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출애굽기 강해 제31강(출6:10-1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3. 22. 02:07

출애굽기 강해 제31(6:10-13)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619()

 

모세와 아론이 바로를 처음 만났을 때와 두 번째 만날 때와의 차이(5:1-2, 6:10-11)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애굽의 황제인 바로를 처음 만났을 때의 기록이 다음과 같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바로가 이르되, 야훼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야훼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5:1-2). 모세와 아론이 바로 앞에 담대하게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며칠 동안의 여행허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달라고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내용 그대로입니다;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야훼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야훼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 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하라”(3:18). 여행의 목적도 동일합니다. 240만명으로 추산이 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12:37, 장정만 60만명이므로 전체 인구는 그 4배로 추산이 되는 것임) 모두 광야로 가서 조상님들의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정도의 말미조차 바로는 주고자 아니하고 있습니다(5:2). 그 이유는 노예화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조상신 정도는 무시해도 된다고 하는 판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애굽에는 수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각 지방별로 그리고 각 종족 별로 그들 고유의 신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권세가 있는 주신(主神)만 하더라도 둘입니다; 태양의 신인 와 바람의 신인 아몬입니다. 그리고 나일 강물의 주인으로서 주신들의 권세를 위임 받고 있는 바로 역시 현인신으로서 경배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29:3). 그러한 실정을 감안해본다면, 이스라엘 노예들의 신인 여호와 하나님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위치에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왕왕 세상에서는 일반적인 상식을 훨씬 뛰어넘는 사건들이 발생을 합니다. 앞으로 야훼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 보여주실 창조주의 위력이 그러할 것입니다. 모든 애굽의 신들은 야훼 하나님의 힘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와 같은 계획을 이미 모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십니다(3:18-22). 그러나 모세는 그 말씀을 신뢰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의 힘은 강해 보이고 하나님의 힘은 아직 미지수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법보다는 당장의 주먹이 더 겁이 나듯이 모세도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고 있는 바로의 분노와 살아있는 황제의 권력에 더욱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5:19-23, 6:1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다시 바로를 만나도록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바로에게 전할 말씀의 내용을 처음과 다르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사흘 길 정도의 광야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정도의 여행허가가 아닙니다. 무조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라는 엄명입니다(6:11).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칼을 뽑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 앞에 모세가 당장 경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무례한 말씀을 바로에게 전달했다가는 자신의 목이 온전할지 걱정이 앞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꽁무니를 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6:12). 그러나 그러한 변명은 이제 하나님께 통하지 않습니다(4:10-12).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모세는 바로를 여러 번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강력한 징계 앞에 바로가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되고 이스라엘 백성을 전부 그 땅에서 내보내게 됩니다(6:13, 12:29-42).

 

하나님 사자의 사명과 하나님의 역사의 구분(6:1, 12-13)

 

심부름을 하는 자는 주인의 명령대로만 움직이면 됩니다. 자신의 판단은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는데 사용이 될 따름입니다. 만약 주인의 명령보다 자신의 의견을 앞세우게 되면 제대로 심부름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와 같은 종은 주인을 무시하고 자신이 주인 노릇을 하고자 하는 자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주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생전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13:16-17). 그렇다면, 심부름꾼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떠한 역사로 모두에게 복을 주실까요? 다음 세 가지로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말씀이 능력으로 나타나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그저 하나님의 명령만을 그대로 전하면 됩니다. 구태여 모세가 달변가일 필요도 없습니다(6:12). 자신의 말솜씨로 상대방을 설득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상대방에게 전해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아무 것도 요구하지를 않습니다. 그 정도의 사명만 감당하더라도 하나님의 사자로 인정해주십니다. 그리고 그가 전한 하나님 말씀의 효력에 대해서 심부름꾼이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상대방에게 전달이 되는 그 순간부터 그 말씀의 효력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소관으로 넘어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심부름꾼은 자신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창조주의 능력으로 역사 가운데 성취가 되는 현장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을 받으며 자신이 전한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살아서 볼 수 있다는 그것이 인생 가운데 누릴 수 있는 성도의 엄청난 복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심부름꾼의 신변에 대해서는 주인이 책임을 지십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기분이 상한 바로로부터 맞아 죽지나 않을까 겁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심부름을 제대로 하게 되면 그 다음 심부름꾼의 신변의 안전을 주인께서 책임을 지시기 때문입니다. 그 좋은 예가 요나의 경우일 것입니다(3:4-10). 그는 엄청난 저주의 말씀을 전했지만 니느웨의 모든 백성과 왕이 모두 회개를 했기 때문에 그가 맞아 죽는 일이 발생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사자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상대방과 함께 누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주되심을 인정하고 그 말씀을 따라서 악에서 떠나게 되면 심판이 아니라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신다는 요지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부터 그 말씀을 전해들은 상대방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서 잘못을 회개하게 되면 그때에는 저주나 멸망이 아니라 약속대로 구원의 복이 임합니다(3:10). 그러한 역사의 현장을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자가 정확하게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 선민인 요나는 아직 미흡한 심부름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4:1-5, 11). 반면에 모세는 구원의 기쁨을 여러 차례 경험하게 됩니다(32:10-14, 14:11-20).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가 되시고 있는 그 변화산상에 있어서 선지자 요나가 아니라 모세가 자리를 함께하고 있습니다(9:4, 1:14).

모세는 백성들이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하나님 섬기는 법을 제대로 익혀서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자입니다(19:6). 결론적으로, 그러한 자가 그리스도 옆에 설 수 있는 복음의 일꾼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