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히브리서 강해 제64강(히11:27-29)(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2. 27. 00:35

히브리서 강해 제64(11:27-2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6 29()

 

모세는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어떻게 이스라엘 자손들을 인도하고 있는가?(11:27-29)

 

히브리서의 저자는 본문에서 모세가 개인적으로 또는 민족적으로 애굽을 탈출한 것(11:27),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집안구원을 받도록 조치한 것(11:28),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라고 말한 것(11:29) 등이 모두 믿음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 것일까요? 모든 것을 그렇게 믿음이라고 하는 한 마디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가 있는 것일까요? 잘못 이해를 하게 되면 만사를 믿음으로 해결하면 된다고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믿음을 활용하려고 할 것입니다.

적어도 본문에서 히브리서 저자가 진정 말하고 싶어하는 믿음의 의미는 그러한 맹신이나 광신주의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간략하지만 다음과 같이 당시의 상황을 분석해 봄으로써 과연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믿음인지를 한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모세는 출애굽을 두 번 하게 된 인물입니다; ①먼저 40살이 되었을 때 모든 권력을 잃어버리고 바로인 투트모세3세의 체포령을 피하여 애굽을 탈출한 것입니다(2:11-15, 7:23-30). 그후 40년간 아라비아 서북부 미디안 땅에서 그곳의 제사장 이드로의 사위가 되어 양치기 생활을 하게 됩니다. ②그 다음에는 80세가 되었을 때 미디안 서부 호렙 산에서 여호와의 부름을 받고 애굽으로 들어가서 동족의 출애굽에 성공한 것입니다(3:1-12, 7:7, 12:37-42). 그렇게 두번의 출애굽을 하게 되는 모세에게 있어서 본문 제27절 말씀,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11:27)라고 하는 구절은 과연 어디에 해당하고 있는 것일까요?

1)    첫째, 개인적으로 출애굽을 하게 되는 경우로 보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먼저 모세가 작성하고 있다고 여겨지고 있는 출애굽기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2:11-12). 모세가 비록 지난 40년간 애굽의 황제인 바로의 궁전에서 자라나 권력자로 군림하고 있지만 그는 양어머니인 핫셉수트를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은밀하게 친가인 레위 지파 그리고 히브리인들을 도와주고 있는 인물입니다.

2)    그렇다면 모세는 다음과 같은 이중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①하나는 친가 쪽으로 보게 되면 여호와를 섬기는 민족 히브리인의 사상에 동조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애굽의 황궁에서 영화를 누리는 것보다 여호와를 섬기는 동포가 더 좋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②또 하나는 그 반면에 애굽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는 배신자이며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한 인물이 과연 하나님의 사람이나 선지자가 될 수 있을까요?

3)    모세가 지니고 있는 더 심각한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폭력과 무력을 사용하여 자신의 동족을 돕겠다고 하는 사고방식입니다”. 피의 악순환을 불러오게 되는 그러한 방법으로 과연 하나님이 뜻이 실현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럴 수가 없기 때문에 그에게 개인적으로 출애굽을 한 후 미디안 광야에서 처가살이를 하면서 양치기로 늙어가는 40년의 세월이 있게 됩니다.

4)    둘째, 민족적으로 출애굽을 하게 되는 경우로 보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80세의 노인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의 지팡이 하나만을 의지한 채 애굽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4:17-20). 과연 꿈과 같은 여호와의 약속이 현실적으로 애굽에서 실현이 될 수 있을까요?(3:7-12)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의 출애굽이 가능할까요? 숙명적으로 부딪쳐 보아야할 과제입니다.

5)    그렇지만 세상적인 상식과 막강한 애굽제국의 위력과 군사력에 비추어 보게 되면 그 사명은 분명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점을 히브리서의 저자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11:27).

6)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자격을 하나 갖추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제국인 애굽의 황제 바로의 진노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창조주 여호와를 더 두려워하며 경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무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주 여호와의 뜻이 성취가 될 것임을 믿고서 그 약속을 의지하여 행동에 나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히브리서의 저자가 진정 말하고 싶어하는 믿음의 의미입니다.

7)    따라서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여 세상이 두렵지 아니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세상지배자의 권력과 진노가 두렵습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창조주 여호와의 말씀을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세상임금의 뜻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자신의 인생과 이 세상의 역사가 진행이 되어 나갈 것임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50:24-25, 12:29-42, 12:31-32). 그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10:28).

(2)  둘째, 유월절 사건의 의미와 문제점이 무엇일까요?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날 밤에 죽음의 천사를 보내어 모든 애굽의 장자와 가축의 초태생을 전멸시켜 버리시겠다고 하십니다(11:4-6). 그 죽임을 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날 저녁에 일찍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대문의 문인방과 좌우 기둥에 발라 두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1:7, 12:6-7, 21-24).

1)    그 말씀대로 그날 밤에 죽음과 삶의 심판이 발생할까요? 그리고 어린양의 피가 죽음의 천사를 물리치는 능력으로 역사할까요? 모세는 그러한 의심을 일체 하지 아니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의 기록에 그러한 의심의 흔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최초의 유월절과 관련하여 다른 문제를 하나 검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애굽의 장자를 모조리 죽이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이며 하나님의 역사섭리의 방법인가 하는 것입니다.

2)    그 조상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중시하였다고 하여 그 자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무조건 이방민족을 말살하고자 드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일까요? 그렇다면 그러한 하나님은 창조주의 피조물 사랑을 운운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창조주가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전부 살리고자 하는 공의의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더구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위하여 구원주를 이 세상에 보내신다고 선전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3)    요약을 하자면, 선민 이스라엘 자손만을 구원하고 기타 선민들을 괴롭히고 있다고 보이는 주변국과 모든 이방인들을 진노와 멸망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원칙이 아니라 선민들만의 정의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선민우월사상과 선민구원사상에 불과합니다. 온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생각은 결코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믿음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믿음이란 애굽의 장자를 치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여호와의 마음을 발견하는 영적인 안목입니다”.

4)    당장은 선민 이스라엘을 대대로 노예로 부리고 있는 그들을 징벌할 수밖에 없지만 나중에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보내어 그들을 고치고 구원할 것이라고 하는 약속을 성취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결심을 발견하는 것이 믿음입니다(19:22-25). 그것이 세상 구원이며 복음의 메시지이기 때문에 결국 믿음이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진심이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9:6, 11:10-12, 3:16-17, 6:38-40). 결론적으로, 믿음이란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사역을 떠나서는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히브리서의 저자가 벌써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11:26)고 모세의 믿음의 특징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3)  셋째, 홍해사건의 의미와 문제점이 무엇일까요? 유월절 사건의 의미를 선민구원, 이방인 심판이라는 이분법으로 보게 되면 하나님의 공의와 진심을 오해하게 된다는 사실을 위에서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이제 홍해사건을 가지고 동일한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1)    첫째,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은 대대로 유월절 사건을 아전인수격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만을 원하시는 자신들의 수호신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 밤에 애굽의 모든 장자와 가축의 초태생을 치시는 가운데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대문에 바른 선민들은 그 속죄의 제사를 통하여 구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 예루살렘성전에서 매년 태양력으로 10 10일에 드리는 대 속죄일의 제사를 중시하고 있습니다(16:29-34).

2)    대제사장이 희생양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까지 들어가서 자신과 모든 백성들의 죄에 대하여 사죄를 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하면 그 가축의 제물의 피가 효력을 발휘합니다.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고 일년 동안 지은 선민들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대사면령을 매년 받을 수 있으니 율법과 제례의식을 가진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야 말로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야곱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러한 장치가 없는 이방인들은 모두 여호와의 진노의 자식들이며 멸망의 대상들입니다. 여호와의 심판이란 이방인들이 그 대상입니다. 선민 이스라엘은 심판을 받지 아니하고 오로지 그날에 구원만을 얻을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3)    둘째, 이방인들의 반론에 대하여 그 입을 막고 있는 것이 홍해 사건입니다. 유월절 사건보다 더 생생하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밤의 초상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접 애굽사람의 죽음을 그날 밤에 목격한 것이 아닙니다(12:29-30). 그러나 홍해사건에 있어서는 그 수많은 애굽의 추격군대가 모두 홍해바다에 수장이 되고 마는 광경을 직접 목격한 것입니다(14:28-30). 그렇게 생생하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적처럼 홍해바다를 갈라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살 길을 마련해주시고 반대로 그 바닷물을 다시 합쳐서 흐르게 하여 애굽의 군대는 몰살시켜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듯이 선민 이스라엘을 편애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뿌리깊은 유대교의 선민만의 구원사상입니다.

4)    셋째,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선지자들의 외침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피조세계를 보시고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돌보고 피조세계를 선하게 관리하는 것을 보고서 심히 좋아하십니다(1:31). 그렇게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살리는데 헌신하라고 선민과 성도들을 부르신 것입니다(19:4-6, 16:24, 28:18-20). 그와 같은 뜻이 선지자들의 외침을 통하여 전해지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복음과 대속의 죽으심을 통하여 생생하게 성취가 되고 있습니다.

(4)  결론적으로, 여호와에 대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의 뜻이 그리스도를 통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 위에 초대교회가 서있으며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영위되고 있다는 사실을 히브리서의 저자가 오늘날에도 본문 모세의 기사를 통하여 다시 증언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간략하게 살펴봅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11:27);

(1)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백성들에게 주시는 영적인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영적인 것입니다. 영적인 것이기에 믿음이란 당장 눈에 현실적으로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을 섭리하고 계시는 영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그 능하신 손을 영적으로 발견하고 있는 안목입니다.

(2)  또한 믿음이 영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 속성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세의 시대 출애굽의 사건이라고 하는 것이 그 시대 그 장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사례를 만나게 되면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이 되고 있습니다.

(3)  그러므로 모세의 시대로부터 1,400년 이상 지난 시점 곧 예수님의 공생애에 있어서도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신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10:28). 세상임금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입니다.

(4)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장악하고서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마귀와 악한 영들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1-2).  대속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제 구원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성령님께서 내주하여 역사하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또한 부활하심으로써 마귀의 그 주장이 무효화되었다는 사실을 성도들이 믿도록 진리로서 그 마음판에 새겨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로,믿음으로 유월절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11:28);

(1)  이스라엘 자손들이 민족적인 차원에서 여호와께 처음 드린 제사는 유월절 제사이며 그 제물은 어린양입니다. 그 유월절 어린앙의 피를 대문에 바름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장자들이 죽음을 면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유월절의 제사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선민들의 제례의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가축을 속죄의 제물로 바치고 그 피를 제단에 뿌림으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죄를 여호와로부터 사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러므로  선민 유대인들의 논리에 따르게 되면, 그와 같은 속죄의 제사가 없는 민족 곧 애굽인들과 같은 이방인들은 그 옛날 애굽에서 장자의 죽음을 경험한 것과 같이 이제는 당사자들의 죽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육신적인 죽음과 영혼의 죽음이 여호와의 심판으로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10:28). 따라서 유일하게 여호와에 의하여 죽음을 면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민족은 선민 유대인들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셔서 그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제례의식은 율법의 전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유월절 어린양으로 속죄의 피를 흘리십니다. 그것은 선민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십니다(6:54). 그것이 선민 이방인 구분없이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본래 말씀의 뜻이라고 하는 사실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선포하십니다(3:13-17). 그 복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다고 하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입니다(24:44-48). 그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 따라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의 제사를 믿는 자는 선민 이방인 차별이 없이 누구나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의 은혜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셋째로,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11:29);

(1)  믿음으로 말미암아 홍해사건도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선민 이스라엘 자손만 구원하는 사건이 더 이상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만이 앞뒤가 꽉 막힌 환경 가운데에서 홍해를 가르시고 누구에게나 살길을 열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생명의 주인이 되시고 살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2)  그러한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영달이나 소원성취를 두고서 마치 우상을 섬기듯이 그렇게 여호와를 시험해서는 안됩니다. 내 뜻과 소원을 이루어 주시면 나의 하나님으로 섬기고 그러하지 아니하시면 떠나겠다고 하는 방식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됩니다(17:7). 그것은 창조주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3)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모든 생명의 주인이며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하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정직하게 종으로 살아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하나님을 종처럼 부리는 우상문화와 기복신앙에 젖어서 살아가게 되면 그 옛날처럼 홍해바다에 다시 빠져서 죽게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믿음의 본을 정확하게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생애를 떠나서는 믿음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희생과 만민의 구원을 위하여 속죄의 제물로 자신을 바치신 그 피를 생각하면서 유월절 사건을 음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유월절 출애굽 사건과 홍해사건을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얼마나 이기적으로 왜곡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선민만의 구원의식은 오늘날에도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서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님들은 참으로 귀한 존재입니다. 아무쪼록 그러한 믿음생활을 영위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