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강해 제14강(출3:2-5)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년 6월 3일(화)
하나님의 매력; 호기심 유발, 기적의 연출, 하나님의 사자의 역할, 모세를 떨기나무 불 가까이로 불러오다(출3:1-3)
매력이란 사람을 끄는 힘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한 마디로 매력의 덩어리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우주와 자연이 얼마나 신비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말로 표현을 다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았다고 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도 알면 알수록 경이로움의 대상입니다. 평생을 함께 살면서 연구를 해보아도 그 내면의 세계와 육체적인 표현의 다양함을 다 파악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자연과 인간을 만들어내신 창조주 하나님이야말로 얼마나 큰 매력의 덩어리이겠습니까? 어떻게 우주를 만드시고 생명체를 창조하셨는지 만나고 싶고 묻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의 인생과 집단의 역사가 어떻게 그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가 되고 있는지도 꼭 만나서 묻고 싶은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는 그것을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아직도 ‘기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경이로운 생명의 탄생과 생명력의 흐름을 관찰할 수는 있지만 인공적으로 그리고 첨단의 과학이라는 도구로써도 그것을 만들어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주 잠시 동안은 그럴듯하게 연출을 해내거나 영화로 만들어낼 수가 있지만 그 자체가 허상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현대인들도 사실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경이로운 일을 계속 보고 싶어하고 또 직접 그러한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당사자인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직접 그 모습을 드러내시는 일은 너무나 드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리만족을 위해서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을 대신 따라다니고 또한 만나고자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마치 집단최면에 걸린 사람들처럼 그렇게 행동을 하고 있는 사례를 현대에 와서 더 많이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인위적으로 ‘아이돌’과 ‘아이돌 그룹’을 더 많이 양산해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아이돌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우상화되고 있는 그들이 참 딱합니다. 그들은 계속 아이돌로서 살아남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예를 들면,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수 있는 마치 기적과 같은 이벤트를 틈틈이 연출해야 하고 남과는 다른 차별화를 계속 시도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대중이 원하고 있는 신체조건과 묘한 분위기도 인공적인 노력으로 만들어내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호기심을 계속 유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대중의 관심과 호기심을 계속 끌어 모아야만 하기에 그 인생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사실은 사람이란 그저 그런 존재들에 불과합니다. 한 마디로, ‘오십보백보’입니다. 몇 걸음 더 나아갔느냐 아니면 뒤 처치고 있는가의 차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모두가 지구의 표면에서만 살고 있는 존재이며 그 경험의 세계가 그저 지구상에 국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들이 서로 잘 났다고 해보아야 얼마나 잘 났으며 얼마나 매력이 철철 넘치겠습니까?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기가 너무 힘이 드니까 사람들은 그 대신에 손쉽게 접할 수 있는 피조물을 통하여 호기심 천국과 기적의 연출을 계속 추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아이돌들이 굉장하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격찬하고 있는 이야기를 대충 종합해보면 그 대부분이 팬 클럽 자체가 만들고 지어낸 과대망상이고 자기중독이며 집단최면임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가 있게 됩니다.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그 점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출애굽의 일꾼으로 모세를 사용하시고자 때가 되어 그를 부르실 때에 그 방법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그것도 직접 기적을 연출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자를 시켜서 하나의 작은 기적을 보여주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출3:2). 그래서 탄생하고 있는 것이 “마른 가시나무인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신기하게도 나무가 타서 없어지지 아니한 채 계속 불만이 활활 타고 있는 신기한 광경의 연출”인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기적이며 표적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터져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당장은 모세가 메마른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만에 보게 되는 기가 막히는 불구경입니다. 그가 고개를 돌려서 그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세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출3:3)
하나님의 관찰하심과 부르심(출3:4)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이며 시공간을 초월하는 영적인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영적인 존재이거나 피조물이라도 시공간을 초월하여 관찰하고 계시는 창조주의 눈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은 완전히 숨겼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보면, 아담부부의 장남인 카인의 범죄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그는 어리석게도 아무도 없는 넓은 들판 한 가운데에서 동생 아벨을 쳐죽이고 암매장을 합니다(창4:8). 그리고 완전범죄를 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패하고 맙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의 눈은 피조물의 눈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대목이 다음과 같습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4:10).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자가 하고 있는 일을 모두 감찰하고 계십니다. 사자가 떨기나무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러자 마른 나무가 타서 없어지지 아니하는 신기한 기적이 연출됩니다. 그 기이한 불구경을 하고자 떨기나무가 있는 호렙산을 먼 발치에서 지나치고 있었던 모세가 되돌아오고 있습니다(출3:3-4). 그 광경을 하나님이 유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출3:4a). 모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계시는 소위 ‘관찰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본문입니다. 아주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서 이제는 직접 사람의 음성으로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고 계십니다; “모세야, 모세야”(출3:4b). 모세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러나 익숙한 사람의 음성이기에 편하게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출3:4c). 모세가 매우 친숙하게 응답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미루어보아, 하나님의 음성은 모세의 부모님 또는 장인 이드로의 음성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존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별다른 의심이 없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그 목소리에 익숙하게 반응을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모세가 명심하고 실천을 해야만 하는 일(출3:5)
모세가 매우 익숙한 목소리에 대답을 하면서 아주 불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는 불 건너편에 아마도 굴이 있고 그 안에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계시는 것이 아닌가 하고 판단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떨기나무 저편에는 굴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강림해서 모세를 만나고자 하시고 계실 뿐입니다. 그래서 급하게 한 마디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5).
하나님을 사람인 줄로만 알고서 가까이 다가가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한 마디로, 죽습니다(출33:20).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게 되면 그대로 체질이 녹아버리게 됩니다(벧후3:12). 흙으로 만든 인간의 육체와 그 몸을 움직이고 있는 영혼이 하나님의 영적인 힘과 능력을 견딜 재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사람이 하나님을 안전하게 접견을 할 수가 있을까요? 그 방법이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첫째로, 피조물은 하나님 너무 가까이로 접근을 하면 안됩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출3:5a)는 지시를 명심해야만 합니다. 그 지시를 어기고 너무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육체를 가진 인간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감히 피조물인 존재가 창조주와 일대일로 맞대응을 하고자 하는 교만과 아집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것은 불에 타버리게 되는 형벌을 면할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사14:14-15, 마25:46, 계20:10).
둘째로, 하나님 앞에서 접견을 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고 분수를 지키면서 그 음성을 확실하게 들을 수는 있습니다(출34:29, 민12:6-8, 신34:10). 그 방법이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5c)는 것입니다. 왜 신을 벗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강림하시는 그곳이 바로 거룩한 곳으로 바꾸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출3:5b). 따라서 하나님께서 강림하시면 이 땅이 거룩한 곳으로 바뀌게 됩니다(막9:2-4). 마찬가지로 성령님께서 강림하여 역사하시는 그 장소도 거룩한 곳으로 변하게 됩니다. 아울러 성령께서 내주하여 역사하고 계시는 성도들의 속 사람과 영혼도 이미 거룩한 곳으로 변화가 되고 있습니다(롬7:22, 고전6:19-20). 그렇게 속 사람과 영혼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을 받아 들일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사역이 이 땅에서 이미 있었다고 하겠습니다(롬8:1-2). 십자가에서 믿는 자들의 죄를 모두 대속해주셨기에 성도들이 의인으로 칭함을 받게 되고 그 심령 속에 성령세례를 받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사53:4-12, 요14:10-20, 롬7:24-25). 그것이 한 마디로, 갚을 길이 없는 주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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