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출애굽기 강해 제6강(출1:22-2: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3. 10. 21:28

출애굽기 강해 제6(1:22-2:3)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526()

 

애굽 제국의 황제인 바로의 이스라엘 민족 말살정책(1:22)

 

오늘 날 흔히 인종청소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민족에 대한 말살정책이 고대 애굽의 신 왕국 시대에 자행이 되고 있습니다(1:15-22). 왜 함족의 통일왕조인 신 왕국이 이스라엘 민족을 말살하려고 할까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신 왕국의 성립과 셈족 탄압정책의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째로, 나일강 중류 테베에서 발흥한 함족의 제17왕조는 상()이집트 전 지역을 지배하면서 BC 16 세기에 들어서자 하류 멤피스에 자리를 잡고 있는 하()이집트 곧 셈족인 힉소스 인들의 왕조를 압박하게 됩니다. 힉소스인들은 본래 동쪽의 사막과 광야에서 살고 있던 유목민이며 셈족입니다. 그들의 힘이 BC 18세기부터 강해진 것은 여러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戰車, 전쟁용 마차)와 강궁(强弓, 강력한 전투용 활)을 개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옥한 나일강 유역을 차지하고자 BC 17세기에 침입을 했습니다. 때마침 애굽 제국은 분열이 되어 그 힘이 약화되어 있는 제2중간기 시대였습니다. 힉소스인들은 BC 1,663년경에 가장 비옥한 나일강 하류 삼각주 지역을 차지하고서 애굽 제15왕조를 열게 됩니다. 함족은 셈족의 지배하에 들어가거나 나일강 중류와 상류로 흩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자 함족인 애굽인들도 전차와 강궁을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테베에서 힘을 모아 상이집트 왕조를 만들고 하이집트 힉소스인들과 전쟁을 시작한 것입니다.

둘째로, 함족과 셈족 사이의 전투는 날로 치열해져서 제17왕조 말기에 절정에 달하게 됩니다. 마지막 왕인 카모세(Kamose)3년만에 죽자 그의 동생인 전쟁영웅 아흐모세(Ahmose, 일명 달의 탄생)1세가 BC 1,570년에 왕위에 오릅니다. 그는 하이집트의 힉소스인들을 몰아내고 천하를 통일하면서 제18왕조를 개창하게 됩니다. 아흐모세1세는 사막의 왕자인 힉소스인들이 애굽으로 쳐들어오기 이전부터 역시 셈족인 이스라엘 족속이 고센 땅에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47:6, 11-12). 실제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애굽으로 이민을 온 해가 힉소스인들보다 무려 213년이나 앞선 BC 1,876년경이기 때문입니다(46:6-7, 47:5-6). 그러므로 애굽 땅에서 힉소스인들을 쫓아내고 있는 아흐모세1세도 이스라엘 자손들의 애굽 잔류를 허용했습니다.

셋째로, 그러나 문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큰 민족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1:7). 그래서 아흐모세1(BC 1,570-1,546)는 이스라엘 민족을 강력하게 통제하고 그 힘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그들을 노예화했습니다. 그렇지만 학대를 받을수록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민족의 수가 더 늘어났습니다(1:12). 따라서 부왕 아흐모세1세의 통치말기에 5년간 대리청정을 한 것으로 보이는 후임 왕 아멘호텝1(BC 1,551-1,524)는 안보적인 측면에서 더 큰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그는 드디어 이스라엘 민족의 말살정책을 추진하게 됩니다. 아멘호텝1세는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에게 히브리 여인이 사내아기를 낳으면 아기를 죽이라고 명령합니다(1:15-16). 그러나 그녀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황제의 명령을 교묘하게 회피하고 있습니다(1:17-21).

넷째로, 아멘호텝1세 말기에는 전쟁영웅 아흐모세1세의 사위이며 역시 유능한 장군이었던 투트모세1세가 대리청정을 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처남매부 사이의 공동통치입니다. 투트모세1세는 무인답게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말살정책을 한층 강화합니다;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1:22). 그때부터 함족인 애굽인들은 눈에 불을 켜고서 셈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내아기를 찾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집에서 신생아로 사내아기가 태어나기만 하면 곧바로 압수하여 애굽 강에 던져버리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잔인한 민족 말살정책의 시행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제 한 세대만 지나게 되면 이스라엘 민족의 종자가 모두 사라질 위기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 현장에 개입을 하십니다. 그래서 우선 악한 투트모세1세부터 처단을 합니다. 그는 BC 1,524년에 즉위하여 6년만에 일찍 죽게 됩니다. 그것은 훗날 유대 땅에서 사도들을 탄압하던 헤롯 왕가의 왕들이 모두 일찍 권좌에서 축출되는 것과 같은 현상입니다(2:1-16, BC 4년경 베들레헴 지경에서 아기를 살해한 헤롯대왕이 그 해에 권좌에서 쫓겨남, 12:1-6, 20-23, 헤롯 대왕의 손자인 아그립바1세가 사도 야고보를 죽이고 교회를 탄압했다가 그 해 AD 44년에 급사하게됨). 그 결과 강경한 사내아기 살해정책은 상당히 약화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대를 이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투트모세1세의 셋째 왕자이며 서자인 투트모세2(BC 1,518-1,504)가 왕위를 이어받게 됩니다. 그는 두 형이 먼저 죽었기에 황제가 되는 행운을 얻습니다. 하지만 정치적인 입지가 약합니다. 따라서 정식 공주이며 이복 여형제인 핫셉수트 공주와 정략결혼을 하게 됩니다.

 

민족말살정책의 와중에서 태어나고 있는 모세와 갈대상자(2:1-3)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이 있었던 해는 BC 1,446년으로 계산이 됩니다; “솔로몬 대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한 해가 BC 966년경인데 그때가 출애굽이 있은 지 480년 후입니다(왕상6:1). 따라서 출애굽의 해는 BC 1,446년경이 됩니다”. 출애굽 당시 모세의 나이가 80세입니다(7:7). 그러므로 모세는 BC 1,526년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때는 애굽의 역사에 있어서 아멘호텝1세와 투트모세1세의 정권교체가 있기 2년 전입니다. 그 당시 두 사람은 애굽 제국을 공동으로 통치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리고 투트모세1세의 정실부인 곧 위대한 아흐모세1세의 정식 공주에게서 태어난 공주 핫셉수트가 서자출신인 왕자 투트모세2세보다 그 정치적인 힘이 훨씬 강할 때입니다. 그 결과 핫셉수트는 나일 강에서 히브리인 아기를 구해내고 그 아기의 준수함을 보고서 자신의 양자로 삼을 수도 있었다고 하겠습니다(2:5-10).

그와 같은 미묘한 정세의 흐름을 하나님께서는 모두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말살정책이 강력하게 시행이 되고 있는 한가운데에서도 다음과 같이 은밀하게 구원의 역사를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레위 지파의 족장 아므람이 막내 고모인 요게벳과 결혼을 하여 딸과 두 아들을 얻고 있습니다(2:1-4, 6:18-20, 7:7, 15:20). 첫째가 딸이므로 애굽의 치하에서도 별다른 박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장남 아론을 얻을 때에는 다소 위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 산파들이 눈을 감아 주었기에 무사히 넘어갔습니다(1:17). 그런데 둘째 아들을 낳을 때에는 정말 위험했습니다. 이제는 히브리 산파가 문제가 아닙니다. 애굽 사람의 눈에 사내아기를 낳은 것이 발각이 되면 애굽 강에 던져져서 익사를 당할 형편입니다(1:22). 그래서 3개월 동안 아기의 울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아니하도록 마음을 졸이며 숨겨서 키웠습니다(2:2). 하지만 더 자라게 되자 숨기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부모는 하나님에게 기도를 했습니다. 창조주께서 보호해주시기를 간절히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아기의 운명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드리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삭의 운명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면서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던 아브라함의 모습을 다시 보는 것과 같습니다(22:1-8). 부모는 눈물을 머금고 아기를 갈대상자에 태워서 나일 강 갈대 사이 물 위에 띄웠습니다(2:3)”. 그 아기를 하나님께서 살리실 것입니다. 이삭의 목숨을 여호와 이레의 축복으로 살리신 것과 동일한 은혜가 역사 가운데 임할 것입니다(22:10-14).

  참고로, 갈대상자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바깥에 역청을 발라서 방수를 하고 있습니다(2:3a). 노아의 방주에 안팎으로 역청을 칠해서 방수를 한 것과 동일합니다(6:14). 둘째, 안쪽에는 나무의 진을 칠하고 있습니다(2:3b). 그 이유는 역청의 냄새가 역하기에 가급적 안쪽에는 향내가 나는 나무의 진을 사용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애굽에서는 석유가 많이 생산되지 아니하므로 역청의 사용이 옛날부터 흔하지 아니합니다. 따라서 나무의 진액을 대신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날 이락과 이란 그리고 사우디 아라비아 등이 산유국이지만 이집트가 산유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기서 미리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