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히브리서 강해 제63강(히11:23-2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2. 27. 00:33

히브리서 강해 제63(11:23-2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6 28()

 

모세의 부모와 모세의 믿음의 특징에 대하여(11:23-26);

 

히브리서의 저자는 본문에서 모세의 일대기 가운데 드러나고 있는 믿음과 선택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이며 그 믿음에 따라 성도들은 어떠한 선택의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1)  첫째, 부모님의 믿음의 영향에 대하여 적고 있습니다(11:23);

1)    가나안의 대 족장 이스라엘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는 아들 요셉의 초청으로 애굽으로 이민을 가고 있습니다(45:6-11, 46:1-6). 계속되는 흉년을 피하여 야곱이 11아들과 그 자손들을 이끌고 곡식이 저장되어 있는 애굽으로 이주를 한 것입니다(46:8-27). 그런데 야곱의 삼남이 레위입니다. 그리고 레위의 차남이 고핫이고 고핫의 장자가 아므람입니다(6:16-18).

2)    레위 지파의 족장의 한사람인 아므람이 막내 고모 요게벳과 혼인하여 장녀 미리암과 장남 아론을 얻게 됩니다(2:1, 4, 6:20, 15:20). 그들이 자녀를 생산할 당시에는 애굽의 바로가 노예계급으로 전락한 히브리인 이스라엘 자손들의 번성에 대하여 강한 통제를 하고 있던 시대입니다(1:8-15).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라고 히브리인 산파들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1:15-16).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히브리인 산파들이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그 명령을 제대로 준행하지 않습니다(1:17). 그 덕분에 아론이 무사히 살아 남게 됩니다.

3)    그렇지만 3년후(7:7) 차남이 태어날 때에는 상황이 심각합니다. 이제는 모든 애굽 사람들에게 바로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사내 아기가 태어나는 것을 보게 되면 모두 나일강에 던져서 죽여버리라고 한 것입니다(1:22). 그러므로 차남을 생산한 요게벳은 안절부절하게 됩니다. 애굽사람들의 눈에 뜨여서 죽음의 참변을 당하기에는 너무나 준수한 아기이기 때문입니다(2:2). 따라서 3달을 숨겨서 키우다가 도저히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서 그 장래를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맡기게 됩니다. 갈대상자에 아기를 실어 나일 강변 갈대 사이에 놓아둔 것입니다(2:3).

4)    여호와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으로 그 아기는 바로의 딸인 애굽의 공주 핫셉수트가 강에서 구원하여 그녀의 양자로 삼고 모세라고 하는 왕의 성까지 그 이름으로 주게 됩니다(2:5-10). 그리고 역시 하나님의 섭리로 그 아기가 젖을 뗄 때까지는 신분을 숨긴 모친 요게벳이 돈을 받고 유모가 되어서 키우게 됩니다(2:7-9). 따라서 서너 살이 되어 젖을 떼게 된 모세가 바로의 왕궁에 들어가서 성장을 하면서도 유모의 아들인 아론과 그 딸인 미리암과 친교를 가지게 됩니다. 내밀하게는 히브리인이라는 모세 자신의 정체성과 민족의식이 여호와의 신앙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2)  둘째, 모세가 장성하면서 바로 왕궁에서의 삶과 고센 땅 고향에서의 삶 가운데 후자를 선택하고 있습니다(11:24-25).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1)    모세는 두개의 정체성과 신분을 가진 인물입니다; ①하나는 애굽제국의 공주인 핫셉수트의 양자이므로 제국내에서 왕자의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더구나 양어머니인 핫셉수트가 애굽의 역사에 있어서 최초의 여자 바로가 되어 권력을 행사할 때에 그녀를 도와서 애굽의 통치에 한 몫을 담당하게 됩니다. ②또 하나는  자신은 이스라엘 레위 지파의 족장인 아므람의 차남입니다. 그는 여호와를 섬기는 히브리인입니다.

2)    전혀 격조가 다른 두개의 정체성과 신분 가운데 모세가 어느 것을 선호하게 될까요? 히브리서의 저자는 애굽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것을 모세가 선택하였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그와 함께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1:24-25). 그것은 마치 모세의 믿음의 조상인 야곱과 요셉이 모두 애굽의 귀족으로 사는 것보다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서 영생의 여호와께서 평생 하나님의 선지자로 살아간 자신들을 위하여 준비하시는 그 영생의 천국으로 들어가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11:13-16).

(3)  셋째, 히브리서 저자가 갑자기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라는 구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11:26). 모세의 선택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앙망하는 믿음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1)    죄인인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의 선지자로 평생을 헌신하고 봉사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죄를 말끔하게 청산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가축을 사용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속죄의 제사의 효력이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7:27). 가축의 피가 사람들의 마음과 신앙 양심까지 온전히 말끔하게 씻어주고 새로운 영을 심어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9:13).

2)    그러므로 히브리정경에 수록이 되어 있는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구속자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기를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9:14-15). 그들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훗날 메시아가 오신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언제 오시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평생 구원주를 앙망하다가 이 땅에서 생을 마감하고 있습니다(11:13). 모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약속의 땅 가나안이 아니라 영생의 천성으로 인도하여 줄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사역을 마치고 있는 것입니다(11:26).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11:23);

(1)  자신이 태어났을 때를 본 사람은 없습니다. 설혹 자신의 눈으로 당시를 보았다고 하더라도 사람의 뇌에서는 그것을 기억으로 되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태어난 당시의 이야기를 부모님이나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의 말을 통하여 전해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기에 사람들은 자신이 이 세상에 탄생한 당시를 마치 자신의 눈으로 본 것처럼 공리(公理, 증명하거나 입증할 필요가 없이 진리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세상의 이치)로 삼아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러한 입장에서 아기 모세는 유모로부터 젖을 빨면서 자신이 태어났을 때의 상황에 대하여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유모가 되어 있는 요게벳이 바로 자신의 생모입니다. 그리고 생물학적인 아버지 아므람은 히브리인 레위 지파의 족장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모세는 자신이 태어났을 때 히브리인 가정의 사내아기는 발견이 되는 즉시 모두 나일강에 던져서 죽이라고 하는 바로 황제의 칙령이 내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3)  준수한 아기가 태어났으므로 아버지 아므람과 어머니 요게벳은 자신을 3개월간 숨겨서 키우다 도저히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서 갈대상자에 담아 나일강변 갈대 숲에 두었다는 것입니다(11:23).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의 결과 여호와께서 살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애굽 제국의 황제인 바로의 딸이 자신을 발견하여 양아들로 삼은 것입니다(2:5-10). 그리고 핫셉수트는 모세의 친모인지를 모르고 자신을 유모에게 맡겨서 젖을 뗄 때까지 키우게 한 것입니다(2:7-9).

(4)  참으로 여호와의 섭리가 놀랍습니다. 그와 같은 자신의 출신 내력에 대한 이야기를 모세가 유모의 집을 간혹 방문하면서 듣게 됩니다. 그러나 아기였을 때 그 시절의 이야기는 모세 자신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부모님의 믿음과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결과입니다(11:23). 그러므로 이제 모세는 성장하게 되면서 스스로 자신의 믿음의 선택을 하게 되는 단계에 이르고 있습니다(11:24-26)

둘째로,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11:24-25);

(1)  히브리서 저자의 기술이 너무 간략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을 적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 있어서 모세의 믿음이 무엇인가를 실제로 자신들의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그 과정에 대한 이해가 더 필요합니다. 성도들이 믿음의 삶에 있어서 발생하고 있는 혼란과 의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모세의 경우 어떻게 그것을 극복했는가 하는 점을 아는 것이 실제적인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모세의 하나님 발견에 대하여 그 대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첫째, 모세가 바로의 왕궁에서 성장하고 생활한 40년의 세월은(7:21-23) 애굽 제국의 역사에 있어서 상당히 특이한 시기입니다; 모세의 양어머니가 되고 있는 핫셉수트 공주가 보통 신분과 경력의 인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애굽과 수단 그리고 이디오피아를 재통일한 신()왕국 시대 모세 왕가의 유일한 적통입니다. 그러므로 그녀와 결혼한 후궁의 소생인 투트모세2세가 애굽의 황제인 바로가 되고 있습니다. 남편이 병약하여 일찍 죽게 되자 자식이 없는 핫셉수트는 궁녀가 낳은 10살짜리 왕자를 투트모세3세로 즉위시키고 섭정을 합니다. 말이 섭정이지 실제로는 여자 바로로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한 시대입니다. 그녀의 치세는 애굽의 국력을 증강시킨 것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모세는 22세때부터 양어머니인 핫셉수트 바로를 도와서 애굽의 통치에 참여한 인물로 보입니다.

(3)  둘째, 모세가 40세가 되자 권좌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그 이유는 28세가 된 투트모세3세가 원정 도중에 핫셉수트가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회군하여 실질적인 바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투트모세3세는 일명 애굽의 나폴레옹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핫셉수트에 의하여 20세부터 원정군을 따라다니는 운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숙명적으로 수많은 전쟁에 참여하여 끝까지 살아남은 영웅입니다. 마침내 28살이 되자 원정군의 말머리를 돌려서 애굽의 황도를 점령하고 권좌를 되찾은 것입니다. 당연히 모세는 동북방 국경지대인 고센 땅으로 피신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가 주전 1,486년 경입니다.  

(4)  셋째, 모세는 동족들이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고센 땅에서 권토중래(捲土重來, 다시 권력을 되찾는 것)를 꿈꾸고 있습니다. 자신이 은밀하게 애굽인 감독자를 암살하는 광경을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게 되면 모세 자신을 중심으로 반란세력이 모일 것으로 판단한 것입니다(2:11-12). 그러나 그것은 모세의 위대한 착각입니다. 왜냐하면, 오랜 세월 애굽인들의 노예로 살아온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생각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들은 뼛속 깊이 노예근성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뜻에 동조하지를 아니하고 오히려 반란을 시도하고 있는 모세를 당국에 고발하고 맙니다(2:13-14). 그 낌새를 알아챈 모세는 황급히 동쪽 국경을 벗어나 멀리 아라비아 반도 초입에 있는 미디안 땅으로 피신을 하고 맙니다(2:15).

(5)  넷째, 어째서 여호와께서는 모세 40세에 동족을 해방시키는 반란이 성사되지 못하게 역사를 섭리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무력에 의한 반란은 많은 무죄한 피를 흘리게 됩니다. 반면에 그것은 새로운 역사를 가져오지를 못합니다. 노예가 제국을 뒤엎고 지배족속이 된다고 하더라도 지배자와 피지배자만이 달라질 뿐 새로운 이념과 사상이 동터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힘이 약해지면 다시 지배세력이 바뀌는 악순환만이 반복이 될 뿐입니다. 그것은 청산해야만 하는 죄악의 낙을 누리는 역사의 반복을 말하고 있습니다(11:25).

2)    둘째, 모세가 변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킨다고 하더라도 투트모세3세와 전투를 하여 승리할 가능성이 별로 없습니다. 투트모세3세는 전장에서 뼈대가 굵은 장군이며 정예병을 이끌고 있습니다. 모세가 노예들을 규합하여 군대를 구성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오합지졸입니다.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배와 멸망만을  초래할 뿐입니다.

(6)  결론적으로,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11:24-25)라는 구절은 다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적어도 모세가 미디안 땅에서 40년 동안 처가살이를 하면서 외롭고도 고된 양치기 생활을 통하여 깨달은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첫째, 모세 자신을 바로의 황궁에서 성장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국의 통치에 관하여 배우고 익히게 하였으니 훗날 그것을 유익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2)    둘째, 애굽제국의 통치자의 하나로 지내면서도 모세의 생각이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진짜 자신의 부모와 형제들 그리고 동족들의 해방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머물고 있다는 것입니다. 용기가 없어서 진작에 그 일을 도모하지 못하고 실각을 한 후에야 동족의 세력을 규합하여 권토중래를 도모하다가 실패한 자신입니다. 그러나 애굽의 노예로 살고 있는 동족들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늘 남아 있는 모세입니다.

3)    셋째, 만약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동족을 노예에서 해방시키고 구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모세는 여전히 40세의 혈기왕성한 때처럼 군사력에 의한 동족해방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러한 모세의 혈기를 사라지게 하는데 광야생활 40년이 요청이 되고 있습니다.

4)    넷째, 인간적인 혈기가 사라지고 세상적인 구원의 방도가 모두 사라진 그 때 비로서 노인 모세가 하나님의 사역자로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80세가 되었을 때에 모세는 여호와께 자신은 동족해방의 사명을 감당하기에 너무 늙어버렸다고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3:11),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4:13). 모세의 힘이 빠진 그때 비로소 무력봉기가 아니고 순수하게 창조주 여호와의 능력에 의하여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노예해방과 인간개조의 구원의 역사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들의 믿음의 길입니다.

셋째로,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11:26);

(1)  80세의 노인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로 애굽의 바로에게 보냄을 받게 됩니다.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출애굽의 역사가 발생합니다(12:29-42). 홍해에서 자신들을 추격하고 있는 바로의 군대를 수장시켜버리시는 여호와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15:26-30). 모세는 이제 동족들을 이끌고 몇 주 안에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고 여호와를 섬기는 신정국가를 건설하는 꿈에 부풀고 있습니다.

(2)  그러나 모세의 생각과 현실은 또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동족들이 노예근성을 청산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기적의 연속으로 출애굽을 하고 광야생활을 영위하고 있으면서도 창조주 여호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신앙생활을 멀리하고 있습니다. 늘 여호와께서 자신들의 소원을 들어주시는지 아니하시는지 그것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습니다(17:7). 제 때에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주시지 아니하시면 여호와를 원망하고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불만을 합니다. 한 마디로, 여호와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최우선적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6:15). 그리고 자신들의 능력으로 상대하기에 만만한 적들과 상대를 하려고만 합니다.

(3)  여호와께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신다고 약속을 해주시지만 그것을 액면 그대로 믿지를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강한 적들인 원주민들을 사전에 모두 쫓아내시고 텅텅 빈 가나안 땅을 자신들에게 공짜로 주시면 그때서야 그곳을 점령하고 복락을 누리고자 생각하고 있는 고약한 이스라엘 족속들입니다. 그와 같은 동족과 40년간 광야생활을 살아오면서 모세는 절망을 하고 맙니다. 도저히 그들의 정신을 개조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지혜로써는 그들을 근본적으로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4)  그 결과 모세는 위대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철저한 믿음의 성도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시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제사를 통해서만 탄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모두 하나님의 영이 성령으로 임재하여 내주하시는 선지자들이 될 때에 비로소 이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11:29). 따라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모세가 다음과 같은 소망을 믿음의 상급으로 얻고 싶어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11:26).

결론적으로, 모세의 인생역정을 통하여 믿음이 무엇인가를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240만명에 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광야생활을 하면서 모세가 직면한 문제들이 무엇인가를 더듬어 불 때에 어째서 그리스도가 완전한 구원을 위하여 절실한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결국, 모세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11:26). 그리고 불쌍한 자신의 동족들을 영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만나주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해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11:29). 아울러 모세 자신을 가나안이라고 하는 약속의 땅이 아니라 영생이 살아 숨쉬는 여호와의 땅으로 인도해주시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11:13-16).

그러므로 아무쪼록 모세의 일생과 자신의 인생을 비교해보고서 그리스도를 허락해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믿음의 삶을 신실하게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