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의 2호2룡(손진길 소설)

7세기의 2호2룡59(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3. 3. 17. 12:11

7세기의 2259(손진길 소설)

 

백제의 국왕 부여의자가 서기 660713일에 왕도인 사비성(오늘날의 부여)을 차남인 부여태에게 맡기고 자신은 태자 및 왕자들을 데리고 제2의 수도인 웅진성(오늘날의 공주)으로 피신한다.  부여의자는 국왕인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수도 사비성에 집중되고 있는 나당연합군의 총공세를 80리 동쪽에 떨어져 있는 웅진성으로 분산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것이 부여의자의 착각이다. 왜냐하면, 왕도인 사비성은 몰라도 제2의 수도인 웅진성에는 왕가와 척을 지고 있는 구() 귀족 세력이 우세하여 국왕 일가의 안위가 위험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주인 예식진이나 웅진성의 귀족들은 백제의 국왕보다 구 귀족의 중심인물이며  한때 상좌평을 지낸 바 있는 사택천복을 더욱 환영하고 있다.

그 때문에 웅진성에서 국왕인 부여의자와 태자 그리고 기타 왕자들이 홀대를 받고 있다. 근근이 5일간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물리친 후에 그만 내부반란이 발생한다. 웅진성주 예식진이 앞장서서 구 귀족세력을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켜서 밤중에 국왕과 태자 그리고 왕자들을 모조리 체포한 것이다.

서기 660718일에 반란군들이 사로잡은 백제의 국왕과 태자 그리고 왕자들을 신라군 사령관인 김유신에게 넘겨주자 그들은 극진한 대접을 받게 된다. 특히 당의 원정군 사령관인 소정방은 사로잡혀온 백제의 왕과 왕자들 그리고 귀족들을 탐낸다. 그 이유는 그들을 모조리 당의 수도인 장안으로 보내어 자신의 전공을 크게 자랑하고 싶은 것이다.

탐욕스러운 소정방의 요청을 받자 김유신은 순순히 포로들을 넘겨준다. 그러자 소정방은 아예 사비성과 웅진성에서 잡은 쓸 만한 포로 12천명을 백제의 국왕 및 왕자들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하고 만다;

 그로 인하여 서기 660718일에 국왕 부여의자가 다스리던 백제왕국은 역사 가운데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비성과 웅진성에 국한된 이야기이다. 그 바깥 백제의 땅에서는 그것이 아니다. 지방의 장관과 귀족들 그리고 호족들이 수비군 및 사병을 거느리고 여전히 자신들의 성과 재산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도권과 지방에서 백제를 재건하자고 하는 운동이 벌어진다. 처음에는 사비성에 인접하고 있는 큰 성 주류성임존성이 부흥운동의 중심이 되고 있다. 사비성의 남쪽에 있는 주류성에서는 귀실복신과 승려 도침이 성주인 하동진과 힘을 합하여 백제부흥운동을 일으키고 북쪽에 있는 임존성에서는 흑치상지지수신 그리고 사타상여 등이 일심으로 나당연합군에게 저항하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지방 곳곳에서 구 귀족들과 호족들이 힘을 합하여 나당연합군을 백제의 땅에서 몰아내고자 떨치고 일어난다. 예를 들면, 멀리 남쪽 하동 땅에서 사택창수가 군사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와 합세하고 있는 인물이 남해섬에서 군사를 몰고온 장거산이다;

그와 같이 백제의 땅 전국에서 부흥운동이 들풀과 같이 일제히 발생하자 5만을 헤아리는 신라군과 10만에 달하는 당나라의 군대는 그들을 진압하기에 바쁘다. 일반적으로 적성을 공격하여 취하자면 3배의 군사력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1만명이 수비하고 있는 백제의 성을 나당연합군 3만명이 공격하여 정벌한다고 계산하면 연합군 15만명으로는 겨우 5개의 백제의 성만을 상대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에 따라 신라군과 당군은 두가지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하나는, 수도권에서 발생하고 있는 부흥운동만을 소탕하도록 한다. 또 하나는, 소정방은 재빨리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하여 웅진성과 그 일대에 엄격하게 당의 군정을 실시한다;

소정방의 일방적인 정책을 바라보고 있는 김유신의 마음은 복잡하다. 나당연합을 맺어서 함께 백제를 쓰러뜨렸는데 그 과실을 무엄하게도 소정방을 통하여 당나라가 전부 취하고 있는 것이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당나라에게 이용만 당하고 있는 셈이다.

전방에서 김유신이 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궁리하고 있는데 서라벌에서는 신라의 국왕 김춘추가 역시 고심하고 있다. 김춘추는 신라의 주력군 10만명을 여전히 상주 근방에 전진 배치하고 있다. 백제를 나당연합군이 멸망시켰기에 북쪽의 고구려가 신라를 치고자 남진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사비성과 웅진성을 멸하고 백제의 국왕을 사로잡을 때까지는 신라의 국왕 김춘추가 친히 전방 상주에서 주둔군을 지휘하였지만 지금은 왕도인 서라벌에 돌아와서 외교와 군사관계를 총괄하고 있다. 그는 차제에 태자 김법민과 차남 김인문을 불러서 차후의 대책에 관하여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

그때 태자인 김법민이 논리 정연하게 자신의 의견을 진술한다. 그 주요내용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당나라의 군대를 불러들여 함께 백제의 사비성과 웅진성을 멸하였더니 그곳에 당조정은 전격적으로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군정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향후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킨다고 하더라도 당은 그곳에 역시 군정을 실시하고 말 것입니다. 그것은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먹는다고 하는 속담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삼한일통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당과  연합하고 그 다음에는 삼한의 땅에서 당군을 몰아내는 정책을 실시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 신라의 군사력만으로는 당군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두가지 전략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백제의 유민은 물론 장차 고구려가 멸망하는 경우 그 유민들까지 우리편으로 만들어서 함께 당군과 싸워야만 합니다. 또 하나는, 당의 서편 땅을 노리고 있는 토번제국으로 하여금 서부전선에서 전쟁을 일으키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 전략이 성공하면 동과 서에서 협공을 당하고 있는 당으로서는 우리 신라와 대()타협을 할 것입니다.

태자의 고견을 듣자 국왕 김춘추가 고개를 크게 끄떡인다. 그리고 차남 김인문을 바라보고서 말한다; “인문아, 너의 견해는 무엇이냐?... “. 그가 즉시 대답한다; “저는 형님의 의견에 찬성입니다. 그러한 정책을 실시하게 되면 제가 장안에 가서 대()타협이 가능하도록 당조정에 여론을 불러일으키겠습니다. 그것이 저의 역할입니다!... “.

그 말을 듣자 김춘추가 만면에 미소를 띠고서 말한다; “부디 태자와 인문은 사이좋게 이나라 신라를 잘 이끌어 다오. 나는 너희들을 믿고 이제는 좀 쉬고 싶구나. 오랜 세월 딸과 사위의 원한을 갚겠다고 백제의 멸망만을 소원하면서 달려왔더니 매우 피곤하구나. 좀 쉬고 싶으니 그만 물러가도록 하라!... “;

그리고나서 반년이 지나자 서기 6616월 서라벌에서 국상이 난다. 진골로서 국왕의 자리에 올랐던 김춘추가 이세상을 하직하고 만 것이다;

 문상의 자리에서 개인적으로 국왕의 매부이자 공식적으로는 사위인 김유신이 크게 슬퍼한다. 그러면서 그는 신왕으로 즉위한 35세의 김법민에게 말한다; “부왕의 유지를 받들어 반드시 삼한일통을 이루도록 하세요!... “.

한편, 백제부흥운동의 선구자인 귀실복신과 승려 도침은 주류성에서 끈질기게 나당연합군에게 저항하고 있다. 그들에게 몰려든 백제의 장정의 수가 성의 수비대를 합하여 2만명 정도이다. 그렇지만 성밖에 우군들이 많다. 나당연합군이 주류성에 공격을 퍼붓고 있으면 후방에서는 의병들이 일어나 연합군의 병참부대를 자주 공격하고 있다.

따라서 후방지원이 너무나 먼 당의 군대가 특히 곤욕을 치르고 있다. 군량미가 모자라게 되자 위기를 느낀 당군의 사령관 소정방이 신라군 사령관 김유신에게 간곡하게 병참지원을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그 대답이 별로 신통하지가 아니하다. 그 이유는 당이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나아가서 백제의 땅에 5개의 도독부를 더 설치하려고 획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고 김유신소정방을 싫어하고 있다.

김유신의 대답의 요지가 다음과 같다; “우리 신라는 본래 척박한 농토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백제를 공격하기 위하여 5만명을 동원하고 또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하여 상주에 10만명을 주둔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대군을 먹일 군량미가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당군에게 줄 수 있는 여력이 전혀 없습니다. 널리 그 점을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김유신소정방의 병참지원요청을 딱 부러지게 거절하고 있는 이유는 물론 백제의 사비성과 웅진성을 점령하자 그곳에 당군이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군정을 곧바로 실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뿐 만이 아니다.

소정방은 수도권에 있는 주류성과 임존성의 백제 잔당을 소탕하는 일에만 전념하고 지방에서 발생하고 있는 백제부흥운동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신라군이 책임지고 소탕하도록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이 대국행세를 하고 있는 당의 소정방김유신이 무척 미워하고 있다;

경륜이 많은 김유신소정방의 속셈을 벌써 짐작하고 있다; “우리 신라군 5만명으로는 지방에서 발생하고 있는 백제부흥운동을 토벌할 수가 없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소정방이다. 그는 우리의 전력을 약화시킨 후에 백제를 완전히 차지하고자 한다. 의리도 없고 탐욕스러운 소정방을 도와줄 이유가 전혀 없다. 나중에 때가 되면 그를 제거할 필요가 있다!... “;

그런데 이듬해 6619월이 되자 소정방이 낭패를 당하고 있다. 그 이유는 주류성의 복신도침이 왜의 번왕부에서 귀국한 왕자 부여풍을 신왕으로 맞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부여풍이 왜의 번왕부에서 빌려온 군사 5천명이 부흥군과 합세하고 있다. 그것을 보고서 경향각지에서 주류성으로 의병들이 대거 몰려들고 있다.

당군 10만명이 이제는 8만명 수준으로 줄어들어 있는데 백제부흥군의 수는 도리어 늘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소정방은 입술이 바짝 타고 있다. 일찍이 644년부터 당 태종의 중랑장으로서 고구려원정에 참여한 소정방이다. 그가 660년에는 대장군이 되어 13만명의 원정군을 이끌고 백제로 쳐들어왔는데 이제는 백제의 잔당들 때문에 군사의 수가 5만명이나 희생되고 만 것이다.

따라서 소정방이 당의 황제에게 지원군을 보내어 달라고 상소문을 올릴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런데 뜻하지 아니하게 좋은 소식이 주류성에서 들려오고 있다. 661년이 저물기 전에 내분으로 승려 도침귀실복신의 심복에게 살해를 당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속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내부갈등으로 부흥군의 세력이 분산되고 있다.

소정방이 간자를 심어서 주류성의 형편을 계속 살피고 있다. 그러자 이듬해 662년에 엄청난 정보가 입수된다. 그 내용은 귀실복신의 정체가 본래 부여신복이며 백제 국왕 부여의자의 사촌동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신이 차제에 자신이 백제부흥운동의 기수가 되고 신왕이 되고자 획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주류성에서 신왕으로 옹립된 부여풍 곧 풍장왕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생각이 거기에 미친 소정방이 이간책을 마련하여 사용한다. 그 간계에 그만 풍장왕이 걸려들고 만다; “복신은 그 정체가 사실은 풍장왕의 당숙이다. 그는 백제를 멸망으로 인도한 부여의자와 그의 아들들을 떠나서 새로운 왕가를 세우고자 한다. 그 첫 단계가 풍장왕을 제거하는 것이다!... “.

이듬해 663년이 되자 풍장왕은 발을 뻗고 편하게 잠을 잘 수가 없다. 언제 복신이 반란을 일으키고 3년전에 웅진성에서 예식진이 그러했던 것처럼 부여풍 자신을 사로잡아 죽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풍장왕이 자신의 안위에만 신경을 쓰고 있기에 군사를 지휘하여 당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복신의 일이다.

그것을 보고서 복신의 심복들은 빨리 풍장왕을 해치우고 일치단결하여 당군을 물리치자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복신은 신중하다. 그가 심복들을 설득하고 있다; “지금은 시기상조다. 우리가 내분을 일으키면 의병들이 대거 이탈할 수가 있다. 그러면 당군을 물리칠 가능성이 희박하다. 그러므로 당군의 수가 5만명 이하로 줄어들 때까지는 이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복신은 무예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전략에도 밝은 인물이다. 그러나 풍장왕은 그러하지가 못하다. 자꾸만 주류성에서 복신을 따르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자신은 허수아비 국왕이 되고 있다. 그것을 참지 못하고 그는 선수를 쳐서 복신을 해치우고자 결심하고 있다.

 그렇게 작심하고 있는데 좋은 기회가 찾아오고 있다. 그것은 부여풍의 계속적인 요청에 왜의 번왕부가 뒤늦게 크게 호응하고 나선 것이다. 6638월에 왜의 번왕부의 군사 2만 7천명이 1천의 함선을 타고서 백강하구로 들어서고 있다. 그 소식을 듣자 주류성의 많은 장수들이 풍장왕의 편으로 돌아서고 있다.

그것을 보고서 풍장왕이 심복을 보내어 한밤중에 복신을 암살하고 만다;

 주류성에서는 복신의 일당을 제거하기 위한 풍장왕의 군사행동이 뒤따르고 있다. 그것을 보고서 복신의 아들 귀실집사가 가족을 솔거하여 백제를 떠나 그만 왜의 땅으로 들어가고 만다.

그 다음에는 백제의 부흥운동이 어떻게 되고 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