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의 2호2룡(손진길 소설)

7세기의 2호2룡57(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3. 3. 15. 13:05

7세기의 2257(손진길 소설)

 

국왕 부여의자가 백제를 다스린지 20년이 되는 해가 바로 서기 660년이다. 그해 신라 서라벌에서는 군부를 책임지고 있는 김유신5월부터 은밀하게 중앙군을 조금씩 북쪽 국경에 있는 신라의 여러 성으로 보내고 있다;

한달 후 6월말에는 그 수가 불어나서 도합 5만명이나 된다. 그러자 신라의 국왕인 김춘추7월에 갑자기 서라벌에서 10만명이나 되는 군사를 이끌고 일시에 북진하여 상주 지역에 주둔하기를 시작한다. 그는 만약 북쪽의 강대국 고구려의 군대가 남하하는 경우 그것을 막고자 미리 포진하고 있는 것이다.

신라의 국왕이 어째서 친히 대군을 이끌고 북쪽 상주지역에서 주둔하고 있는 것일까? 고구려가 남진할지도 모른다고 하는 어떤 첩보를 받았기 때문인 것일까? 그것이 아니다. 그는 소위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전략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신라군이 노리고 있는 목표는 고구려가 아니고 백제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왕 김춘추와 그를 보좌하고 있는 김유신 상장군은 굉장히 영리하다. 그들이 백제의 사비성으로 쳐들어가는 경우 북쪽의 고구려의 대군이 우방인 백제를 구원하기 위하여 남진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움직임에 발빠르게 대응하고자 벌써 그 길목에 대군을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7월초가 되자 김유신 상장군이 은밀하게 오늘날의 이천지역에 있는 남천성(南川城)으로 올라가서 그 인근의 여러 성으로 미리 분산하여 보낸 신라의 중앙군 5만명을 전부 남천성에 집결시키고 있다. 그 다음 그는 백제의 왕도인 사비성으로 직진할 수 있는 탄현고개를 넘기 위하여 남쪽으로 이동한다;

그런데 신라의 대군이 탄현고개의 북동쪽 가까이 접근하자 그곳에는 백제의 국경을 지키고 있는 2개의 산성이 있다. 하나가 삼년산성이고 또 하나가 굴산성이다. 그 성들 사이를 무사히 통과하여야 탄현고개에 도달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남진하던 김유신의 군대가 재빨리 백제군이 지키고 있는 삼년산성을 에워싼다;

노련한 신라의 원정군 사령관인 김유신 상장군은 개미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포위한 다음에 삼년산성을 공략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김유신의 착각이다. 왜냐하면, 그 성에서는 정기적으로 척후조를 성밖으로 내보내어 주변지역을 엄격하게 정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날의 정찰조장인 백부장 우현식이 성밖에서 정찰을 실시하는 도중에 우연히 신라의 대군이 삼년산성으로 접근하고 있는 광경을 먼저 발견한다. 엄청난 신라의 대군이 삼년산성을 완벽하게 포위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서 그가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그 이유를 궁리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백부장 우현식이 얻은 결론이 다음과 같다; “신라군은 백제를 공격하고 있다는 정보를 엄격하게 차단하고 있다. 그 이유는 사비성에 신라군의 침략소식이 전해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라군은 탄현고개를 넘어가서 사비성으로 직행하고자 획책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왕도 사비성이 위험하다. 나는 빨리 이 소식을 국왕에게 전해야만 한다!... “;

우현식이 재빠르게 행동한다. 그는 수하인 오십부장에게 삼년산성에서의 전투가 어떻게 진행이 되는지를 잘 지켜보라고 지시한 후 급히 십부장 한사람과 함께 말을 타고서 달린다. 그는 탄현고개를 넘어 황산벌을 지나 곧장 사비성으로 들어간다.

사비성 정문에서 자신의 정체를 밝힌 백부장 우현식은 즉시 상좌평 의직()에게 상황보고를 한다. 신라의 김유신이 진두지휘하고 있는 군사 5만명이 삼년산성을 포위하고 있다는 급보이다. 그 정보를 듣자마자 의직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고 판단한다.

상좌평 의직의 급한 보고를 받은 국왕 부여의자는 한동안 말이 없다. 그러더니 급히 조정회의를 소집하라고 지시한다. 사비성 조정에서는 두가지 안이 대두하고 있다; 하나는, 고인이 된 성충과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흥수의 공통된 진언에 따라 신라군이 탄현고개를 넘지 못하도록 당장 군사를 보내자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미 그 작전을 실시하기에는 늦었으니 황산벌의 고지대를 선점하여 그곳에서 신라군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막자는 것이다;

오래 회의를 계속하고 있을 여유마저 없다. 왜냐하면, 해안선을 지키고 있는 백제의 성에서부터 또다른 급보가 도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나라의 군선이 병사를 잔뜩 싣고서 수도 없이 연안을 따라 남하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왕 부여의자가 결단을 내린다.

백제 국왕의 명령이 구체적으로 두가지이다; “상좌평 의직은 중앙군 39천명 가운데 2만명을 이끌고 나가 바닷가에서 백강을 타고 사비성으로 들어오고자 하는 당나라의 군대를 막도록 하라. 그리고 대장군 계백은 중앙군 5천명을 이끌고 나가 탄현고개를 넘어 사비성으로 들어오는 신라군을 막도록 하라!... “;

결국 국왕 부여의자는 남는 중앙군 14천명을 가지고 왕도 사비성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좌평 의직과 대장군 계백이 나당연합군을 현지에서 막아내지 못한다면 백제는 그 운명이 끝날지 모르는 형편이다.

왕궁에서 왕명을 받은 계백 대장군은 급히 사비성에 있는 자택에 들린다. 왕궁을 나설 때부터 천부장 싸울이 부관으로서 부친인 계백 대장군을 뒤따르고 있다. 자택에서는 주류성에서 온 좌백 장군이 형 계백을 기다리고 있다. 계백의 아내 상애영도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을 전부 한방에 모아 놓고서 계백이 준엄하게 말한다; “나의 임무는 5천명의 중앙군을 이끌고 당장 황산벌로 가서 고지대를 선점한 후 김유신5만 대군을 막는 것이다. 아직 그들이 탄현고개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으면 우리 군이 산지 고지대에 미리 매복하여 신라군의 진입을 확실하게 막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적으로 너무 늦은 것 같다. 결국 나는 5천명의 군사로 김유신5만명의 대군과 황산벌판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 ”.

그 말을 듣자 아내 상애영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그리고 그녀가 모종의 결심을 하고서 말한다; “여보, 우리 백제를 살리기 위하여 당신이 결국 피를 흘리게 되는군요. 그렇다면, 저부터 죽이시고 마음 편하게 출전하세요. 우리 부부가 함께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저는 좋아요!... “;

그 말에 계백이 비장한 음성으로 말한다; “내가 마지막 전장으로 달려나가는 이유는 백제를 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해가 뜨는 본국인 우리 백제일본은 사비성이 멸망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그 운명이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인 우리 백제는 왜와 중원에도 번국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사비성이 망하면 남은 사람들은 백제의 변경이나 왜로 건너가서 다시 백제를 세우고 또 하나의 일본을 건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

시간이 얼마 없으므로 계백이 아우 좌백과 아들 싸울에게 명령한다; “좌백아, 싸울아, 이번 전투가 나의 마지막 전투이다. 그러나 내가 죽더라도 백제는 계속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 너희들은 당장 가족들을 데리고 비밀리에 왜의 땅을 들어가라;

 그곳에서 훗날을 도모하도록 해라! 이것이 왕족 부여승이며 가문의 가장인 나의 마지막 명령이다!... “.

그 명령을 남기고 계백 대장군은 군부에 들러 좌평 충상상영을 만난다. 국왕 부여의자가 군부에 지시하여 계백이 가는 길에 2명의 좌평이 동행하도록 벌써 조치를 취하였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백제의 국왕 부여의자46살에 왕이 되어 20년간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 그는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고 남을 믿지 아니하는 성품이다. 따라서 단지 5천명의 군사로 결사적으로 적군 5만명을 상대해야 하는 계백이 자신을 배신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한 우려 때문에 구() 귀족에 속하는 좌평 충상(忠常)상영(常英)을 감시역으로 붙여주고 있다.

그런데 다시 좌평의 벼슬에 올라있는 구 귀족인 충상상영은 국왕 부여의자의 속셈을 훤히 꿰뚫고 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계백의 손위 처남이 되는 좌평 상영충상에게 은밀하게 속삭이고 있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다; “계백 대장군은 충직한 무장이므로 목숨을 바쳐 조국을 지킬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결사대라고 하더라도 신라군에 비해 1할에 불과한 군사로는 도저히 적군을 이길 수 없어요. 결국 우리도 목숨이 위험합니다. 그러니 달리 살길을 도모해야 합니다!... “;

그 말을 듣자 좌평 충상이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같은 생각입니다. 우리 귀족의 재산과 벼슬을 빼앗아간 국왕 부여의자를 위하여 우리가 피를 흘릴 필요는 없지요. 그러니 우리는 고지대에 은신하고서 기회를 보아 신라군에게 투항하여 살길을 도모하도록 합시다. 계백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도리가 없군요!... “.

계백은 손위 처남 상영과 좌평 충상이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그는 순진하게도 백부장 2명을 2명의 좌평에게 호위부대장으로 삼아 배치한다. 황산벌에 도착해서는 가장 안전한 고지대에 2명의 좌평을 은신하도록 해준다. 그리고 나서 계백48백명의 군사를 4개 대대로 편성한 후에 유격대 활동을 시작한다;

한편 김유신5만명의 원정군은 거의 손실없이 삼년산성과 굴산성을 통과하고 음력 78일에 탄현고개에 다다르고 있다. 왜냐하면, 백제의 삼년산성은 신라군에게 포위를 당하자 얼마 버티지 아니하고 항복하고 말기 때문이다. 게다가 굴산성주 임자(任子)는 스스로 성문을 열고 손수 김유신을 성안으로 맞아들이고 있다. 그는 진작에 김유신과 내통하고 있는 구 귀족인 것이다;

그 결과 김유신의 대군이 생각보다 빠르게 탄현고개를 넘고 있다. 척후를 통하여 그 사실을 확인한 계백은 탄현을 통과하여 황산벌로 들어오고 있는 김유신의 군대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황산벌의 주위에는 4개의 산지가 있다. 그곳에 숨어 있다가 유격대가 번갈아 가면서 김유신의 군대를 급습하고 있다;

 일종의 치고 빠지는 전술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음력 79일 개시된 그 유격전 때문에 김유신은 골치가 아프다.

그때 김유신의 아우인 김흠순 대장군이 아들 반굴에게 적은 군사를 주고서 계백이 은거하고 있는 고지대를 공격하라고 명령한다. 고지전에 나선 반굴이 죽고 만다. 그것을 보고서 장군 김품일이 화랑으로서 참전한 아들 관창에게 적은 병력을 이끌고 나가 고지대의 계백의 군대를 치라고 명령한다.

그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계백관창을 사로잡아 말 위에 묶고서 그를 신라진영으로 돌려보낸다. 너무 어린 16세의 장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품일 장군은 화랑의 세속오계인 임전무퇴(臨戰無退)를 실천하라고 강조하면서 아들을 재차 선봉장으로 내보낸다. 그 일이 3차례나 반복되자 계백은 마침내 관창의 목을 베고 만다.

그것을 계기로 하여 신라의 대군이 결사적으로 고지전에 임한다. 그 결과 해가 지기 전에 백제의 유격군은 전멸하고 계백은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그것을 보고서 다른 산지에 은신하고 있던 좌평 충상상영20명으로 줄어든 호위병력과 함께 김유신에게 항복하고 만다;

김유신은 황산벌에서 승전한 후에 곧바로 사비성으로 달려간다. 그것을 보고서 백제국왕 부여의자는 사비성의 수비를 차남인 부여태에게 맡기고 태자 부여융은 물론 다른 왕자들과 함께 제2의 수도인 웅진성으로 들어가고 만다. 이제 백제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좌백싸울의 운명은 또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