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의 2호2룡(손진길 소설)

7세기의 2호2룡64(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3. 3. 22. 10:57

7세기의 2264(손진길 소설)

 

서기 6595월말 야마토의 번왕부 조정에서는 서부 야전사령관인 책귀 상장군에 대한 성토가 한창이다. 먼저 제1좌평 곧 대좌평인 계백호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동안 우리 조정에서는 책귀 상장군이 요청하는 대로 전적인 지원을 해주었어요. 왜냐하면, 그가 우리 번왕부의 서부전선을 견고하게 지켜주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

순간 대좌평의 목소리가 분통이 터져서 떨리고 있다; “이제 보니 그것이 아니군요. 전부 책귀 자신의 야욕을 채우기 위한 방법이었어요. 막상, 때가 되고 보니… “. 너무 흥분해서 그런지 상당히 이지적인 인물 계백호가 한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

그것을 보고서 그의 오른팔인 달솔 하상도가 슬며시 나서서 대신 말한다; “대좌평의 말씀이 맞아요. 책귀는 신라식민왕국의 4성을 모조리 점령하고 나자 그 검은 속셈을 마침내 드러내고 말았어요! 구체적으로… “.

잠시 말을 끊고 좌중을 한번 둘러본 다음에 달솔 하상도가 결론을 맺는다; “책귀는 길비성, 황금성, 송산성, 북구주성을 전부 자신이 장악하고서 다른 꿈을 꾸고 있어요. 우리 조정에서는 그를 빨리 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야마토로 소환해야 합니다. 그대로 두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말 것입니다!... “.

그 말에 제2좌평 상우종과 달솔 기하진도 고개를 크게 끄떡이고 있다. 오직 한사람 은솔 도미다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뒷줄에 서있다. 그때 환관이 먼저 등장하면서 소리를 친다; “번왕 전하께서 나오십니다. 좌중을 정리해주시기 바랍니다!... “. 모처럼 조정회의에 번왕 부여용이 참석하고자 등장하고 있다. 그만큼 오늘의 회의가 중요한 것이다;

주상의 자리에 좌정하자마자 번왕 부여용이 일성을 발한다; “서부 야전사령관 책귀 상장군이 송산성에 이어 북구주성까지 전부 점령하였다고 하는데 그는 어째서 지금까지 번왕인 과인에게 일체 장계를 올리지 아니하고 있는 것이요? 연전연승을 하더니 이제는 번왕인 짐을 우습게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니요? 조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좌평은 그에 대하여 짐에게 보고할 내용이 없는 것이요?... “.

금년에 35세인 번왕 부여용은 전장을 누비는 무장이 아니라 조정에서 빈틈없이 국사를 처리해오고 있는 군주이다. 그러한 부여용이기에 전쟁터에서 줄곧 살아온 책사 책귀와 같은 인물에 대하여서는 깊은 이해가 부족하다. 번왕인 부여용은 전방의 사령관이 목숨을 걸어 놓고 전투에 임하여 얻게 된 적의 성이 모조리 자신의 것인 줄 알고 있지만 전쟁에 참여한 장졸들의 생각은 그것이 아니다.

자신들이 동료들과 함께 목숨을 바쳐 점령한 성을 후방에서 편하게 지내고 있는 왕과 조정대신들이 자신들의 것으로 삼고 만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불만인 것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자신들의 고충을 잘 알고 있는 현지의 사령관이 자신들에게 후한 보상을 해주고 직접 다스리는 것이 더 마음에 든다고 볼 수가 있다;

그와 같은 측면에서 다음달 6월초에 책귀 사령관이 신라식민왕국에서 얻은 4개의 성 곧 길비성, 황금성, 송산성, 그리고 북구주성을 새로운 왕국인 귀왕국의 영토로 삼고서 왕부북구주성에 설치하고 그곳에서 그가 스스로 귀왕으로 등극하자 장졸들이 쌍수를 들고서 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된 야마토의 번왕부에서는 초상집 분위기이다.

그런데 그 소식이 전해지자 이듬해 서기 6607월말부터 8월초 사이에 백제에서 왜의 땅으로 들어온 유민들은 번왕부가 있는 야마토가 아니라 가급적이면 새로운 왕국이 건설이 된 귀왕부로 들어오고 있다. 그 가운데 좌백싸울, 그리고 곡나진수여자신 대감이 들어 있다;

그 즈음 번왕 부여용은 다른 두가지 고민을 더 가지고 있다; 하나는, 전임 번왕인 친형 부여풍이 번왕 부여용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6607월에 부왕 부여의자가 나당연합군에게 포로가 되고 본국 백제가 멸망을 당하고 말았는데 어째서 구원군을 보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보고만 있느냐는 것이다. 또 하나는, 막상 구원군을 백제 땅으로 보내려고 하지만 군사도 부족하고 더구나 함선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아니한 것이다.

번왕 부여용이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백제를 정복하기 위하여 신라군이 5만명, 당나라군이 13만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왜에서 적어도 10만명의 군대가 파견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하다. 지금 번왕부가 장악하고 있는 10개의 성에서 수비군을 제외하고 전부 동원한다고 하더라도 그 수는 3만명을 넘지 못한다.

더구나 함선을 1천 척 정도는 건조하여야 3만명의 군사를 실어나를 수가 있다. 그런데 그 정도의 배를 제조하자면 적어도 3년의 기간이 필요하다. 그 점을 생각하면서 번왕 부여용은 가슴이 답답하다. 그래서 그가 속으로 탄식한다; “이와 같이 중차대한 시점에 괘씸하게도 동년배인 책귀 사령관이 과인을 배신하고 말다니! 그가 충직하게 짐을 돕고 있었더라면 달리 백제를 구할 방도가 있었을 터인데 “.

그러나 어쩌겠는가? 책귀 사령관은 벌써 귀왕국을 건설하고 스스로 귀왕이 되어 하나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말았다. 게다가 백제의 유민들이 왜의 땅에 도착해서는 태반이 귀왕국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들은 멸망한 백제의 번왕부에 애착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1년의 세월이 지나자 전임 번왕 부여풍이 직접 번왕부로 부여용을 찾아온다;

 그가 동생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백제의 수도권에 있는 주류성과 임존성에서는 백제부흥운동이 활발하다. 그 가운데 가장 세력이 큰 주류성의 지도자 귀실복신과 승려 도침이 나에게 특사를 보내어왔다. 그 내용은 왜의 지원병을 이끌고 주류성으로 와서 신왕으로 즉위하여 달라는 것이다. 따라서… “;

중요한 내용이기에 부여용이 귀를 기울인다. 잠시 숨을 쉬고서 부여풍이 이어서 말한다; “아우는 번왕부의 군사 1만명을 나에게 지원해 달라. 내가 번왕부를 대신하여 백제로 가서 나당연합군과 싸워서 우리의 조국 백제를 재건할 것이다. 단지 1만명의 병사이면 된다!... “.

그 문제를 번왕 부여용은 야마토의 조정대신들과 상의를 한다. 그런데 그 대답이 부정적이다. 그 이유는 왕자 부여풍이 전쟁을 쳐서 영토를 넓혀본 경험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조정의 공론이 다음과 같다; “무장 출신이 아닌 그가 번왕부의 대군을 끌고가서 희생만 시킬 것이 아닌가? 게다가 야마토의 수비군 2만 가운데 절반을 달라고 하니 그것은 번왕부를 위기에 몰아넣겠다고 하는 것이다!... “.

곤란하게 된 번왕 부여용이 전방사령관 가눌치에게 전서구를 통하여 급히 상의를 한다. 그랬더니 그 대답이 다음과 같다; “번왕 전하, 부여풍 왕자님의 요구가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직접 백제로 가서 부흥운동의 구심점이 되겠다고 하는데 우리 번왕부가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소신의 생각으로는 이곳의 군사 5천명을 내놓을 것이니 그것으로 왕자 부여풍의 마음을 달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

번왕 부여용 가눌치 사령관의 마음이 참으로 고맙다. 따라서 번왕부에서는 가눌치가 보내는 5천명의 군사를 나중에 받도록 하고 우선 야마토의 수비군 가운데 5천명을 성격이 급한 부여풍에게 보낸다. 부여풍은 그 5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왜의 땅에서 백제 주류성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름대로 백제의 부흥운동에 기여한 풍장왕이지만 그는 전투에 능숙한 대장군 귀실복신을 은근히 시기하고 있다. 부여풍은 왜의 야마토에서 초대 번왕으로 있을 때에도 신하들을 의심하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하고자 부단히 노력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러한 버릇이 주류성에서 풍장왕으로 지내면서도 다시 돌출하고 있다.

귀실복신의 인기가 올라가자 풍장왕은 초조해 하면서 왜의 번왕인 동생 부여용에게 계속 압력을 가하고 있다. 3만명의 지원군을 속히 보내어 달라는 것이다. 번왕 부여용은 동부 국경 신탕성에서 전방사령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가눌치 상장군을 야마토의 번왕부로 불러들인다. 따라서 661년말부터 전방사령관 자리를 무영 대장군이 맡게 된다.

가눌치 사령관은 야마토에서 번왕 부여용의 특명을 받아 그때부터 1천 척의 함선을 건조하는 일을 총지휘한다. 그리고 번왕부의 10개 성에서 꼭 필요한 수비병을 제외하고 27천명의 군사를 끌어 모아 그들을 훈련시킨다. 육군이면서 해군의 역할을 함께 수행할 수 있는 군사로 조련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준비가 6637월에 끝나자 가눌치 사령관은 번왕의 명령으로 원정사령관이 되어 백제의 백강 하구를 향하여 1천 척의 함선을 출발시킨다. 그 전함에는 육군이면서 수병인 27천명의 군사가 타고 있다. 그러나 너무나 급하게 만든 원정군이다. 그들은 백제의 서해안에 대한 지형과 수심 그리고 주변의 요새지 정탐에도 철저를 기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소위 기벌포 전투에서 대패를 한 환경적인 원인이다. 신라의 국왕 김법민과 군부의 최고지도자 김유신1년전부터 왜의 번왕부에서 지원군이 함선으로 백강 입구로 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상주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의 일부를 백강 하구의 양편 언덕에 보내어 주둔시키고 그곳에 엄청난 수의 투석기와 돌 그리고 기름을 준비하고 있다.

기다리고 있던 그들은 6638월에 왜의 함선이 들어오자 작살을 내고 있다. 양편 언덕의 투석기에서 큰 돌이 계속 날아온다. 가뜩이나 급히 건조하느라고 얇은 송판을 사용하고 있는데 거기에 돌뭉치가 떨어지자 바로 깨어지면서 배가 바닷물에 침수가 되고 만다.

 그 다음에는 기름뭉치가 날아오고 그 뒤를 불화살이 날아온다. 배안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군사들이 타 죽지 아니하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다. 결국 한나절만에 400척의 함선이 부서지고 그곳에 타고 있던 군사들이 수장을 당하고 만다;

그 참상을 지켜보던 가눌치 사령관이 신음소리를 내면서 후퇴의 북소리를 울리고 만다.

눈물을 삼키며 가눌치가 속으로 결심하고 있다; “백제 땅의 수복은 우리의 실력으로는 불가능한 꿈이다. 그 대신에 왜의 땅에서 또다른 백제를 건설하는 것이 옳다. 그 일을 위하여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

왜의 지원군이 기벌포에서 상륙도 못해보고 대패한 채 되돌아가고 만다. 그 소식을 듣자 임존성의 흑치상지와 주류성의 풍장왕은 절망에 빠진다. 그때서야 풍장왕은 땅을 치고서 후회하고 있다. 왜냐하면, 한달 전에 그가 왜의 번왕부에서 지원군이 온다는 소식을 미리 듣고서 용기 백배하여 그만 전쟁에 능한 신하 복신을 암살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풍장왕은 신하들이 복신 대장군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는 것을 지극히 싫어한 인물이다. 더구나 복신의 정체가 사실은 조부인 무왕의 조카이며 부왕인 부여의자의 사촌동생이라고 하는 사실이 풍장왕의 마음을 괴롭힌 것이다. 전쟁영웅인 복신이 풍장왕을 제치고 신왕으로 즉위할 것만 같다. 그것만은 눈을 뜨고 보지 못하는 자가 바로 부여풍풍장왕이다.

주류성을 튼튼하게 지키고 있던 복신 장군이 사라지고 나자 많은 의병들이 성을 버리고 떠나고 있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왜의 지원군을 물리친 나당연합군이 대거 주류성 공격에 몰려들고 있다. 전투경험이 전무한 풍장왕은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다. 따라서 그는 한밤중에 살그머니 북문을 빠져나가 고구려로 망명하고 마는 것이다;

그 뒤를 복신 대장군의 조카인 좌룡 유기룡이 추격하고 있다. 그러나 평양으로 이동을 한 부여풍의 흔적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따라서 유기룡은 복수를 훗날로 미루고 산동성 등주의 오덕관으로 되돌아가고 만 것이다.

그런데 기벌포 해전에서 참패를 하고 왜의 번왕부로 되돌아간 가눌치 사령관은 탄핵의 대상이 되고 만다. 27천명의 대군을 이끌고 가서는 겨우 16천명의 군사만 살려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 결과 가눌치 사령관은 옷을 벗고 야인으로 돌아가고 만다.

그때 곧 66310월부터 동부전선의 전방사령관은 무영이 상장군으로 진급하여 온전히 맡게 된다. 그는 남아 있는 고구려식민왕국의 동북성(東北城), 신궁산성(神宮山城), 청백성(靑白城) 3개성을 정복해야만 하는 대임을 맡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지휘하고 있는 군사의 수가 1만명에 불과하므로 현실적으로 적성에 대한 공격이나 점령은 마치 한여름 밤의 꿈에 불과한 실정이다. 그렇다고 하면 장차 무영책귀의 앞날은 어떻게 전개가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