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출애굽기 강해 제19강(출3:15-2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3. 15. 20:04

출애굽기 강해 제19(3:15-21)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67()

 

스스로 있는 자조상들의 하나님과의 차이(3:14-15)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I am who I am)이며 피조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세에게 밝히고 있습니다(3:14). 한 마디로, 애굽에 있는 여러 신들은 모두가 우상이며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은 유일한 창조주라는 지적입니다. 그러므로 역시 피조물에 속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명과 육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삶과 죽음 그리고 축복과 진노가 모두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는 사실을 확연히 인식하게 되는 자리입니다(30:1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 앞에 자신의 진면목을 공개하시게 되면 그 자리에 당당하게 서서 버틸 수 있는 존재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 앞에서 일순간에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18:1-2, 27, 5:8, 9:4).

훗날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이 독생자의 영광을 가지고 성육신을 하게 됩니다(1:14). 보통 사람과 똑같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부탁을 받은 만민과 만물에 대한 구원사업을 하시고 계십니다(3:16).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유월절이 시작되기 전에 자신을 잡으러 온 로마의 병정과 전임 대제사장의 하인들 앞에서 내가 그니라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시면서 동시에 신적인 권위를 공개하신 적이 있습니다(18:6a). 독생자의 영광이 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모든 체포요원들은 땅에 쓰러지게 됩니다(18:6b). 하늘에 있는 열두 군단의 천사라도 순식간에 동원할 수 있는 능력자 창조주의 권능이 그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는 순간에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26:52-54).

따라서 스스로 있는 자라는 개념으로 풀이가 되고 있는 창조주의 존재는 한 마디로, 영생하는 하나님으로서 두려움의 대상이며 한없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입니다(21:33, 22:12). 시공간에 갇혀서 유한한 목숨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 피조물인 인간의 입장에서는 마치 블레셋의 황제인 아비멜렉처럼 그저 창조주로부터 진노를 사지 아니하고 화를 입지 아니하면 그것으로 다행이라고 여겨야만 하는 것입니다(20:14-18, 21:22-23, 26:28-29). 그와 같은 엄청난 영적인 능력을 가지시고 이 세상과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운명을 결정하고 계시는 분이 바로 스스로 있는 자야훼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반면에 조상들의 하나님은 다른 모습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승이 되고 있습니다. 이방 땅과 이방인들에 대한 심판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나그네 인생을 신실하게 살아갔던 믿음의 조상들에게는 언제나 구원을 베푸시던 하나님이 바로 조상들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의 역사를 앞두시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어떠한 하나님으로 기억이 되고 싶어하시는 것일까요? 그 해답이 다음과 같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3:15). 하나님께서는 두려우신 창조주이시며 심판의 하나님으로 영원히 기억되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계십니다. 심판 가운데에서도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 진노의 자식을 긍휼히 여기시고 회개함으로 돌아오기를 인내로써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새겨지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33:19, 9:22-26). 그렇게 친밀하고 개인적인 이해와 동행이 가능하신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이제 애굽으로 들어가고자 하시는 것입니다(3:12).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애굽에서 돌보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출애굽을 결심하시고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모세에게 말씀하시다(3:16-21)

 

첫째로, 애굽으로 들어가서 가장 먼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장로들의 모임을 주선합니다(3:16a). 그리고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첫째, 고센 땅에서의 민족적인 고난을 하나님께서 감찰하시었다(3:16c). 둘째, 고난 가운데에서도 민족의 수가 줄지 아니하도록 그 동안 돌보아주셨다(3:16b). 셋째, 이제는 때가 되었으므로 출애굽을 하여 약속의 땅으로 들여보내도록 하겠다(3:17)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모세가 애굽의 황제인 바로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만 합니다;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 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3:18). 하나님께서는 바로가 동의하지 아니할 것임을 예언해주고 있습니다(3:19b). 따라서 바로가 허락을 할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께서 강력한 징계를 행하실 예정이라고 밝히고 계십니다(3:19a). 소위 애굽에 내리는 열 가지 재앙을 미리 보는 것과 같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이적으로 애굽을 치십니다. 그 결과 견디지를 못하게 된 바로와 애굽의 신하와 백성들이 항복을 하고 있습니다(3:20). 훗날 모세에게 신신당부를 하게 됩니다; “부디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고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애굽을 떠나주십시오”(12:31-33). 고자세였던 그들이 이제는 사정하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즉시 떠나는 대신에 광야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과 금붙이를 요구하게 됩니다(12:35-36). 다소 무리한 그 요구까지 바로와 애굽사람들이 전부 수용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나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3:21), “너희는 애굽 사람들의 물품을 취하리라”(3:22).

과연 그와 같은 꿈과 같은 미래가 현실적으로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눈앞에 도래를 할 수가 있을까요? 모세는 하나님의 계획을 상세하게 전해 들으면서도 여전히 반신반의를 하고 있습니다(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