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출애굽기 강해 제46강(출11:4-1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3. 28. 00:49

출애굽기 강해 제46(11:4-10)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74()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직접 행차를 하시면 발생하는 일들(11:4-8)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애굽 땅에 아홉 가지의 재앙을 내렸으나 바로가 여전히 자신의 옹고집을 버리지 아니하고 있습니다(10:27-28). 바로가 그렇게 버틸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직접 강림하셔서 그 일을 손수 행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단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이 땅에 이적이 발생하도록 조치한 것에 불과합니다. 손수 행하신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직접 강림하셔서 진두지휘하신 일은 아닙니다(8:24, 9:6). 어쨌든 하나님의 진노가 모세를 통하여 단지 재앙이라는 이적으로 나타날 때에는 다소 여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예고편과 같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조금이라도 다시 숨을 쉴 만한 여유가 생기면 그렇게 다시 제 고집대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애굽의 황제인 바로의 모습을 통하여 똑똑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고편이 끝나고 열 번째 재앙이라는 본론으로 들어가게 되면 모든 상황이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강림하시기 때문입니다(11:4).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창조주의 권위로 손수 이적을 행하실 때에는 무서운 결과가 도래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가운데 그 무서운 결과가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첫째로, 창조주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되면 피조물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11:5-6, 33:20). 창조주 앞에 감히 숨을 내쉬면서 바로 설 수 있는 존재가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배려하시고 똑바로 서라고 말씀해주시지 아니하는 이상 모두가 그렇게 되고 맙니다(38:3, 5:8). 그와 같은 사실은 고대사회 페르시아의 황궁에서도 동일합니다. 황후 에스더가 황제 아하수에로를 대전으로 찾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걱정이 태산입니다. 황제의 사전허락이 없이 함부로 대전을 침범하는 자는 비록 황후라고 하더라도 암살을 기도하는 자로 오인이 되어 참살이 되기 때문입니다(4:11). 세상임금의 처소를 범하는 경우에도 그러한데 창조주가 납시는 길에 방해가 되고 있는 피조물의 경우에야 말해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모조리 제거가 되고 말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애굽의 바로와 백성들의 모든 장자와 가축의 첫 새끼에 이르기까지 모두 죽여버리실 것이라고 예언이 되고 있습니다(11:5). 사람이거나 짐승이거나 예외가 없습니다. 왕이거나 몸종이거나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모두가 평등합니다. 계급의 차이가 없습니다. 사람과 기타 생명체 사이의 차별도 없습니다(11:6-9). 모두가 동일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존재인 피조물에 불과할 뿐입니다.

둘째로, 창조주가 이 세상에 직접 오시는 것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시기 위함입니다. 옛 것은 사라지고 항상 새것이 창조가 됩니다. 그 창조는 피조물들이 과거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로운 것입니다(11:6).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하나님의 생각과 창조는 땅에서 살고 있는 피조물들의 상상의 한계를 항상 뛰어넘어서고 있기 때문입니다(55:9). 그런데 그와 같은 전무후무한 일이 발생할 것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예고를 해주고 있습니다(45:21). 그 이유는 장차 그 일이 세상에 발생을 할 때에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기 위함입니다(48:5-7). 애굽에 있는 모든 장자의 죽음이라는 감히 인간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을 할 것입니다. 그것이 출애굽이라는 새 역사를 창조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셋째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은 심판주로 오시는 것입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하여 생과 사를 구별하는 것이 심판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소멸이냐 아니면 다시 새로운 삶을 얻느냐 하는 구분을 말하고 있습니다(5:29, 25:45-46). 그러므로 심판의 대상인 사람이나 짐승은 함부로 하나님 앞에서 그 혀를 놀릴 수가 없습니다(11:7a, 6:5).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의 장자에게는 죽음을, 그 반면에 자신의 장자로 삼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삶을 주겠다고 그렇게 구별하시고 계십니다(11:7b).

넷째로, 창조주 하나님은 자신의 직접 행차를 바로에게 통지하고 있는 하나님의 전령 모세에게 큰 권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 대목이 다음과 같습니다; “왕의 이 모든 신하가 내게 내려와 내게 절하며 이르기를 너와 너를 따르는 온 백성은 나가라 한 후에야 내가 나가리라 하고 심히 노하여 바로에게서 나오니라”(11:8). 그 모습은 마치 원님이 행차를 할 때에 그 종이 신이 나서 힘차게 나팔을 불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임금인 바로가 깨달아야만 하는 일들(11:9-10)

 

11장 제4절부터 제7절까지는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계시는 열 번째 재앙의 내용을 모세가 바로에게 전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 열 번째 재앙의 내용은 참으로 참혹한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직접 애굽 땅으로 들어오셔서 애굽의 바로의 맏아들부터 시작하여 모든 애굽 백성들의 장자는 물론 가축의 첫 새끼까지 모조리 죽여버리겠다는 계획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에게 전달하면서 모세의 마음도 좋지를 못합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삼아 그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는 애굽의 황제라고 하더라도 가정에서는 아들을 사랑하는 한 사람의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이제 장남의 초상을 지내야만 하는 위기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예언을 미리 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모세가 짐작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그 예언이 실현이 되기 전에 바로가 하나님 앞에 겸비하고 회개를 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멸망이 아니라 구원이 임할 것입니다”(9:15-17). 그와 같은 하나님의 마음은 요나 선지자의 글에서 더욱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3:10). 그러나 바로는 그 마음을 돌이키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세가 바로 앞에서 화를 참지를 못하고 있습니다(11:8). 구원 대신에 죽음을 선택하고 있는 바로가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바로를 구원할 수가 있을까요?

바로와 애굽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본문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 땅에서 나의 기적을 더하리라 하셨고 모세와 아론이 이 모든 기적을 바로 앞에서 행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나라에서 보내지 아니하였더라”(11:9-10). 여호와께서는 모세가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가 순종하지 아니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 정도로 바로는 하나님을 무시하며 그 마음이 완악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말을 듣게 하려고 또 다시 애굽 땅에 재앙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참혹합니다. 장자의 죽음을 직면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고 싶지가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모두를 구원할 수 있는 놀라운 방도를 마련하시고 있습니다. 그 방안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니”(the Lord hardened Pharaoh’s heart, 11:10)라는 글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바로가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이 아니라고 하나님께서 간주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귀책사유를 창조주인 자신에게 돌리고 계십니다. 환언하면, 바로를 그렇게 완악한 사람으로 잘못 만들었으니 그 책임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지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요컨대 모든 잘못을 창조주 하나님께서 감당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실제경과를 살펴보면, 사실은 바로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배척한 것입니다. 그래서 장자 죽음의 비극까지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바로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이므로 남을 원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와 같은 비극이 계속 발생하는 것을 좌시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까지 구원하고 싶어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바로와 애굽의 백성들까지 모두 구원할 수가 있을까요? 그 유일한 대안이 창조주의 말씀을 거역한 그 완악함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이 스스로 떠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바로가 자신의 완악함을 하나님께 떠 넘기고 다음과 같이 창조주에게 불평을 터뜨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비극을 맞이하고 있는 것은 나를 잘못 만드신 창조주의 책임입니다. 나를 완악하고 고집스러운 인간으로 만들어놓으셨기에 참혹한 심판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잘못입니다. 멸망에 대한 책임을 지시기를 바랍니다”.

아집에 가득 찬 그와 같은 바로의 항변이 구약의 시대에는 혹시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11:10)라고 선언하시면서 그렇게 사람을 잘못 만든 모든 책임을 창조주께서 십자가에서 스스로 감당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창조의 역사를 함께 수행하신 독생자를(1:3) 이 땅에 성육신시켜서(1:14) 십자가의 대속의 제사를 지낸 그 다음부터는 창조주에게 사람을 잘못 만든 책임을 따질 수가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결론적으로 그와 같은 의미가 강하게 함축이 되어 있는 말씀이 바로 11:10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