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출애굽기 강해 제5강(출1:17-2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3. 10. 21:27

출애굽기 강해 제5(1:17-21)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525(주일새벽)

 

산파들이 바로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다(1:17)

 

바로’(parao)는 애굽 제국의 최고권력자인 황제의 칭호로서 신의 아들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고대국가에서 왕은 나라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황제는 여러 나라를 아우르고 있는 제국의 주인입니다. 그러므로 황제는 왕들의 상전입니다. 고대국가에서 왕은 국내의 모든 토지와 백성들의 소유주입니다(47:19). 따라서 백성들은 왕의 신하이거나 종입니다. 한 마디로 왕이 백성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왕의 권력이 절대적입니다. 자신들의 목숨의 끈을 쥐고 있으니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황제의 권력은 왕들보다 더 거대합니다. 그 이유는 황제가 자기 나라의 영토 안에서는 절대권력자로 행세하고 있는 왕들의 목숨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애굽 제국의 황제인 바로가 스스로 신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일리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결코 신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10:28). 황제나 왕은 사람의 몸을 죽이고 목숨을 거둘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들의 영혼을 어찌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황제나 왕보다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더 옳다는 가르침입니다.

따지고 보면, 사람의 몸과 목숨은 한시적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서 움직이는데 그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영혼이 한시적으로 입고 있는 옷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포도주를 담고 있는 자루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고 있습니다(9:17). 하나님께서 주시는 귀한 영혼을 담고 있는 한시적인 그릇이나 자루와 같은 그것은 물론 사람의 몸이며 목숨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담겨있지 아니하다면 목숨이나 몸은 그 자체가 완전한 인격을 형성할 수 있는 주체가 되지를 못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들도 육체와 목숨을 모두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3:18-21).

그렇지만 고맙게도 사람은 짐승과 다릅니다. 창세기를 들여다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 때에 달리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사람을 창조했습니다(1:26-27). 그 결과 사람만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을 경영할 수 있는 청지기의 직분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었기 때문입니다(2:7). 하나님께서 지니고 계시는 그 생명력 곧 영적인 능력이 코로 들어가자 비로서 사람이 영적인 호흡을 하고 만물의 영장이 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이 땅에서 유일하게 지성과 감성과 자유의지를 모두 향유하고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됩니다. 사람만이 영혼을 가진 특이한 존재인 생령’(living soul)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애굽에서 히브리 산파인 십브라와 부아가 바로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내아기를 낳으면 모두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명령 곧 생명을 살리고 돌보라는 그 명령을 바로의 명령보다 우선하고 있는 것입니다(3:4). 그것은 히브리 산파들이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올바른 사명을 감당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1:26-31). 히브리 산파이므로 그들은 이스라엘 출신인 산파들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아직 하나님 경외사상이 살아서 숨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멋진 장면이라고 하겠습니다(1:21).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산파들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은혜들(1:18-21)

 

첫째로, 그들의 서투른 거짓말과 변명이 놀랍게도 바로에게 통하고 있습니다; “출산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부리나케 산모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보면 벌써 아기가 태어난 후라는 변명입니다. 그 이유는 히브리 여인들이 애굽 여인들과는 달리 매우 건강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산파의 도움이 없이 자식을 낳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산파를 부르는 경우에도 그들이 도착해보면 벌써 아기를 낳고 난 후가 된다는 실로 뻔한 거짓말입니다(1:18-19). 그것은 마치 그 옛날 야곱의 아내인 라헬이 친정 아버지 라반 앞에서 한 거짓말과 같습니다(31:34-35). 라헬은 아버지의 드라빔을 훔쳤습니다. 그것을 수색하고 있는 라반 앞에서 뻔한 거짓말을 합니다. 말 안장 속에 그것을 감추고서 경수가 나서 말 위에서 움직일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이 통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 역사가 여기 히브리인 산파들의 경우에도 임하고 있습니다. 바로가 입맛을 다시다가 그냥 산파들을 돌려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산파들에게 그 집안을 번창하게 해주는 복을 주십니다(1:21). 그 복은 산파들에게만 준 것이 아닙니다. 산파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사내아기를 살리게 되는 히브리인 모두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 표현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이스라엘)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1:20). 일찍이 아브라함이 복의 통로가 됩니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복이 이 땅에 흘러 넘치게 됩니다(12:2-3).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였기 때문입니다(22:12-14). 그 가문에서 훗날 여호와 이레의 큰 복으로서 메시아가 나타나게 됩니다. 여기서는 히브리인 산파 십브라와 부아가 마치 아브라함과 같습니다. 그녀들이 하나님을 바로보다 더 경외하였기에 복의 통로가 되고 있습니다. 그녀들의 집안만 번영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두 번성하며 강해지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