으로 삼게 됩니다. 그러므로 출애굽을 가능하게 하는 유월절의 달을 새해의 첫 달로 삼는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요한복음 제3장에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중생의 삶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3:3-5). 그렇게 물과 성령으로 ‘born again’한 자는 그때부터 하나님 자녀로서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이 되고 있으므로 영적인 관점에서 새로운 달력을 사용하고 새 출발을 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유월절 어린 양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식구의 수를 따라 알맞게 먹을 수 있도록 어린 양을 준비합니다. 만약 식구가 적어서 한 마리가 너무 많을 경우에는 이웃과 공유할 수 있도록 합니다(12:4). 그렇게 어린 양을 준비하는 날이 아빕월 10일입니다(12:3). 그 양을 잡는 날은 14일 저녁 무렵이 될 것입니다(12:6). 그때까지 어린 양을 잘 간수해야만 합니다.

넷째로, 어린 양으로 선택이 될 수 있는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양이나 염소 가운데 어린 새끼가 일단 대상이 됩니다(12:5b). 둘째, 그것도 흠이 없고 일년이 된 수컷을 말하고 있습니다(12:5a).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게 되면 양은 영생에 염소는 영벌에 들어가게 되는 운명입니다(25:33-34, 41, 46). 그런데 그와 같은 차별이 여기서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태어날 때에는 어떠한 운명으로 태어났든지 간에 상관이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말씀을 따라서 겸비하여 살아가게 되면 구원의 대상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미 애굽인 가운데에서도 그러한 자가 발생하고 있음을 출애굽기 제9장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사람을 보내어 네 가축과 네 들에 있는 것을 다 모으라.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릇 들에 있어서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들에게는 우박이 그 위에 내리리니 그것들이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바로의 신하 중에 여호와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그 종들과 가축을 집으로 피하여 들였으나”(9:19-20).

 흠이 없는 수컷의 어린 양이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는 유월절의 어린 양으로 선택이 된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일생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공생애 그리고 십자가를 지는 삶이 모두 흠이 없는 어린 양의 일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처럼 겸손과 온유함으로 희생적인 공생애를 살아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2:5-8).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고 자기를 부인하며 많은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를 감당하는 인생이 바로 흠이 없는 성도의 인생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날에도 그러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다섯째로, 유월절 어린 양을 잡아서 먹는 방법이 특이합니다; 첫째, 피를 문 위의 인방과 문 좌우기둥인 설주에 골고루 뿌리고 바릅니다(12:7). 어린 양의 피가 그렇게 뿌려져 있어야만 하나님께서 그 집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해주십니다(12:13). 누구나 어린 양의 보혈의 은혜가 없으면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은혜가 다시 한번 생각이 나는 구절입니다(1:29). 둘째, 양의 고기는 물에 삶지를 아니하고 직화(直火)구이를 하여 모두 먹습니다. 머리와 다리와 내장까지 전부 구워서 먹으라고 되어 있습니다(12:9). 함께 먹는 빵은 그 옛날 군대에서의 건빵과 비슷한 딱딱한 빵 무교병을 사용합니다(12:8a). 누룩이 들어 있지 않아서 마치 바짝 마른 비스켓과 같습니다. 모두가 딱딱한 것들이기에 목이 메이지 아니하도록 쓴 나물과 함께 먹습니다(12:8b). 셋째, 급히 먹도록 되어 있습니다. 길을 떠날 채비를 완전히 한 채로 유월절 식사를 합니다. 지팡이를 잡고서 신을 신을 채로 급히 먹는 것입니다(12:11). 그날 밤 하나님의 역사가 있으면 출애굽이 시작이 될 것입니다. 마냥 편하게 만찬을 즐기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그것이 성도의 삶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할 때에는 포도주도 있었으며 기뻤습니다(26:26-29).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하여 떠나가신 이후에는 재림을 바라보면서 나그네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결코 현실에 안주할 수가 없는 삶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5:34-35). 넷째, 먹고 남은 유월절 음식은 모두 불사르도록 되어 있습니다(12:10). 출애굽의 역사에 호응하여 나그네 인생을 떠나는 자가 뒤를 돌아보지 아니하도록 조치를 하고 있습니다.

여섯째로, 그 날 밤에 하나님께서 직접 애굽의 장자들을 전부 죽이고 계십니다(12:12). 그 이유를 이미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주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4:22-23). 하나님께서 직접 칼을 빼시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강력하신 징계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한 지경에 다다르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무시하게 되면 공의와 징계의 하나님께서 직접 그렇게 역사적인 심판을 행하실 것입니다.

일곱째, 이스라엘의 장자를 살려주십니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이거나 애굽 인이거나 상관없이 어린 양의 피가 그 집 대문 인방과 설주에 발라져 있으면 죽음의 천사가 들어가지 아니하도록 이미 조치가 되어 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 입장에서 보자면, 애굽의 장자들이나 이스라엘의 장자들이나 별로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 같이 죄인들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면서 살고 있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애굽 사람들은 믿음의 조상이 없어서 대부분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조상을 잘 둔 덕분에 대부분 살아남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당대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불공평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 불공평함을 치유할 수가 있을까요?

그 처방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13:2). 하나님의 것으로 의제가 되면 됩니다. 애굽인이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어린 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 집으로 피신을 한 자는 모두 살아남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십자가의 대속을 믿는 자는 출신성분을 따지지 않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부르짖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것(유대교적인 말씀의 해석)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3:8-11). 한 마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그 뒤를 따라가고 있는 성도의 삶이 하나님 말씀의 해석에 있어서 새로운 기준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