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출애굽기 강해 제17강(출3:8b-1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3. 14. 20:52

출애굽기 강해 제17(3:8b-11)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66()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6 족속의 땅”(3:8b)의 세 가지 의미

 

 첫 번째 의미는 아름답고 광대한 땅입니다(3:8). 이 세상의 땅은 아름답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창조를 하셨기 때문입니다(1:31). 그러나 자연은 아름답지만 그 속에서 삶을 유지하고 있는 짐승과 사람들이 아름답지를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 옛날 노아의 시대에 홍수심판이 와서 물고기를 제외한 모든 생물들이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습니다(6:17, 7:21-2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아름다운 땅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 땅은 아무래도 이사야 선지자가 그의 선지서 제11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땅을 의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11:5-6). 그 땅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건설하고 있는 거룩한 땅이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한 세상이라고 정의가 되고 있습니다(11:9).

  그러한 낙원이 과연 이 세상에 존재를 한 적이 있었던가요? 적어도 두 차례 있었음을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태초에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건설하시고 아담을 그곳에 두셨을 때에 그곳이 그러한 낙원이었습니다(2:8, 19). 아담이 동물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서로 이름을 부르면서 친구처럼 지냈습니다. 둘째, 노아의 홍수 때에 방주에 타고 있었던 동물들의 세계가 그러했습니다; “당시 노아의 방주 속에서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포악한 짐승들이 서로 잡아 먹지를 아니하고 식물성 먹거리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방주 내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역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3, 18-22). 더구나 시편의 저자들은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그 구원의 땅을 광대한 땅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34:3, 11:5, 18:19). 그 땅은 세상의 위험을 벗어나서 구원을 받은 자가 디디고 있는 하나님의 넓은 땅을 의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아름답고 광대한 땅메시아의 땅이며 거룩한 성도들의 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7:13-14, 22).

두 번째 의미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3:8). 여기서 은 완전식품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영양분입니다. 그 다음에 은 생활의 윤택함과 활력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생계를 넘어서는 생활의 풍요로움을 의미하고 있는 먹거리입니다. 그러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생존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생활의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는 땅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풍요로운 땅은 이 세상에서 더러 찾을 수가 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권과 애굽의 문명권이 그러하고 그 사이에 있는 비옥한 초생달 지역이 그러합니다. 그 가운데 과연 어느 곳을 하나님께서 지칭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아무래도 그 사이에 있는 초생달 지역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만약 애굽의 나일 강 삼각주 지역을 염두에 두셨다면 구태여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저 제국 내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정권을 장악하도록 해주면 되지 않겠습니까?(1:10) 그리고 큰 두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지역도 아닙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역사적으로 메소포타미아를 점령할 수 있도록 조치하신 적이 한번도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의미는 가나안 6족속의 땅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3족속은 그들의 활동무대가 가나안 땅에 국한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3족속 곧 헷 족속, 아모리 족속, 그리고 히위 족속은 다릅니다. 헷 족속은 한 때 힛타이트 제국을 형성했으며 아모리 족속은 셈족인 아무르 족속과 함께 중동을 지배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히위 족속은 세겜 등 가나안 땅의 중심지역은 물론 세일산과 에돔 들판까지 차지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6족속의 땅은 가나안에 국한이 되고 있지를 않습니다. 메소포타미아와 애굽의 사이에 있는 모든 땅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합니다(15:18). 역사적으로 그와 같은 하나님의 예언에 따라 훗날 다윗이 꼭 그 크기에 맞는 이스라엘 제국을 형성하고 있습니다(삼하8:1-18).  

 

모세에게 이제 가라,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게 하리라”(3:9-10)는 하나님의 말씀은 왜 모세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가?(3:11)

 

모세는 개인적으로 그의 나이가 40세가 되던 해에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하여 동족들의 세력을 규합하고자 한 적이 있습니다(2:12-13, 7:24-25). 그렇지만 하나님은 모세의 편을 들어주지 아니했습니다. 그 결과 동족들이 모세를 불신하면서 배신을 합니다(2:14,  7:26-29). 그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아직 출애굽의 시기가 무르익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400년 동안의 이방 땅에서의 고난이 아직 끝날 때가 아닙니다(15:13-14). 그리고 가나안 땅 원주민들을 쫓아낼 시기가 아닙니다(9:1-6). 그들의 죄악이 아직 차고 넘치는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15:16). 둘째, 하나님께서는 세상나라가 아니라 제사장의 나라 거룩한 백성들의 나라를 건설하고 싶어하십니다. 만약에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의 편을 들어주셨더라면 애굽의 역사와 이스라엘의 역사는 어떻게 진행이 되었을까요? 한 마디로, 출애굽의 역사는 필요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참고로, 당시의 모세는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세력을 등에 업고서 애굽의 황제인 투트모세3세와 정치적인 대결을 하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상대는 자신보다 12세가 적으며 아직 정치적인 경륜이 부족한 젊은 바로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양어머니인 여자 바로 핫셉수트 태후가 서거하자 수도인 테베를 떠나서 얼른 고센 땅으로 들어옵니다. 그때 40세의 모세가 고센 땅에서 세력을 얻어서 반기를 들었더라면 쿠테타에 성공할 가능성도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국내외에 아직 같은 셈족인 힉소스인들의 세력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정권을 획득한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는 셈족에 의한 새로운 왕조가 다시 탄생하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에서 배운 그대로 새로운 바로를 섬기며 제국 내의 범신론적인 신앙을 계승할 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근본적으로 그러한 결과를 결코 원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적인 제국인 애굽 곧 바로를 신으로 섬기고 있는 범신론적인 나라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만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들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려고 하십니다(19:4-6).

40세의 모세는 애굽의 황궁에서 왕자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제국의 논리로 정치적인 발판을 마련하고 그의 양어머니의 별세로 멀어져 버린 대권을 되찾겠다고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나의 정권획득의 수단으로서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눈에 들어온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2:11, 7:23). 그러한 행동을 보이고 있는 모세는 결코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들의 영적인 지도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먼저 출애굽시켜서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사위로 만들었습니다(2:21-22, 3:1). 그 밑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배우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세상적인 방법론과 혈기를 40년 동안 완전히 소멸시켜버립니다. 하지만 그 옛날 동족에게나 하나님께나 섭섭했던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 결과 지금 호렙 산에서 하나님이 그를 출애굽의 일꾼으로 부르시고 있는 자리에서 모세는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다음과 같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3:11).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시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다각적으로 깊이 있게 고려하고 계시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 자손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있습니다(2:23, 3:9a). 그 부르짖음과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언약과 엄격하게 비교를 하고 있습니다(2:24). 둘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줄 땅을 언제까지 준비할 수 있는지를 검토하고 계십니다. 구체적으로, 가나안 원주민들을 쫓아내는 시점을 계산하고 계십니다(15:16). 셋째, 출애굽을 이끌 지도자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모세를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장차 애굽의 바로를 만나서 담판을 하자면 애굽 황실의 사정에 밝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제사장나라를 건국하자면 제사장 직무에도 밝아야 하며 동시에 국가의 운영에도 일가견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한 교육이 바로의 황궁과 미디안의 제사장 집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모든 훈련이 끝나자 비로서 호렙 산 불꽃 속에서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3:4). 넷째, 모세가 애굽에 들어갈 때까지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돌보시고 계십니다(2:25). 하나님께서 돌보시지 아니했더라면 그들은 벌써 절손(絶孫, 자손이 끊기는 것)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1:17, 20, 2:1-6).

결론적으로, 그렇게 입체적이면서도 다양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섭리를 바로 보지를 못하고 자신의 야속한 마음만을 앞세우고 있는 모세입니다. 그와 같이 속이 좁은 모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시고 다듬어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이야기가 이제부터 구체적으로 서술이 되고 있습니다(3:11-12, 4: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