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출애굽기 강해 제28강(출5:15-1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3. 20. 00:37

출애굽기 강해 제28(5:15-18)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616()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이 견디지를 못하고 바로를 찾아가서 탄원을 하다(5:15-16)

 

고대 왕정국가(王政國家)에 있어서 왕의 명령과 지휘계통은 어떻게 제도화가 되어 있을까요? 그리고 언로(言路, 위로 뜻을 전달하는 것)는 어떻게 확립이 되어 있는 것일까요? 한국의 역사 가운데 15세기경의 조선시대를 참조해보면, 왕은 비서실을 통해서 자신의 명령을 조서로써 조정에 공포를 합니다. 그러면 왕명의 시행과 감독은 6부의 관청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또한 시책에 대한 백성들의 구제는 신문고 제도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양반계급이나 벼슬아치들인 사간(司諫)들의 상소제도가 확립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출애굽 당시 BC 15세기경의 애굽 제국에 있어서는 그 제도가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일까요? 본문을 비롯한 출애굽기 제5장에서 다음과 같이 그 일부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황제인 바로의 명령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강제노역을 감독하고 있는 애굽인 관리들과 그 보조원들인 히브리인 기록원들에게 도달이 되고 있습니다(5:6-9). 그 명령이 바로의 중앙관청과 고위직 신하들을 통하여 현지의 감독들과 기록원들에게 전달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명령이 글로써 전달이 되었는지 아니면 말로써 전달이 되었는지는 여기서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둘째로, 상의(上意, 위의 뜻)가 하달(下達, 아래로 전달)되어오자 감독들이 입회한 자리에게 기록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명의 내용을 공포하고 있습니다(5:10-11). 그러자, 왕명을 쫓아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 날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적이 저조합니다; “흙 벽돌의 재료로 사용이 되는 짚을 애굽인들이 제공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짚을 대신할 재료를 구하는데 그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가 되고 있습니다”(5:12-14).

셋째로, 애굽인 감독들에게 히브리인 기록원들이 저조한 실적을 보고합니다. 그 자리에서 과업의 달성을 못했다고 기록원들이 동족인 백성들을 대신하여 구타를 당하고 있습니다(5:14). 그 결과 더 이상 견딜 수가 없게 된 기록원들이 언로를 통하여 애굽의 황제인 바로에게 시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5:15-16). 그 언로는 아무래도 감독을 통하지 아니하고 바로에게 곧바로 의견을 제출할 수 있는 그 어떤 제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기록원들은 황제인 바로의 잘못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황제의 손발이 되고 있는 신하나 관청의 잘못이라고 그 책임소재를 밝히고 있습니다(5:16, 이는 당신의 백성의 죄니이다). 그 이유는 바로가 최고 통치권자이며 현인신이기 때문입니다. (, god)이기 때문에 사람이 그 잘못을 논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끝으로, 그러한 진정(陳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전혀 개선책을 마련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5:17-18).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예 딴 생각을 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본래 바로의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여나 모세와 아론이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게 되면 엄청난 보복과 화가 바로로부터 미치게 된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게 해주고자 그러한 탄압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의 의도대로 그렇게 역사가 진행이 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5:19-21).

 

바로의 대답 가운데 엿보이는 여호와에 대한 멸시(5:17-18), 그렇다면 출애굽기의 주제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는 멸시의 대상이 아니고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바로에게 똑똑하게 각인을 시켜나가실 것인가?

 

바로는 다음과 같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존재와 그 명령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바로가 이르되,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하는도다. 이제 가서 일하라. 짚은 너희에게 주지 않을지라도 벽돌은 너희가 수량대로 바칠지니라”(5:17-18).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고 자신이 마치 나일 강의 소유주이며 모든 애굽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인인 것처럼 거들먹거리고 있는 애굽 제국의 황제인 바로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징계하실 것인지가 이제부터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습니다(29:3, 32:2). 그 이유는 바로가 아니고 하나님이 모든 세상을 만드시고 그 흐름을 결정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자연과 인생, 그리고 집단적인 인간들의 역사 가운데 어떻게 개입하고 계시는지 그 가장 기본적인 모습과 특징을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자연에 대해서는 창조한 상태 그대로 그냥 던져두고 계시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자연이 자연일 수 있는 것은 자동적으로 창조된 질서 그대로 순종하여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38:4-11). 그러나 하늘과 땅 그 사이에 있는 피조물들이 영적인 영향력을 받고 있습니다. 영들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있는 천사들도 있지만 자신들의 견해를 하나님의 뜻보다 더 우선시하고 있는 악한 영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영향력이 자연에 미치고 있기 때문에 순조로운 흐름이 끊어지고 역행과 역풍이 발생하고 있습니다(6:12). 하나님께서는 자연의 정상적인 흐름과 자정(自淨, 스스로 정화함)능력 그리고 회복력을 보존하기 위하여 자연질서에 개입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경우를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 예수가 광풍과 풍랑이 거세게 일고 있는 갈릴리 호수에서 사나워진 바람을 꾸짖으며 잠재우고 있는 광경에서 잘 엿볼 수가 있습니다(4:39).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인생길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영과 육이 하나가 되어 있는 독특한 존재로 창조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오로지 육신적으로만 사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영적인 호흡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인 양식으로 삼아서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악한 영들이 죄와 사망의 권세를 쥐고 있으며 약육강식의 사회를 만들도록 세상적인 방법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곳입니다(2:2-3). 그와 같은 세상살이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낼 수가 있을까요? 그 원형적인 모습이 출애굽기에서 엿보이고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바로에게 보내어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을 애굽 땅에 내리겠다는 예언을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재앙이 임하게 합니다. 바로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지 아니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 결과 출애굽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써는 완전하게 하나님의 뜻에 맞는 거룩한 백성 제사장나라가 이 세상에 탄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의 광야생활과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 점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죄인의 삶을 십자가의 제사로 청산하고 죽음의 세력을 부활에 참여하는 소망과 믿음으로 물리치라는 것입니다(8:1-2).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화하면서 공생애를 살아가는 것, 그것이 성도의 삶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론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2).

셋째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그리고 세상을 구원하는 제사장의 나라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 특별히 출애굽기가 많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점을 모세의 행적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애굽 바로의 황궁에서 왕자교육을 받고서 정치적으로 성장한 40세의 모세가 꿈꾸는 세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40세의 모세는 고센 땅에서 반란을 획책하고 있습니다. 그는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동하여 자신의 세력으로 삼으려고 합니다(2:11-13, 7:22-25). 그를 중심으로 동족들이 고센 땅에서 힘을 결집해준다면 그는 군대로 편성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때 마침 국내외에서는 투트모세3세에게 쫓겨간 같은 셈족 힉소스인들이 호시탐탐 애굽의 중심부를 노리고 있습니다. 모세는 양어머니 핫셉수트 태후의 서거로 잃어버린 자신의 정치적 권력을 되찾기 위하여 동족의 힘을 이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애굽의 대권을 차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애굽 내에서의 정권의 교체에 불과할 뿐입니다.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모세의 정치적 야망을 달성하는데 그의 동족들이 희생양이 될 뿐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자손들이 노예와 같은 삶을 청산하고 자유민으로 살아갈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나라인 애굽의 풍속과 범신론적인 사상이 여전히 그들을 지배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백성의 모습이 아닙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동족들이 모세를 지지하지 못하도록 역사를 섭리하시고 있습니다. 애굽인을 암살하고 암매장한 사실이 탄로가 나자 모세는 개인적으로 출애굽을 합니다(2:15). 도망자가 되어서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을 제사장 이드로의 사위가 되어 양치기로 지내게 됩니다. 모세의 세상적인 방법론은 완전히 물 건너가버리게 되고 만 것입니다. 젊은 시절의 야망과 꿈 그리고 혈기가 모두 사라져버린 노인 양치기 모세 앞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혈기가 왕성한 40세의 모세가 아니고 80세의 늙은 모세를 부르시고 계십니다(3:4).

그 이유와 하나님의 방법론이 출애굽기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습니다; 첫째, 군대의 칼이 아니고 하나님의 지팡이로 바로와 싸우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반란군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바로와 대결을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애굽의 황제인 바로가 과연 하나님의 능력 앞에 무릎을 꿇게 될까요?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둘째, 거룩한 백성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출애굽을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애굽 내에서 왕조의 교체를 해보아야 하나님의 백성이 탄생하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육체적인 자유를 얻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배워야만 합니다. 세상살이를 말씀에 비추어서 교정을 해나가야만 합니다. 그와 같은 일은 세상 가운데에서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로 나아와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생존과 생활이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에 비로서 체득할 수 있는 깨달음과 신앙심에 해당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능력으로 바로와 애굽 귀족들을 굴복시키고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늙은 모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들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또 80세의 모세가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광야생활 40년 동안 백성들을 리더하기 위해서는 미디안 광야에서 목축을 하면서 지낸 모세의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제사장나라를 건설하고 경영하기 위해서는 40년간 바로의 궁궐에서 왕자교육을 받고 정치를 담당한 바 있는 모세의 경험이 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적재적소에 사람을 배치하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께서 출애굽과 광야생활에 맞도록 모세의 인생을 섭리하고 계십니다. 끝으로, 하나님께서는 세상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민족과 나라의 역사를 섭리하고 계십니다. 참고로, 그 방향성을 알고서 인류의 역사를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출애굽기이며 이스라엘의 역사서들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