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 제84강(히13:20-2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년 7월 20일(목)
주 예수를 부활시키신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여 복음의 일꾼으로 사용하시고 천국으로 불러 주시기를 히브리서의 저자가 축원하다(히13:20-21).
본문은 히브리서 저자의 성도들에 대한 축도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의 하나님만이 언급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초대교회의 축도문으로서 원형이 되고 있는 사도 바울의 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3)와 비교하면 명문으로는 ‘성령님의 교통하심’에 대한 은혜가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의 글 제9장 제14절의 내용을 참조하여 본문의 말씀을 다시 음미해보면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히브리서 저자의 글 속에 담겨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히브리서 제9장에 기록되어 있는 성령님의 역사가 다음과 같습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9:14).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시간적으로는 약 2천년 전의 인물입니다. 공간적으로는 고대사회 가나안 땅 선민 유대인들의 사회에서 활동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도 그때 골고다 언덕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가 살아서 온 세상 모든 성도들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죽은 행실을 살려서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게 만들 수가 있는 것일까요? 그 비밀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역사하심이라고 히브리서의 저자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상에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를 오늘날 성도들의 인생 가운데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그것이 모든 생명을 돌보고 살릴 수 있는 복음의 능력으로 역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 성령님의 교통하심입니다. 구체적으로 성령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임재하여 내주 역사하심으로써 성도들을 온전하게 주님의 제자로 그리고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히13:20);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히13:20a);
1) 흔히 예수님을 모든 목자들의 ‘목자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와 다르게 ‘큰 목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히13:20a). 그것은 히브리서의 저자가 주님을 ‘큰 대제사장’(히5:14)이라고 표현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2) 보통 ‘큰 스승’이라고 하면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는 많은 스승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스승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그 뜻이 그냥 그 자리가 얻어진 것이 아니라 동일한 사역을 한 결과 가장 뛰어난 성적을 보였으므로 그 자리를 얻게 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3)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공생애를 사시면서 영적인 목자의 일을 하셨습니다. 무리들에게 말씀의 꼴을 먹이시고 그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헌신하셨습니다. 그 결과 ‘큰 목자’가 되신 것입니다. 또한 백성들을 살리기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결과 ‘큰 대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4) 예수님의 탄생부터가 그러합니다. 에델 망대가 있는 들판에서는 예루살렘성전에서 사용하는 양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제물로 선택이 된 건강한 양들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북쪽으로 목자들과 함께 이동을 합니다. 그들이 중간에 머무는 곳이 베들레헴의 마구간입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태어나 양들의 냄새가 무성한 그 구유에 누워 계시는 것입니다(눅2:7).
5) 그 양들이 예루살렘성전에서 백성들의 속죄를 위한 제물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생애의 끝에 스스로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대속의 제물이 되십니다. 가축인 양들을 사용한 속죄의 제사는 그 효력이 일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원한 속성을 지니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드린 제사는 그 속죄의 효력이 영원성을 지니고 있습니다(히7:27-28).
6) 그러므로 여기서 ‘큰 목자’가 되기 위한 두가지 조건을 알 수가 있습니다; ①하나는 양들과 함께 생활을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실 때부터 마구간에서 그들과 함께하시고 계십니다. ②또 하나는 자신에게 보내어진 양과 같은 성도들을 살리기 위하여 그들의 영원한 속죄를 위하여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희생하셨다는 것입니다(요6:39, 10:11).
(2) “영원한 언약의 피로”(히13:20b);
1) 가축을 제물로 사용하는 제사에 있어서는 그 효과가 제한적입니다. 대제사장이 대 속죄일에 모든 백성들을 위하여 가축을 사용하여 그 피로 속죄의 제사를 지성소에 들어가서 정성껏 드린다고 하더라도 그 효과는 일년 동안의 죄만을 용서하는 것입니다(레16:29-34). 그러므로 다음해 대 속죄일이 되면 똑 같은 제사를 여호와 앞에서 반복해야 합니다.
2) 그와 같은 불완전한 속죄의 제사를 없애고 하나님 앞에 영원한 속죄가 가능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이 세상에 구속자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대속의 십자가를 스스로 지시고 그 피를 흘려 주십니다. 그 피에는 하나님 아들의 영원한 생명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 보혈이 하나님 아들의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에게 영원한 죄 사함의 은혜를 주고 있습니다.
3) 출애굽기 제24장에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언약식을 거행하고 있는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소를 잡아서 그 피로써 율법을 지키겠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굳게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의 피는 영원한 구속력을 가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피로 맹세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마음속으로부터 온전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데 실패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 반면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피로 세운 새 언약은 영원한 속성과 구속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새 언약을 발동시키고 돌아가시기 때문입니다. 3일만에 부활하시고 40일후에 승천하셨으니 백성들이 이 땅에서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다시 언약을 맺을 수 있는 방법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 가운데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대속의 십자가를 믿고서 회개한 그것이 마지막 구원의 기회입니다. 더 이상의 언약의 변개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서약한 그대로 실천하는 성도로서의 삶만이 필요할 따름입니다.
(3)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히13:20c); 인생의 모든 괴로움이 언제 끝나고 영원한 안식과 평강을 얻을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의 경우에는 무덤속에서 3일만에 아버지 하나님의 영생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그때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예수님처럼 환난을 당하고 고난 가운데 괴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 많은 고통 가운데 영원한 구원을 아버지 하나님께 주님의 이름으로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 기도가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때가 바로 우리 성도들이 남은 인생을 예수님을 닮은 목자로 그리고 주님의 인도를 받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끝까지 살아간 결과 평강의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우리를 영생으로 이끌어 내시는 그때입니다.
둘째로,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히13:21); 역시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히13:21a); 여기서 ‘모든 선한 일’은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살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일은 육신을 가진 인간이 온전히 실행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육신이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며 자신부터 먼저 살고자 하는 욕구가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인 공의의 정신을 행하며 그 청지기로서 온전히 피조세계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 능력이 성령님의 임재와 내주의 역사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온전히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도록 성령님께서 내주하여 진리의 말씀으로 일깨워 주시고 또한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일생을 본 받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2)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히13:21b); 히브리서의 저자가 축도를 하고 있습니다. 세가지의 대목으로 되어 있습니다;
1) 첫째가 “그 앞에 즐거운 것을”(히13:21ba)입니다; 구체적으로 누구 앞에 즐거운 것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하나님 보시기에 즐거운 것일까요? 아니면 성도들이 보기에 즐거운 것일까요? 정답은 영원히 즐거울 수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보기에만 즐거운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도 즐거운 것을 성도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실행하고 있을 때에 그것이 영원히 즐거운 것입니다. 요컨대, 내주하신 성령님께서 일깨워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는 그대로 예수님의 제자답게 실천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영원한 주님의 즐거움과 평강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주장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영적인 삶을 온전히 살아가면서 그러한 즐거움을 누리고 또한 영생의 몸을 입고 부활한 다음에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그 즐거움을 기쁨으로 누리라는 것입니다(요3:29).
2) 둘째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히13:21bb)입니다; 성도들에게 임재하여 내주 역사하시는 성령님께서는 독자적으로 다른 사역을 하시지 않습니다. 모든 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생애를 성도들에게 재조명해주고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말씀해석과 그 역사하심이 성경의 말씀이나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복음에서 어긋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혹자는 성령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셨다고 전제하면서 성경에서 벗어나고 예수님의 교훈과 생애에서 이탈하고 있는 말씀을 함부로 주장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히13:21bb)라고 하는 기준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삼위(三位)로 보이지만 그 의사결정과 말씀의 뜻에 있어서는 항상 동일하십니다. 그 이유는 인간들에게 육신을 입고서 완전하게 계시하신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그 생애를 기준으로 삼아서 말씀을 해석해주시고 또한 적용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3) 셋째가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히13:21bc)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우리 성도들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온전히 행할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여 달라고 히브리서의 저자가 축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히13:21c); 언뜻 보면, 히브리서의 저자가 잘못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 이유는 “영광이 하나님께”가 아니고 “영광이 그에게”라고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상한 대목에 대하여 깊이 묵상을 해보게 되면 한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삼위의 하나님을 각각이라고 하는 의미에서 일부러 ‘그’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삼위 하나님의 역사로 온전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동시에 의미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히브리서 저자의 축도는 다음과 같이 새겨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영광이 아버지 하나님께, 그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리고 놀랍게 역사하시는 성령님께 영원히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영원히 맛보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그러므로 아무쪼록 성도의 삶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로 온전히 살아가시면서 하늘의 영광을 이 땅에서도 미리 맛보시는 성도님들의 영적인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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