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히브리서 강해 제74강(히12:18-2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3. 3. 23:11

히브리서 강해 제74(12:18-20)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7 9(주일)

 

목숨을 아끼려고 간접신앙을 선택한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음에 대하여(12:18-20);

 

히브리서의 저자는 본문에서 선민 유대인들의 신앙상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크게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12:18-20 의역). 사실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 경외의 첫걸음이기에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두려운 것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준행하기 위하여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영생하시는 여호와를 믿고서 바친다고 하는 소위 아브라함과 같은 하나님 경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22:12). 그렇다면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의 여호와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이 가장 귀하게 여기고 있는 목숨과 육신적인 삶이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그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잘못하면 희생이 되어버릴 수가 있다고 하는 그 두려움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생의 여호와 또는 구원의 하나님을 믿고 있는 참된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자신의 목숨과 현세적인 삶을 절대적인 가치로 신봉하고 있는 어리석은 백성의 삶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는 전혀 질적으로 다른 그와 같은 어리석은 두려움이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대표적인 경우가 무엇일까요? 히브리서의 저자는 친절하게도 다음과 같이 네 가지의 사례를 본문에서 손꼽고 있습니다;

(1)  첫째,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 강림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한 경우입니다(19:10-16);

1)    당시의 기록이 다음과 같습니다; “너는 백성을 위하여 주위에 경계를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경계를 침범하지 말지니 산을 침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 그런 자에게는 손을 대지 말고 돌로 쳐죽이거나 화살로 쏘아 죽여야 하리니, 짐승이나 사람을 막론하고 살아남지 못하리라 하고 나팔을 길게 불거든 산 앞에 이를 것이니라 하라.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백성에게 이르러, 백성을 성결하게 하니 그들이 자기 옷을 빨더라.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준비하여 셋째 날을 기다리고 여인을 가까이하지 말라 하니라.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19:12-16).

2)    드디어 시내 산에 강림하신 여호와의 음성이 산 위에서 사람의 음성으로 산기슭의 백성들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19:19). 백성들은 그 음성 듣기를 원하지 아니합니다(20:19). 왜냐하면, 그 음성을 산기슭에서 듣고 있다가 잘못하면 경계를 침범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는 목숨이 날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 혼자만 산 위에 올라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산하여 자신들에게 가르쳐 달라고 요구합니다(20:18-21, 24:3, 5:23-27). 그것이 목숨을 유지하고 육신적인 삶을 유지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3)    그것을 여호와께서 보시고 어쩔 수가 없어서 허락을 하십니다(5:28-31). 그러나 모세는 그러한 간접신앙을 좋아하시지 아니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만나고 그 말씀을 직접 들을 때에 성도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것을 여쭈어 보고서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 친밀하게 인격적인 대화가 있어야 성도들의 믿음이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취지에서 모세는 훗날 다음과 같이 자신의 진심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1:29).  

(2)  둘째,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 생활을 하던 모세가 호렙 산에서 떨기나무 불길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경우입니다(3:1-6);

1)    80세의 노인 모세는 여전히 호기심이 많습니다. 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이나 단조로운 양치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양을 몰고서 미디안 광야 곳곳을 다녀보지 아니한 곳이 없는데 그날은 참으로 신기한 광경을 멀리서 보게 됩니다. 호렙 산 중턱 가시나무에 불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서 그 불이 곧 꺼지겠지 생각하면서 지나쳐 갔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진행하다가 이제는 불이 꺼지고도 충분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하고서 되돌아본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기이하게도 여전히 그 가시 떨기나무는 건재한 채 오로지 불길만 계속 타오르고 있습니다.

2)    그래서 모세는 호기심을 못 이겨서 산 중턱 그 불길 가까이 접근을 했다가 난생 처음으로 일렁이는 불길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현신을 보게 됩니다. 불꽃 가운데  사람의 모습을 한 하나님이 전혀 타지를 아니하고 자신에게 음성으로 말을 전해 오는데 모세는 모골이 송연합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3:4-6).

3)    이제는 더 이상 호기심천국이 아닙니다. 불에 타지를 아니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나타나셨으니 피조물인 자신이 말대답을 잘못하게 되면 즉시 죽임을 당할 처지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모세가 갑자기 두려워서 손과 팔로써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피조물이 본능적으로 느끼고서 자기도 모르게 취하고 있는 행동입니다. 요컨대, 모세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선 극도의 두려움을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3)  셋째, 공생애를 함께 지내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터져 나오자 두려워한 경우입니다(6:48-52);

1)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자 그 떡과 물고기를 얻어 먹은 무리들이 차제에 예수님을 자신들의 임금으로 삼으려고 의논들을 하고 있습니다(6:15). 예수님만 임금으로 모시면 장차 먹고 사는 문제는 저절로 해결이 될 것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하늘의 곳간을 열어서라도 먹을 것을 주시는 선지자 예수를 임금으로 모시는 것은 참으로 경제적으로 유리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움직임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를 진작에 피하십니다.

2)    그리고 제자들도 그러한 움직임에 동조하지 아니하도록 배를 태워서 갈릴리 건너편 벳새다로 먼저 가게 하십니다(6:45). 하지만 문제가 호수 중간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밤이 되자 광풍이 갑자기 일어나서 배가 뒤집힐 것만 같습니다(6:48). 제자들이 작은 배 위에서 위기에 처했습니다. 멀리서 그 광경을 보신 예수님께서 급히 호수 위를 걸어서 배 가까이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서 제자들이 혼비백산을 합니다. 그 어떤 선지자가 물위를 걷는 기적을 보여준 바가 있을까요?  단연코 없습니다. 히브리정경의 기록에도 없고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초유의 현상이 발생한 것입니다.

3)    그들은 처음에 헛것을 유령처럼 본 것이 아닌가 하여 자기 눈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접근을 해오자 유령이나 헛것이 아니고 스승이신 예수님이심을 인지하게 됩니다. 너무나 놀라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광풍 또는 뒤집힐 것만 같은 배보다 더욱 두려운 것이 물위를 달려오는 예수님이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무서운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그 앞에 말문을 닫고 심히 놀라고 두려워할 따름입니다.

4)    더구나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광풍이 잠잠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다른 모습으로 다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다같은 하나님의 능력인데 그 능력을 예수님이 능히 행하실 수가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금방 까먹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진작에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막상 자기 앞에 그러한 놀라운 일이 발생하게 되면 어안이 벙벙하고 두려울 따름입니다.

5)    참고로 마가복음의 내용을 옮겨봅니다;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물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4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 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6:47-52).

(4)  넷째, 호렙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 선지자 엘리야가 두려워서 얼굴을 가린 경우입니다;

1)    엘리야는 천사의 인도로 구운 떡과 물을 얻어 먹고 마시면서 호렙 산으로 가게 됩니다(왕상19:5-8). 그곳에서 여호와를 만나기를 원하며 어디에 계신가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여호와께서 계실 것으로 짐작한 곳에 하나님께서는 일체 계시지를 않습니다(왕상19:11-12). 예를 들면, 크고 강한 바람 속에도 아니 계시고 지진 가운데에서도 계시지를 않습니다. 그 다음에 불이 발생했지만 그 가운데에도 계시지를 않습니다. 어디에 계시는 것일까요?

2)    엘리야의 상상의 한계를 초월하여 세미한 소리로 여호와의 음성이 들려오고 있습니다(왕상19:12).  그러자 그 조그만 소리에 엘리야가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급히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 소리가 나고 있는 굴 앞에 서고 있는 것입니다(왕상19:13). 엘리야의 행동거지로 미루어 보아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보게 되면 피조물인 사람이 죽게 된다는 사실을 출애굽기의 내용으로 벌써 잘 알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또 이르시되, (모세)가 내(여호와의)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33:20).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을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침침함과 흑암폭풍나팔소리말하는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12:18-19a);

(1)  이미 모두(冒頭, 글의 앞머리)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대목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난 믿음의 선진들에 관한 기록들입니다. 다시 간략하게 요약을 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보이지 아니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질 수 있는 인자(人子)로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독생자의 영광을 내려 놓으시고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시고 성장을 하시자 제자들과 함께 공생애를 지내십니다. 그러므로 12사도들은 3 6개월간 함께 복음사역을 하면서 스승이신 예수님과 함께 자고 먹고 전도여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공생애를 통하여 정확하게 만질 수가 있도록 보여주신 것입니다.

2)    둘째, 불이 붙는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선지자는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그들이 호렙 산에서 그렇게 여호와를 만난 것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음성만 듣고서도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3)    셋째, 시내 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강림하실 때에 갓 출애굽한 백성들은 엄청나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시내 산 정상에 갑자기 빽빽한 구름이 둘러싸고 그 가운데 침침함과 흑암 가운데 여호와께서 임재를 하십니다. 그리고 큰 나팔소리가 들려옵니다. 나중에 음성으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소리가 전달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갑자기 두려움에 휩싸이고 있습니다. 그 음성을 듣고서 호기심에 경계를 침범하게 되면 죽임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4)    넷째, 폭풍 가운데 갈릴리 호수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밤중에 배를 타고서 벳새다를 향하여 진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가 폭풍이 발생한 것입니다. 배가 뒤집힐 것만 같은 위기가 찾아 옵니다. 그 모습을 멀리 호안가에서 보시고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서 다가 오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폭풍보다 예수님을 더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배로 더 접근을 하시자 폭풍이 잠잠해지고 있습니다. 폭풍까지 다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눈으로 보고서 두려워하지 아니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2)  히브리서의 저자는 믿음의 선진들처럼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그러한 두려움을 느끼고 여호와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일까요?

1)    그 이유는 대속의 십자가에서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희생하시고 3일만에 영생의 몸을 입고 부활하셔서 40일 후에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성도들이 그 제자가 되어 뒤따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더 이상 이 세상의 육신적인 삶이나 목숨유지에 급급해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2)    성도들은 이제 살든지 죽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을 계승하여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천국복음을 가르쳐서 예수님의 제자로 만들고 그들을 땅끝까지 파송하려고 합니다. 그와 같은 사명을 감당한 다음에는 주님께서 얻으신 그 영생의 부활에 참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그 소리를 듣는 자들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12:19b);

(1)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대교회의 성도들처럼 믿음의 성숙에 이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시기적으로 주님이 오시기 이전시대의 사람인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목숨을 대속의 제물로 바치고 영생의 부활과 승천을 얻는 광경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최고의 가치를 이 세상에서 부여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목숨유지와 이 세상에서의 안전한 삶입니다. 그에 따라 시내 산 정상에서 자신들이 서있는 산기슭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이 계속 들려오고 있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2)  그 소리를 더 자세히 들으려고 자기도 모르게 경계를 침범하다가 죽임을 당할 위험성이 다분합니다. 안전한 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따라서 백성들은 모세에게 간절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부디 여호와께 잘 말씀을 드려서 하나님이 직접 백성들에게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그만두게 해주십시오. 그 대신에 모세 당신이 홀로 시내 산 정상에 올라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하산하여 가르쳐주십시오, 그러면 그 말씀을 철저하게 준행할 것입니다”. 그렇게 직접신앙이 아니라 간접신앙이 유대교에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셋째로,이는 짐승이라도 그 산에 들어가면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지 못함이라”(12:20);

(1)  히브리서의 저자는 친절합니다. 혹시 성도들이 간접신앙을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할까 싶어서 다시 부연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시내 산에 강림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가까이 접근을 하게 되면 산 기슭의 경계를 침범하는 즉시 사람이거나 짐승이거나 모두 살려 두지를 말고 죽이라고 하는 여호와의 엄중한 명령이 이미 내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공연한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기 위하여 소위 간접신앙이라고 하는 대안을 마련한 것입니다”(12:20 의역).

(2)  그러나 간접신앙의 폐해는 역사적으로 심각합니다. 소수의 유대교지도자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면서 이기적인 선민사상으로 그리고 현세적인 축복사상으로 각색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고 율법교육을 시킨 것입니다. 하나님말씀에 대한 유권해석의 권한을 모세 때부터 종교지도자에게 위임해버렸기에 백성들은 그 폐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3)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하나님께서 계속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선지자들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게 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 말씀의 정확한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간접신앙에 젖어 있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선지자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지를 않습니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각생이 되어 있는 유대교리와 율법이 더 익숙하고 좋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십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5:38-39).

결론적으로, 모세와 같은 종교지도자가 전해주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받아들이고 신정국가를 운영하던 간접신앙의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종식이 되고 있습니다. 그 옛날 목숨이 아까워서 모세를 시내 산에 홀로 올려 보내고 그가 하산하여 전해주는 율법을 하나님말씀으로 무조건 따르던 시대가 지나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누구나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배우는 한편 그리스도의 생애를 닮도록 그 제자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직접 아버지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하면서 히브리정경에 기록된 말씀의 본뜻을 깨달으시고 그것을 천국복음으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인 성도들도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모르는 대목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 답변을 들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깨달은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처럼 살아갈 때에 천국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고 또다른 예수님의 제자들을 양육할 수 있게 됩니다. 그와 같이 목숨과 생애를 바쳐서 예수님처럼 사명을 감당하다가 성도들이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나라에서 영생을 누리는 것이 직접신앙의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그러한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