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의 2호2룡(손진길 소설)

7세기의 2호2룡62(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3. 3. 20. 15:44

7세기의 2262(손진길 소설)

 

8. 왜로 간 좌백과 책귀 및 무영의 활약

 

소정방(蘇定方, 592- 667)은 본래 이름이 소열(蘇烈)이다. 정방은 그의 자인데 일반적으로 소정방으로 불리고 있다;

 그는 고향이 기주()이다. 기주의 위치는 하북의 남부이고 산동의 서부이다;

 그곳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유는 그 옛날 삼국시대의 영웅 조조(曹操)의 근거지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주 출신인 소정방의 출세는 굉장히 늦은 편이다. 서기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였을 때에 그는 중랑장에 불과했다. 그러나 서(西)돌궐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워 장군이 되고 60대 후반의 나이에 대장군으로 출세하여 13만 대군을 이끌고 바야흐로 백제와의 전쟁에 사령관으로 참전하게 된 것이다.

소정방은 자신보다 무려 22살이나 어리지만 당 태종의 시대에 그 출세가 너무나 빨랐던 설인귀(薛仁貴, 614- 683)와 비교하여 종종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다. 설인귀30대에 출세하고 있는데 소정방 자신은 60대가 되어서야 출세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넋두리가 다음과 같다; “그 이름이 본래 설례(薛禮)설인귀가 나보다 나은 점이 무엇인가? 그는 조상이 선비족이므로 고향이 산서성 남부 하진이다;

 그곳은 당의 건국 황제인 고조 이연의 근거지 태원에서 가까운 곳이 아닌가?;

조상이 같은 선비족이므로 그는 645년 안시성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일약 30세초반의 나이에 유격장군으로 발탁이 된 것이다. 그런데… “.

소정방은 신세를 한탄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일흔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출세에 대한 야망을 불태우고 있다; “ 나는 한족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환갑이 되어서야 겨우 장군이 되고 이제서야 빛을 보고 있다. 설인귀의 출세와 비교하면 나는 참으로 늦둥이구나. 그렇지만 군부의 최고지도자가 되는 것은 내가 더 빠를 것이다. 한번 두고 보아라!... “.

그와 같은 야심을 지니고 있는 소정방이기에 백제에 대한 정복전쟁의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3가지 행태를 보이고 있다;

(1)  첫째, 백제의 국왕과 태자 그리고 왕자들은 물론 쓸 만한 기술인력 12천명을 모조리 포로로 삼아 재빨리 당의 수도 장안으로 압송하고 있다;

 자신의 전공을 황제와 조정대신들에게 한껏 자랑하고 싶은 것이다.

(2)  둘째, 백제의 왕도 사비성을 접수하자 그곳에서 그는 마치 정복자인 왕처럼 군림하고 있다. 예를 들면, 웅진성주로 예식진 대신에 왕문도를 임명하고 동시에 그를 웅진도독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웅진도독 왕문도의 상급자는 어디까지나 당군의 사령관인 소정방 자신인 것이다;

(3)  셋째, 6638월에 기벌포에서 왜의 지원군을 물리치고 나자 신라의 국왕을 황제의 명령을 빙자하여 계림대도독으로 발령한다. 그 속셈은 웅진도독 왕문도가 자신의 부하이므로 신라의 국왕 김법민도 당군의 사령관인 소정방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소정방의 대국의식과 오만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기는 신라의 국왕 김법민이나 사령관 김유신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아직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정복하여 삼한일통을 이루어야 하기에 그들이 최대한의 인내로 참고 있다.

그런데 소정방이 당조정에 건의하여 망국의 태자인 부여융을 사비성으로 불러 들인다. 그리고 소정방부여융6657월에 웅진도독으로 삼아 웅진성으로 보내면서 계림대도독인 신라의 국왕 김법민과의 회담의 자리를 마련한다.

그것은 부여융김법민을 대등한 관계로 보고 소정방 자신이 한 단계 위인 상급자임을 과시하고자 하는 교만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작태이다. 그 점을 생각하면서 김법민김유신은 속으로 치를 떨고 있다. 그렇지만 삼한일통의 그날까지는 이를 악물고 참아야만 한다.

따라서 한번은 고사를 하고 두번째의 초청에는 평화회담에 참석한다. 그 회담과 맹세의 장소가 바로 웅진성 인근에 있는 취리산이다. 따라서 웅진도독인 부여융과 신라대도독인 김법민이 모두 대당황제의 신하로서 한마음 한 뜻으로 서로 협력한다는 이른바 취리산 회맹이 역사적으로 그곳에서 성립이 된다;

그것은 소정방과 망국의 태자인 부여융의 입장에서는 기고만장한 일이다. 그러나 신라국왕인 김법민과 신라군 최고지도자인 김유신의 입장에서는 수치와 수모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지 668년에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정복하자 신라의 지도자들이 그 보복을 소정방 일행에게 행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이듬해 669년에 김유신소정방 일행을 신라군의 전방사령부가 있는 상주로 초청하여 큰 연회를 베풀고 그 자리에서 그들을 독살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은밀하게 소정방 일행의 시신을 상주 당교 부근에 매장하고 말았다고 전해진다;

 그 다음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신라군은 이듬해 670년에 드디어 당군과의 전쟁을 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역사가 훗날 한반도에서 전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의 멸망을 목도하고서 가솔들을 이끌고 왜의 땅으로 떠나간 사람들은 그 행보가 어떠한 것일까?...

특히 좌호(左虎)로 불리고 있는 좌백(佐伯)이 왜의 번왕부에서 크게 출세한 우룡(右龍) 책귀(策貴)우호(右虎) 무영(無影)을 만나서 어떠한 활약상을 보여주게 되는 것일까?... 더구나 곡나진수(谷那晉首), 여자신(餘自信), 귀실집사(鬼室) 등이 가족과 함께 왜의 땅으로 피신하고 있다. 그들은 어떠한 일에 휘말리게 되는 것일까?...

황금성에서 서부 제2야전사령부의 군사 18천명을 지휘하고 있는 상장군이 책귀이다. 그의 사랑하는 아내 사오리(思吾理)가 서기 6575월에 아름다운 딸을 낳아서 책귀에게 안겨준다. 그는 딸의 이름을 책유리(策琉璃)라고 짓는다;

그리고 동쪽에 있는 큰 성 신주성(信州城)의 성주로 근무하고 있는 부친 책윤(策允) 대감과 모친 가화란(佳花蘭)에게 득녀소식과 함께 그 이름자를 알려준다.

책윤 대감 부부는 언제 한번 손녀를 만나러 오고 싶다고 그들의 소망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동부의 신주성에서 서부의 황금성까지 18백리가 넘는 그 먼 길을 쉽게 오갈 수가 없다. 언제나 그들은 손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일까?...

한편 그해 657년 가을부터 다음해 658년말까지 1년반동안 책귀 상장군은 한가지 일을 처리하느라고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 이유는 전군 18천명을 남섬까지 운반할 수 있는 함선을 짓는 일이 시급하기 때문이다. 전함에 30명씩 승선시킨다고 하더라도 600척의 함선이 필요하다;

황금성에서 그 많은 배를 건조할 수가 없다. 따라서 책귀는 길비성의 부사령관 구자신 대장군에게 협조를 요청하고 있다; “이곳 황금성에서 300척의 함선을 건조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그곳 길비성에서 나머지 300척의 함선을 건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시한은 내년말입니다. 준비가 되면 남섬의 송산성(松山城)을 정벌할 계획입니다!”;

구자신 대장군은 사령관인 책귀 상장군이 명령이 아니라 업무상 협조를 요청하고 있기에 그것이 마음에 든다. 전쟁의 신이며 전략의 귀재로 알려지고 있는 신화적인 인물이 바로 책귀 사령관이다. 그는 나이는 어리지만 구자신 대장군 자신에게 있어서는 무예 스승이면서 직속상관이다. 그를 상관으로 모시면서 전선을 오래 누볐는데 지금까지 연전연승이다.

그러므로 왜의 번왕부 군대에 있어서는 하나의 전설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책귀 사령관을 모시고 있으면 전쟁에서 승리하고 전투에서 쉽게 죽지 않는다. 그리고 빠르게 진급할 수가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상승무공을 아낌없이 가르쳐주는 무예 스승이시다. 그러므로 군부에서 출세하고 싶은 장수는 무조건 책귀 사령관을 모시도록 하라!... “.

그와 같은 신화를 창조하고 있는 책귀 사령관이 지금 600척의 함선을 먼저 건조한 후에 659년이 되면 남섬으로 쳐들어가려고 한다. 따라서 길비성에서 구자신 부사령관이 내심 계산을 해보고 있다; “659년이 끝나기 전에 책귀 사령관께서는 송산성을 정벌하고 남섬을 전부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남아 있는 북구주성은 언제 점령하실 것인가?... “.

구자신 대장군은 자신의 길비성에서 건조한 함선을 모두 황금성으로 가져다 주면 그때서야 18천명의 군대가 책귀 사령관의 지휘를 받아 한꺼번에 남섬을 공격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착각이다.

왜냐하면, 책귀 상장군은 휘하의 장군 3명에게 9천명의 군사를 주면서 다음과 같이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밀하게 길비성으로 가서 건조된 함선을 이용하여 남섬의 북동부로 진입하라. 그곳에서 상륙작전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내가 요란하게 북서부로 진입하여 상륙작전을 실시할 것이다!... “.

본섬에서 남섬까지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가 아니하다. 그러므로 새벽 일찍 출발하면 정오가 되기 전에 도달하게 된다. 서기 6591월말 차가운 바다를 헤치고 300척의 함선이 9천명의 군사를 태우고 남섬의 북서부 해안으로 접근하고 있다;

 송산성에서 보낸 척후가 그 많은 전함을 발견하고서 송산성주 용머리 대장군에게 즉시 보고한다.

용머리 대장군이 1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급히 해안으로 달린다. 그런데 시간적으로 조금 늦고 말았다. 넓은 해안에 벌써 600척의 함선이 정박한 다음이다. 황금성에서 남하한 책귀의 군대가 해안가의 고지대를 선점하고 있다. 고지대에서 그들은 큰 방패로 자신들을 보호하면서 일제히 강궁으로 화살을 날리고 있다.

그런데 높은 위치에서 낮은 위치로 발사하는 화살은 가속도가 붙는다;

그래서 그런지 그 위력이 대단하다. 화살에 맞은 군마들이 히히힝 소리를 구슬피 내면서 지면으로 쓰러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 화살에 맞은 용머리 대장군의 군사들이 수도 없이 해변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만다.

그것을 보고서 용머리 대장군이 급히 큰 소리로 외친다; “모두들 뒤로 물러서라. 적의 화살 사정권 바깥으로 후퇴하라. 급히 진형을 갖추고 방패부대가 앞장을 서라. 적이 아래로 쳐 내려오면 그때는 긴 창으로 한꺼번에 적들을 막아라!... “.

용머리 대장군의 전술은 전혀 틀린 것이 아니다. 현명한 선택이다. 그 덕분에 절반이 죽고 살아남은 5천명의 송산성 군사들이 대오를 갖추고 큰 방패막을 친다. 그리고 긴 창부대가 책귀의 군사들이 쳐 내려오면 효과적으로 상대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 작전이 잘 통하지 않는다. 언제 나타났는지 9천명의 군사들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쳐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북동쪽 해안으로 은밀하게 먼저 들어온 책귀의 군사들이다. 3명의 장군들이 인솔하여 떠난 9천명의 군사들이 슬며시 상륙을 하자 이제는 본대와 합류하기 위하여 서쪽으로 이동하여 온 것이다.

용머리 대장군의 군사들은 책귀9천명의 군사와 동쪽에서 진격한 9천명의 군사들 사이에 끼어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전의를 상실하고 있다. 그것을 보고서 용머리 장군이 자신의 장도를 크게 휘둘러 우물쭈물하고 있는 군병을 베면서 큰소리로 명령한다; “적들을 두려워하여 공격하지 아니하는 병사는 이와 같이 나의 칼에 죽고 말 것이다. 무조건 공격하라!... “.

그 광경을 본 책귀가 고지대에서 자신의 강궁으로 화살을 날린다. 엄청난 내력이 활에 들어갔는지 무서운 소리를 내고 있다. 거기에서 발사된 화살은 사정거리가 엄청나고 그 속력이 실로 무시무시하다. 따라서 용머리 대장군은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모르는 강한 화살에 그만 목숨을 잃고 만다;

그것을 보고서 부관들이 먼저 바닥에 자신들의 무기를 던지고 있다. 5천명의 군사들이 한꺼번에 항복하고 만 것이다. 그들을 사로잡고서 책귀 사령관이 18천명의 대군을 지휘하여 송산성에 이르고 있다.

그곳에서는 수비대장인 강귀수 장군이 1만명의 수비군으로 성을 지키고 있다. 과연 책귀는 어떠한 방법으로 송산성을 취하게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