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히브리서 강해 제67강(히11:36-3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3. 1. 00:32

히브리서 강해 제67(11:36-3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7 2(주일)

 

구약의 시대 믿음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받고 있는 고난에 대하여(11:36-38);

 

히브리서의 저자가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은 초대교회 시대의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시대의 것으로 한정이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의 저자가,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그리스도)을 받지 못하였으니”(11:39)라고 기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히브리서 제11장에 등장하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의 이름은 전부 히브리정경에 등장하고 있는 인물들이 맞습니다(11:4-32). 그런데 그들의 고난의 모습에 대한 묘사는(11:35-38) 초대교회의 성도들에 대한 박해의 모습과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특히 제35절의 내용,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11:35b)라고 하는 기술은 사도 바울과 여러 순교자들의 부활신앙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사건들의 발생시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이전 시대 곧 약속된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아직 받지 못한 시대라고 한정하는 것이 역시 전후가 맞는 해석입니다. 그렇지만 한가지 지적할 수 있는 사실은 히브리정경상에 등장하고 있는 하나님신앙인들 그리고 그 전통을 잇고 있는 믿음의 용사들의 활약상은 실로 대단한 것으로 평가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도 자신의 견해를 괄호 속에 넣어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11:38a)고 적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두가지의 의문사항이 남게 됩니다; ①하나는 마치 사도 바울과 같은 부활의 신앙을 생생하게 지니고 있는 구약상의 인물이 과연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②또 하나는, “톱으로 켜는”(11:37) 극형을 히브리서의 저자가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이 언제 어디서 발생한 것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2천년 가까이 지난 고대 시대의 기록이므로 역사적으로 그 기록의 사실관계를 고증(考證)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고대 문건에 의하여 정확하게 고증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저자가 나름대로의 정보를 가지고 구약의 시대에도 믿음으로 고난을 통과하면 바로 부활을 얻는다고 하는 신앙관이 존재했으며 또한 톱으로 사람을 처형하는 끔찍한 극형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정도의 역사적인 사실과 고증상의 공백을 염두에 두고서 본문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먼저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그 옛날 갈릴리 지역에서 성행했던 열심당에 대한 탄압의 모습이 먼저 보이고 있습니다(11:36);

1)    예수님께서 성장하신 나사렛은 그 옛날 스불론의 땅입니다. 그리고 갈릴리의 수도인 가버나움은 그 옛날 납달리의 땅입니다. 그 지역들은 예루살렘에서 먼 변방이기에 별로 역사적으로 빛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9:1). 그런데 헬라시대를 거치면서 갈릴리 호수 동편에는 이방인들이 집중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찍부터 갈릴리 지역은 다민족이 함께 살고 있는 관계로 유대교인들도 다양한 정보를 접하고 있으며 상당히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2)    그러한 지역적인 여건이 사실상 유대교의 개혁과 개방을 부르짖고 있는 예수님의 천국복음과 만민구원사상에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갈릴리 지방이 복음의 빛을 먼저 받고 그 빛을 이방 땅에 비추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9:1-2). 아울러 외세에 저항하는 열심당원들의 중요한 활동무대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갈릴리에서 활동하던 열심당원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열심당원 가운데 당국에 잡히고 고문과 처형을 받고 있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에 대한 묘사가 본문 제36절과 제37절 전반부인 것으로 보입니다.

3)    세례 요한 역시 열심당과 비슷한 행동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메시아가 오시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몰아내고 그 옛날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 믿음은 열심당원의 신념과 비슷합니다. 세례 요한은 그렇게 믿고 사고하는데 그치지를 않습니다. 그는 메시아가 그 일을 빨리 실천할 수 있도록 앞길을 터주기 위하여 스스로 고난의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갈릴리의 선민 유대인들을 지배하고 있는 이두매 족속의 분봉 왕인 헤롯 안디바에게 도전한 것입니다. 안디바의 도덕적인 잘못과 율법위반을 지적하다가 감옥생활을 하게 됩니다(3:19-20). 그는 멀지 않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헤롯 왕가를 물리치고 자신을 구원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2)  둘째, 고행주의를 선택했던 엣세네 파의 모습이 보이고 있습니다(11:37b-38);

1)    주전 2세기 후반에 레위인들이 앞장을 서서 시리아로부터의 독립전쟁을 수행합니다. 그 결과 유대 땅에 하스모니안 왕가가 성립이 됩니다. 그러자 레위인들 가운데 세 부류가 발생하게 됩니다; ①첫째, 하스모니안 왕가에 참여하여 종교적인 권력을 얻으려는 사두개파. ②둘째, 히브리정경과 히브리사상을 연구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백성들로부터 존경과 영적인 권위를 얻으려는 바리새파. ③셋째, 속세를 떠나서 영성훈련과 금욕주의 고행을 선택한 엣세네파 등입니다.   

2)    그 가운데 광야, 외딴 섬 또는 오지의 동굴을 찾아 들어가서 스스로 고행과 경건훈련을 한 엣세네 파의 생생한 모습이 본문 제37절 후반부와 제38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한 전통은 이 세상에 훗날 세가지의 유익을 가지고 옵니다; ①첫째, 그들이 사용하던 히브리경전이 훗날 사해사본으로 발견이 되고 있습니다. ②둘째, 세례 요한이 그와 같은 고행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3:3-4, 1:80). ③셋째, 기독교가 로마황제에 의하여 공인이 되고 정치적인 박해가 사라지자 일부 white martyr’를 선택한 자들이 정치적 권력에 의존하는 기독교에 반대하여 그 옛날 고행주의를 되살린 것입니다. 그것이 훗날 수도원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또 어떤 이들은 조롱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11:36);

(1)  현실정치는 권력관계로 파악이 되고 있습니다. 권력이 강한 쪽이 약한 쪽을 지배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기존의 권력의 구조를 부정하고 변경을 시도하는 경우에는 가차없는 탄압과 징벌이 가해집니다. 따라서 가나안 일대에서는 외세인 로마의 군정을 물리치고 헤롯왕가를 축출하고자 시도하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 가운데 특히 열심당원들에 대하여 체포령이 내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체포를 당하게 되면 감옥살이를 할 뿐만 아니라 온갖 조롱과 매질을 당하게 됩니다. 감히 변방의 소수민족 출신들이 겁도 없이 독립을 꿈꾸고 로마황제의 통치에 반대하였으니 그것은 현실적인 감각이 없는 미련한 자의 소행이라는 비웃음입니다. 그와 같은 냉소와 조소가 이 글에서 들려오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2)  경우는 다르지만 예수님의 사례에 있어서도 이 글의 기록과 같은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의 실력자들이 수하들을 이끌고 한밤중에 겟세마네 동산으로 예수님을 긴급 체포하고자 출동을 하고 있습니다(22:52-53). 어두운 밤이지만 예수님의 인상착의를 잘 알고 있는 가룟 유다가 길잡이를 하고 있으므로 체포가 쉽습니다(22:47-48). 예수님은 이제 대속의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절차인 줄 아시고 순순히 응하십니다. 그 다음에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모욕과 조롱 그리고 로마군인들에게 넘겨져서 당하는 매질 등이 복음서에 소상하게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22:63-65, 23:11, 16, 33).

(3)  정치적인 문제이든지 아니면 종교적인 문제이든지 상관없이 이 세상에서는 현실적인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자들이 약한 자들을 탄압하고 말을 듣지 아니하면 처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목숨과 육신에 대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 영혼까지 처벌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10:28). 사람의 영혼과 영원한 생명에 관하여서는 그 심판의 권한이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장악이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깨닫고 그대로 실천한 성도들에 대해서는 영생의 상급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뜻을 자의적으로 왜곡하거나 외면한 자들에 대해서는 영벌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25:34, 41, 5:29). 히브리서 저자는 본문에서 그 사실을 말하고 싶어 합니다.

둘째로,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琉璃, 먹고 사는 터전을 잃어버리고 떠도는 것)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11:37);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칼로 죽임을 당하고”(11:37a); 세가지 잔인한 처형의 방법이 열거가 되고 있습니다;

1)    돌로 치는 것은 인민재판에 의한 처형의 방법입니다. 특히 율법국가인 이스라엘에서는 그렇게 처형하도록 많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의 자식을 몰렉에게 주면 반드시 죽이되, 그 지방 사람이 돌로 칠 것이요”(20:2), “남자나 여자가 접신하거나 박수무당이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곧 돌로 치라.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20:27). 예수님께서도 그 방법을 준용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8:7). 그것은 백성들이 참여하여 돌로써 율법을 어긴 자를 처형함으로써 스스로 율법을 두려워하고 준행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하고자 하는 방법입니다. 그와 같은 끔찍한 방법을 주후 20세기에도 일부 공산사회에서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2)    톱으로 켜는 것은 굉장히 생소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처형방법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해주고 있는 고대의 문건을 발견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다만 중세시대 유럽에서 그러한 형벌이 있었다고는 합니다.  

3)    시험칼로 죽임을 당하는 것은 심문자의 의도대로 죄인이 변절을 하고 전향을 하는 경우에는 살려 주고 끝까지 자신의 소신을 지키겠다고 심문자의 요구를 거절하게 되면 참형에 처하는 방법입니다. 일종의 회유의 방법을 함께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로마총독인 빌라도가 자신의 말을 들으면 살려주겠다고 제의를 하고 있습니다(19:10-12). 그렇지만 줄기찬 유대교지도자들의 정치적인 압력 때문에 성공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19:13-16).

(2)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琉璃, 먹고 사는 터전을 잃어버리고 떠도는 것)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11:37b);

1)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선민우월사상과 선민만의 축복사상으로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 독점사상과 이기적인 구원론 그리고 현세주의적인 축복사상을 여호와께서는 싫어하십니다. 그것은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정면으로 어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지자들을 계속 파송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본뜻을 외치게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선민들이 그 선지자들의 소리를 듣기를 싫어합니다. 따라서 선지자들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2)    그 뿐만이 아닙니다.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아예 여호와의 말씀을 버리고 우상문화에 빠져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선지자들을 파송하여 그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라고 외칩니다. 선민들은 그 소리를 듣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정치적인 권력자들이 종교적인 권력까지 차지하고서 아예 군대를 보내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체포하고 처형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이 도망을 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본문의 기록과 같다고 하겠습니다(11:37b).

3)    그와 같은 경우를 북조 이스라엘 아합 왕 시대에 생생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바알 우상을 섬기는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에게 쫓기게 된 선지자 엘리야가 친지들을 찾아가서 몸을 숨기려고 합니다(왕상19:1-2). 하지만 모두들 우상문화에 빠져서 아무도 그를 숨겨주지를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엘리야는 남쪽 유다 왕국으로 피신합니다. 그 모습이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琉璃, 먹고 사는 터전을 잃어버리고 떠도는 것)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11:37b)와 비슷합니다. 가나안 남부 브엘세바에서 기진맥진하여 죽기를 소원하고 있는 엘리야를 하나님의 천사가 먹고 마실 것을 주고서 하나님의 산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왕상19:3-8).

4)    환난과 학대를 받은 경우는 아니지만 스스로 짐승의 가죽으로 된 옷을 입고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신앙훈련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그들이 소위 엣세네 파입니다. 그들의 모습의 일단을 세례 요한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3:4),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1:80).

셋째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동굴토굴유리하였느니라”(11:38);

(1)  히브리서의 저자는 심정적으로 엣세네 파의 금욕생활과 고행에 대하여 응원을 보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구약상의 믿음의 선진들 가운데 초대교회 당시까지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자들이 광야와 사막 그리고 산에서 동굴생활을 하면서 여호와의 신앙을 굳건하게 지키고 경건운동에 힘쓰고 있는 엣세네 파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세례 요한의 모습도 마치 엣세네 사람과 같은 금욕주의 고행수련자와 같은 것입니다.

(2)  세월이 많이 흐르게 되면 주후 324년에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유일한 국교로 선언이 됩니다. 초대교회의 박해가 끝나고 로마제국의 백성들이 모두 교회에 들어오게 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 결과 교회의 기존 성도들은 10배가 넘는 새 신자들을 받아 들이고 신앙훈련을 시키는데 있어서 역부족을 느끼게 됩니다. 자연히 이방신과 동방의 우상문화가 로마의 기독교의 순수성을 오염하게 됩니다. 그때 로마 기독교의 정치적인 야합을 질타하면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새로운 순교자가 되고자 나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것이 그 옛날 엣세네 파의 전통입니다. 역사적으로 그들의 줄기에서 훗날 수도원 운동이 일어난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흔히 초대교회사는 로마제국의 박해와 핍박의 연속이며 그 피해가 엄청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시대를 연구하고 있는 역사학자들의 견해는 다릅니다. 그렇게 계속적인 박해가 아니며 그 피해가 생각보다는 크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박해와 환난의 시대에 기독교가 더욱 성장한 것은 사실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순교자의 피를 먹고서 자라나고 꽃을 피우고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구약상의 믿음의 선진들이 항상 정치적 종교적 권력자들로부터 배척을 받거나 탄압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히브리서의 저자가 기술하고 있는 내용이 과장된 것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어려운 환경 가운데 타협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며 영생의 천국을 소망하면서 믿음을 지킨 선진들이 하나같이 후세에 믿음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귀중한 증거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의 성도들도 자신의 인생을 통하여 믿음이 무엇인가를 후손들에게 보여주는 신앙생활을 영위해야만 합니다. 구체적으로, 성도들이 세상 끝까지 나아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현지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여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그러한 믿음생활을 끝까지 영위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