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히브리서 강해 제62강(히11:20-2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2. 26. 03:43

히브리서 강해 제62(11:20-2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6 27()

 

믿음의 조상들은 아들들에게 축복의 예언을 통하여 어떠한 믿음을 상속해주고 있는가?(11:20-22)

 

히브리서의 저자는 본문에서 창세기에 등장하고 있는 대표적인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그들의 아들과 자손들의 미래를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한 결과 어떠한 축복의 예언을 당사자들에게 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 중요한 특징을 먼저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사도 바울이 그의 로마서에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칭송하고 있는 아브라함은(4:16-18) 약속의 아들인 이삭에게 별도의 축복의 예언을 하고 있지를 않습니다(11:19-22).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벌써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의 아들인 이삭에 대하여 모든 축복의 예언을 다하셨기 때문입니다(17:6-8, 16, 19, 21, 22:17-18).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더 보태어 줄 축복의 말씀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창조주 하나님께서 부친을 통하지 아니하고 직접 당사자인 이삭에게 말씀하신 그 축복의 예언이 더욱 비중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26:3-5, 24).

(2)  둘째, 이삭은 노년에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아니하자 영적인 눈마저 멀어지고 있습니다(27:1-4). 왜냐하면, 이삭이 자식들이 태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예언을 벌써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25:23). 따라서 야곱이 형 에서인 것처럼 가장을 하고서 자신의 축복의 기도를 받으려고 들어 왔으나 그것을 눈치를 채지를 못합니다(27:23). 그 결과 당사자가 뒤바뀐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히브리서의 저자는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11:20)라고 단언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아무래도 이삭이 자신의 실책을 깨닫게 되자 그의 영성이 급히 회복이 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 결과 그는 에서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축복만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야곱을 영적인 족장 곧 아브라함의 언약의 계승자로 삼으시는 여호와의 뜻을 깨닫고 그에게 영적인 축복이 함께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28:1-4).

(3)  셋째, 부친 이삭에 비하여 굴곡이 많고 험난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 야곱입니다(47:9). 그 결과 그가 믿음으로 12아들에게 임종 직전에 하고 있는 축복의 기도가 엄청난 예언적인 영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11:21). 그 이유는 12아들들이 훗날 12지파의 조상들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야곱 곧 하나님의 선지자이며 영적인 대 족장 이스라엘의 예언이 그들 12지파의 앞날을 예언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훗날 이스라엘의 예언에 대한 수정사항은 모세의 축복의 예언으로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33:1-29).

(4)  넷째, 오랜 세월 애굽의 총리로 살아온 요셉이 노년에 가서 뛰어난 선지자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11:22). 그가 예언하고 있는 내용은 두가지입니다; ①하나는 훗날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이스라엘 자손의 출애굽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15:13-16, 46:1-4, 50:24). ②또 하나는 그 출애굽의 때에 자신의 해골을 운구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장하여 달라는 것입니다(50:25). 요셉은 애굽의 총리를 지낸 귀족의 영광을 애굽에서 계속 누리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영생의 여호와를 섬기며 천국을 소망하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눈으로 보여주신 부친 야곱의 영향을 받아 요셉 자신도 이스라엘 12지파의 하나로 살아가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처럼 그 역시 조상들이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 그 땅에 가서 묻히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 기초하여 히브리서의 저자가 본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과연 그러한지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11:20);

(1)  본문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믿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쉽게 말하자면 영적인 안목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사람이 육신의 눈으로 보고 있는 과거와 현재의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능력 가운데 다른 동물들과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든 인간의 육신에 코를 통하여 넣어 주신 생명의 기운을 말하고 있습니다”(2:7 의역). 영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코를 맞대고 넣어 주신 것이기에 그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영이 사람의 육신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생령’(living soul)이 되어 살아서 움직이며 혼적인 작용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가지고 의사결정을 하고 또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서 창조가 되어 있기에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법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1:26-27). 그런데 믿음의 근원적인 조상이 되고 있는 아담부부가 그만 하나님처럼 지혜를 가지고 싶은 욕망과 아름다움을 탐하는 육신적인 정욕에 사로잡혀서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를 따먹고 그 영성이 어두워지고 맙니다(3:1-8). 따라서 에덴동산에서 내쫓기고 여호와 하나님과 동거하는 삶에서 분리가 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영적인 능력도 급격히 쇠퇴하고 있습니다.

(3)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있는 아담의 형상을 그 아들 셋이 대물림을 하고 있습니다(4:25, 5:3). 그리고 하나님신앙을 상당히 회복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셋이 아들의 이름을 유한하고도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인생을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불쌍한 자라는 뜻으로 에노스라고 이름하면서(4:26a) 아들과 함께 영생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4:26b). 그때부터 모세는 창세기에서 셋과 에노스의 후대가 어떻게 영적인 능력을 상당히 믿음으로 회복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그 이름을 부르며 영생을 소망하는 인생을 살아 가고 있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후손 가운데 대표적인 믿음의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12:1-5).

(4)  그런데 히브리서의 저자는 본문의 바로 앞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특징에 대하여 이미 설명을 했습니다. 따라서 여기 본문에서는 그 아들 이삭의 믿음의 이야기를 한 토막 적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단적으로 약속의 아들 이삭의 믿음의 눈 곧 영적인 안목이 어느 정도인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삭은 미래지사에 대하여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을 겸하여 예언을 해준 것이다”(11:20 의역);

1)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의 주장은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말년의 이삭의 행적과 비교하게 되면 한가지 사실을 생략하고 동시에 그것을 뛰어넘고 있는 믿음의 회복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구절풀이에 앞서 모두(冒頭, 앞부분인 서언)에서 말씀을 드린 바가 있습니다. 다시 간략하게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2)    첫째, 이삭은 137세 정도가 되었을 때에 눈이 어두워져 버렸습니다(27:1). 그러자 영적인 눈도 어두워지고 있습니다(25:23, 27:3-4). 그는 자신의 이복 형인 이스마엘이 14년전에 13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25:17). 그 형은 야인이었으며 이삭 자신보다 골격도 튼튼하고 아주 강골이었습니다(25:27-2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향년이 137세였습니다. 따라서 이삭은 그 나이에 이르게 되자 자신도 곧 임종을 맞이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27:1-2). 그래서 하나님의 예언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자신이 편애하고 있는 장남 에서에게 빨리 족장의 지위와 재산을 물려주고자 합니다(25:28, 27:1-4).

3)    그 사실을 정탐하게 된 리브가는 자신이 편애하고 있는 야곱에게 족장의 지위와 재산을 물려주고 싶어합니다(27:5-10). 따라서 사냥을 떠난 에서 대신에 야곱을 형처럼 꾸며서 별미와 함께 남편 이삭의 방으로 들여보냅니다. 그녀는 비록 약속의 아들이며 영적인 족장 남편 이삭을 속이는 잘못을 범한다고 하더라도 여호와의 예언의 취지를 실천한다는 한 가닥 신념을 가지고 그 일을 추진하고 있습니다(25:23). 만약 잘못이 탄로나는 경우 모든 책임을 모친 리브가가 지겠다고 하는 말에 힘을 얻은 야곱이 그 사기극에 동참을 하고 있습니다(27:13-14). 눈이 어두운 이삭은 그만 장자의 축복을 차남 야곱에게 해주고 마는 실수를 자행하고 맙니다(27:23-29).

4)    그 일의 결과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①첫째, 리브가는 아무리 하나님의 예언을 의지했다고 하더라도 인간적인 편법과 사기극을 자행했기에 아들 야곱을 생이별하고 살아 생전에 다시는 모자간 상봉을 못하게 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됩니다 ②둘째, 야곱은 그 사기극에 동조했기에 부친 이삭의 재산과 족장의 신분을 하나도 상속하지를 못하게 됩니다. ③셋째, 에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세상적인 부와 권력만을 추구하고 무력으로 세상을 지배하고자 하고 있기에 영적인 축복을 얻지 못하고 오로지 부친 이삭의 족장권과 재산만을 차지하게 됩니다. ④넷째, 야곱은 77세의 나이에 결혼도 못하고 형 에서의 보복을 피하기 위하여 부모님의 집을 떠나게 되고 맙니다(27:41, 28:5).

5)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와 같은 상세한 이야기와 경과를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이삭이 자신의 실수를 깨닫게 되었을 때에 얼마나 빨리 믿음을 회복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11:20). 구체적으로 장남 에서가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서 축복을 받겠다고 방으로 들어왔을 때에 이삭은 아내 리브가와 차남 야곱이 공모하여 자신을 속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사기극이 이삭 자신의 잘못 때문에 비롯되고 있다는 사실도 자각하게 됩니다.

6)    그가 여호와의 예언의 뜻을 저버리고 장남 에서에게 영적인 축복까지 모두 주고자 했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영적인 족장으로서의 면모를 회복한 이삭은 장남 에서에 대하여 남아 있는 축복의 기도만을 해주고 있습니다(27:39-40). 이제는 여호와의 뜻이 드러났으므로 자신이 임의적으로 함부로 과분한 축복의 기도를 해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차남 야곱에게는 부모의 집을 떠나서 하란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도록 조치합니다(28:1-5).

7)    그곳 하란에서 믿음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의 상대방으로 살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비록 노년에 영적인 안목이 어두워졌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서 후사를 처리하고 있는 이삭의 면모를 아낌없이 창세기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대목을 히브리서의 저자가 중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믿음이 떨어지고 영적인 안목이 어두워질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함으로써 이삭처럼 다시 믿음의 눈과 영적인 안목을 회복하는 은혜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믿음으로 야곱죽을 때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11:21);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간략하게 살펴봅니다;

(1)  믿음으로 야곱죽을 때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11:21a);

1)    요셉이 애굽의 명문가의 규수를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을 생산합니다(41:45, 50-52). 그 가운데 장성한 두 아들을 데리고 병석에 누운 아버지 야곱을 문안하기 위하여 고센 땅으로 찾아갑니다(48:12). 그때 야곱은 요셉의 장남 므낫세와 차남 에브라임을 이스라엘 12지파에 편입을 하고자 합니다(48:5-6). 그 말의 뜻은 장차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서 큰 지파를 이루는 조상이 되라는 영적인 축복입니다(11:21a).

2)    그와 같은 축복의 기도를 야곱은 자신의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왼손을 므낫세의 머리에 얹고서 해주려고 합니다(48:14). 당시 오른손은 능력의 손이므로 장자의 머리에 안수해야 합니다. 그것을 노년의 아버지 야곱이 깜빡하고 있는 것으로 여기고 요셉이 손을 바꾸려고 합니다(48:17-18). 그러나 야곱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가 영적인 안목으로 미래를 예지할 때에 에브라임의 후손들이 더욱 번성하고 영적인 지도자를 더 많이 배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오른손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서 축복과 예언을 겸하여 기도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48:19-20).

3)    실제로 훗날 이스라엘 12지파의 역사를 보면, 장남 므낫세의 후손인 지파에서는 대사사 기드온이 나타납니다(6:15). 하지만 차남 에브라임의 후손 가운데에서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여호수아, 대사사 사무엘,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초대 왕 여로보암1세 등이 줄줄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13:8, 삼상1:1, 왕상11:26). 한 마디로, 참으로 영성이 깊은 이스라엘입니다. 그는 아버지 이삭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습니다., 간난신고(艱難辛苦, 온갖 고통과 곤궁과 괴로움을 말함)의 세월과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성숙한 신앙인 영적인 안목이 뛰어난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어 있는 하나님의 대 족장 이스라엘의 면모를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32:28, 35:10, 47:7-10, 48:22).

(2)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11:21b);

1)    창세기 제48장의 내용을 검토해보면 히브리서 저자가 여기서 기술하고 있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야곱이 행동했을 것이라고 짐작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 이유는 창세기 제47장 말미에 나타나고 있는 기록 때문입니다; “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요셉)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47:31).

2)    야곱이 아들 요셉에게 자신이 죽으면 애굽에 장사를 지내지 말고 반드시 가나안 땅으로 운구하여 조상들이 잠들어 있는 헤브론의 막벨라 굴에 안장을 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47:29). 야곱은 요셉의 긍정적인 답변을 들은 다음에 침상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고 있는 것입니다(47:30-31). 그 만큼 믿음의 조상들이 영생을 소망하면서 안장이 되어 있는 막벨라 굴로 돌아가기를 소원하고 있는 야곱입니다. 그는 그 일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줄 믿고서 찬양과 경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3)    그와 같은 맥락에서 야곱은 손자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앞날과 그들 후손들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를 예지할 때에 그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여호와를 만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대 족장의 권위를 상징하고 있는 자신의 지팡이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경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11:21b).

셋째로,믿음으로 요셉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11:22);

(1)  아버지 야곱의 하나님신앙의 모습은 그의 아들인 요셉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애굽의 총리 출신이며 귀족으로서 영광을 누리는 것보다 훗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세상의 제국인 애굽에서 지내는 것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의 후손과 함께 지내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자신의 신앙과 미래에 대한 영적인 안목을 훗날 요셉은 자신의 임종을 맞이하여 형제들과 후손들에게 다음과 같이 유언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50:24-25).

(2)  그 대목이 워낙 중요하기에 창세기 마지막에 수록이 되고 있습니다. 성경의 서론으로서 창세기가 기능하고 있는데 그 대목이 기술이 됨으로써 이제 서론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수백 년이 지난 후에 출애굽의 역사를 모세에 의하여 맞이하고 있습니다(12:29-42).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창세기에서 출애굽에 대하여 세 차례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①첫째, 아브라함에게 벌써 훗날 후손들의 출애굽의 역사가 있을 것임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15:13-16). ②둘째, 야곱이 개인적으로 출애굽을 하고 있습니다(50:7-14). 그것은 그와 같이 그의 후손들이 출애굽을 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징표가 되고 있습니다. ③셋째, 요셉이 믿음의 눈으로 훗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가 될 것임을 이미 내다보고 있습니다(50:24). 따라서 자신의 해골도 출애굽을 시켜 달라는 것입니다(50:25).

(3)  그와 같은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면, 미래의 역사 가운데 발생하게 되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출애굽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예언의 실현이며 믿음의 조상들이 영적인 안목으로 깨닫고 믿음으로 확신하고 있는 그것들이 뒤늦게 역사 가운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성취가 된 것에 불과하다 하겠습니다. 그와 같이 영적인 눈으로 깨닫고 보는 것이 훗날 육신의 눈으로 보게 되는 것보다 더 생생하다고 하겠습니다(20:29, 고전15:8).    

결론적으로, 성도들에게 그와 같은 영적인 안목과 믿음의 확신이 요구가 되고 있는 이유는 이 땅에서 100년 안팎의 육신적인 삶을 살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진짜 인생의 종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약속의 땅이 가나안이 아니라 주님께서 준비하고 계시는 영생의 나라라고 하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처럼 비록 죽어서라도 자신의 해골이 그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 구약의 시대 곧 히브리정경에 수록이 된 믿음의 선진들의 이야기가 그러합니다. 그들보다는 성도들이 훨씬 복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성육신, 공생애, 대속의 죽음, 무덤 속 부활과 승천, 재림의 약속과 성도들을 하나님나라로 인도하심(14:1-3) 등이 벌써 복음서의 기록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22:28-30).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같이 보이지 않는 미래를 바라보고 여호와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선지자로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그들과 비교할 때 성도들은 벌써 역사 가운데 그리스도의 예언이 성취가 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의 천국이 더욱 가까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믿음의 삶이 더욱 견고하고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보다 더욱 뛰어난 영적인 안목과 굳건한 믿음을 가지시고 복음사역을 하시며 천국을 향하여 전진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