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출애굽기 강해 제30강(출6:2-9)(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3. 21. 00:56

출애굽기 강해 제30(6:2-9)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618()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신 전능하신 하나님과 모세에게 나타나신 야훼 하나님과의 차이(6:2-8)

 

출애굽기 제6장 제2절에서 제8절 사이에서 모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신 전능하신 하나님과 자신에게 나타나신 야훼 하나님과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전능하신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들에게 가나안 땅 일대를 그들의 자손들에게 주기로 언약을 하였으며 이제 세월이 흘렀지만 그 언약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6:3-5). 특히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애굽 사람의 종의 신세가 되어 구원을 요청하고 있으므로 그 언약을 새삼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여러 차례에 걸쳐서 계속 야훼 하나님이라고 강조를 하고 계십니다. 2절부터 제8절 사이에 무려 5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나는 야훼이니라”(6:2), “나의 이름을 야훼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6:3), “나는 야훼라”(6:6), “너희의 하나님 야훼인줄 너희가 알지라”(6:7), “나는 야훼라 하셨다 하라”(6:8). 도대체 왜 그렇게 숨가쁘게 자신을 야훼 하나님이라고 그 이름을 계속 천명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둘째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스스로 말씀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7:1). 하나님 앞에서 행한 그 모든 일에 대하여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전부 기억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냥 기억만 하고 계시는데 그치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한 일 같으면 반드시 역사 가운데 실현이 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능력이 그 일의 성취를 위하여 사용이 됩니다. 그런데 그 능력이 어느 정도의 수준일까요?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야훼 하나님’, 나아가서 스스로 있는 자’(3:14)의 능력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있는 자또는 야훼 하나님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셋째로, ‘스스로 있는 자는 타자(他者)에 의하여 존재하고 있는 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창조주라는 말입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 우주를 능력으로 감싸고 그 수면 바깥에서 운행을 하고 계십니다(1:1-2). 그렇게 시공간을 초월하여 피조물의 세계를 감찰하시고 역사를 섭리하시는 분이 바로 야훼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그 야훼 하나님께서 창조주의 능력으로 역사에 개입을 하시고자 하십니다. 개입의 이유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 현장을 확인하셨으며 그 소리를 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언약과 비교해보았기 때문입니다(2:23-25, 6:4-5). 그 결과 이제부터 애굽의 역사를 변화시킬 것입니다(6:6-8). 어떻게 섭리하실 것인가요?

넷째로, 섭리의 단계가 밝혀지고 있습니다; 첫째, 강제노역을 감당하는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을 시킵니다(6:6a). 둘째, 애굽에 심판을 행하고 이스라엘을 속량합니다(6:6b). 셋째,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습니다(6:7). 넷째,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고 기업을 줍니다(6:8). 여기서 두 번째와 네 번째 역사에 대해서는 좀더 깊이 있게 묵상을 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속량의 뜻과 약속의 땅이라는 의미가 신약의 복음으로 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창조주 하나님께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십니다. 그것은 속량이 된 자신의 백성을 새 예루살렘으로 맞아들이기 위한 것입니다(21:23-27). 여기서 속량은 사람들의 죄를 십자가에서 대속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아들이 제물이 되어서 단숨에 완전한 제사를 드렸기에 비로서 죄에서 해방이 된 것입니다(7:27). 그리고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생기고 있습니다. 그 모든 절차와 역사섭리를 하나님은 모세에게 야훼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바로를 더 두려워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다(6:9)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고 있습니다(6:9a). 그러나 백성들이 그 말을 받아들이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문에 두 가지 이유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 백성들의 마음이 상해있기 때문입니다(6:9b). 둘째, 강제노역이 혹독하기 때문입니다(6:9c).

첫째로, ‘마음이 상해 있다고 하는 것은 일찍이 모세의 말대로 해보았더니 개선(改善)이 아니라 개악(改惡)이 되고 말았다고 하는 데 기인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짐을 가볍게 해주고 해방까지 시켜주겠다고 모세가 나섰는데 그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난 것입니다. 더 중노동이 강요되고 있습니다(6:18). 이제는 짚도 주지 아니하고 온 천지를 돌아다니면서 짚을 대신할 재료를 구해와서 똑 같은 수의 벽돌을 제조해내어야만 합니다. 히브리인 기록원들은 실적이 저조하다고 매일같이 애굽인 감독에게 매 타작을 당하고 있습니다(6:14).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더니 당장 불이익이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마음이 모세에게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께 대해서 상처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6:20-21).

둘째로, 어떤 새로운 꿈을 꾸기에는 당장의 강제노동이 너무 가혹합니다. 도저히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습니다. ‘사회변동론이라고 하는 학문을 참고해보면, 혁명이 일어나는 사회는 마음의 여유가 조금 있는 사회라고 합니다. 너무 먹고 살기에 힘이 들거나 완벽한 탄압 아래에서 허덕이고 있는 경우에는 감히 혁명을 꿈꿀 수도 없다고 합니다. 지금 애굽에서 노역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형편이 그러합니다. 그들은 더 나은 세상을 꿈꿀 수도 없을 정도로 심신(心身)이 너무나 지쳐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노예해방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마음에 영 와서 닿지를 못하고 있습니다(6:9).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의 압제에서 구해내기 위해서 어떠한 처방을 사용해야만 할까요? 이미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설명한 그대로 창조주의 능력을 애굽에 선보이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강력한 진노를 보이고 강도 높은 재앙을 내리는 것입니다. 과연 애굽 제국의 절대권력자이며 현인신으로까지 추앙을 받고 있는 바로가 얼마만큼 견딜 수가 있을까요? 그 추이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