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히브리서 강해 제29강(히6:13-1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2. 11. 13:57

히브리서 강해 제29(6:13-1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5 24()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약속한 것이 어째서 최후 확정권을 가지게 되는가?(6:13-16)

 

히브리서의 저자는 히브리정경에 밝은 자입니다. 그는 성도들의 믿음과 오래 참음이 어째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게 되는 데 있어서 필요한가에 대하여 히브리정경인 창세기의 내용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대목은 창세기에 기록이 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1)  첫째, 아브라함은 75세에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서 아버지 데라의 집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남행길에 나섭니다(12:1-4). 무엇보다도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 부부에게 자손의 번성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12:2). 그렇지만 10년 동안이나 가나안 땅과 애굽 땅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로 살아가면서 고생을 하였지만(20:7) 대를 이을 수 있는 아들을 주시지 않습니다.

(2)  둘째, 실망한 아브라함이 85세가 되자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여 아들을 얻게 되는 소망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충직한 젊은 가신 다메섹 엘리에셀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서 헤브론 땅에서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려고 준비를 합니다(15:2-3). 그 모습을 보신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확인하십니다(15:4). 아브라함은 마지막으로 한번 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 보기로 합니다(15:6). 피조물의 말이 아니라 창조의 능력을 지니신 여호와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3)  셋째, 10년 세월 동안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가 되고 있지 않지만 여호와의 재언약을 믿고서 다시 참고 기다리겠다는 아브람의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의롭다고 하십니다(15:6).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던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는 달리 생각을 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이라고 하시더라도 자신이 불임 여성이며 늙은 몸이기에 자신을 통하여 아들을 주시지는 않으실 것이라고 판단을 하고서 자신의 종인 애굽 여인 하갈을 남편에게 씨받이 첩으로 제공하고자 합니다(16:1-2). 젊은 여인이기에 아들을 생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서장자인 이스마엘을 얻게 됩니다(16:16).

(4)  넷째, 사라의 인간적인 방법을 바라보신 여호와 하나님의 생각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 부부의 믿음이 완전한 것이 아님을 아시게 됩니다. 그러한 인간적인 편법을 어떻게 하면 바로 잡을 수가 있을까요? 그래서 13년간을 지켜보신 다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부부를 다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예언의 말씀을 주십니다; “내년 이맘 때에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다.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날 것이다. 너희들은 아들 이삭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능력을 비웃었던 그 잘못을 뉘우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운명을 바꾸는 것,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믿어야만 할 것이다”(17:15-19, 18:10-14).

(5)  다섯째, 실제로 90세의 여인 사라에게서 100세의 아브라함이 적장자 이삭을 얻게 됩니다(21:1-7).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무려 4반세기가 지나간 25년만에 믿음의 결실을 얻은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마지막 시험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하여 그가 부활과 영생의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를 보고자 하신 것입니다(21:33, 22:1). 그 방법이 가나안 남부의 소도시 브엘세바에서 3일길이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모리아 산으로 아들 이삭을 데리고 가서 번제로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22:2-4). 그 명령을 아브라함이 순순히 따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참으로 이상합니다.

(6)  여섯째, 그 점에 대하여 히브리서의 저자가 깊이 묵상을 한 것을 보입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식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11:17-19). 아브라함은 다음 세가지를 믿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1)    첫째, 이삭이 자신의 아들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 소유권과 창조권이 아브라함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달라고 요구하시는데 그것을 거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둘째, 사람의 삶과 죽음을 주장하시는 분이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아브라함이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을 바친다고 하더라도 그 죽음을 뛰어 넘어서 새로운 삶을 주실 것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에게서 엿볼 수 있는 부활과 영생의 사상입니다.

3)    셋째,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의 아들 이삭을 기적적으로 주시면서 그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손이 번성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죽을 운명이 아니고 살아서 자손의 번성을 가지고 올 자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아브라함이 믿고 있기에 안심을 하고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고자 합니다.

(7)  요컨대,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하여 자손의 번성이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가 되는지를 모리아 산에서 보고자 한 것입니다. 그와 같은 창세기의 기록을 검토하면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    첫째,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칼로 그의 목을 치고자 하는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어 급히 제재를 하십니다(22:10-11). 이미 부활과 영생의 하나님이심을 믿고 있는 아브라함은 이제 더 이상 그 믿음을 시험할 필요가 없는 진정한 하나님 경외자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22:12). 그래서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서 맹세를 하십니다(22:16, 6:13). 자손의 번성에 번성을 더할 것이며 복에 복을 더하여 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22:17-18, 6:14).

2)    둘째,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께서 창조주의 이름을 걸고서 맹세하면서 약속하신 내용이므로 그것이 반드시 성취가 된다는 것입니다(6:16). 다만 그 성취를 보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아브라함이 오래 참고 기다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6:15).

3)    셋째, 하나님께서 창조주의 이름으로 맹세하시면서 약속하신 내용은 반드시 오래 참고 기다리면 성취가 된다고 하는 사실을 히브리서의 저자가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름하여 약속의 최후 확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1:16).

4)    참고로, 아브라함은 137세에 조강지처인 사라를 사별하게 됩니다(23:1-2). 그래서 젊은 후처 그두라와 175세가 될 때까지 38년간 부부생활을 합니다(25:1, 7). 그 과정에서 6아들을 더 얻어서 모두 성년이 되자 재산을 주어 멀리 동방 땅으로 분가를 시키게 됩니다(25:2-4).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자손의 번성을 경험하고서 175세에 향년을 맞이하게 되는 믿음의 조상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하나님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6:13-14);

(1)  그냥 약속하는 것과 무엇을 걸고 맹세하여 약속하는 경우가 다릅니다; 그것은 담보물이 없는 경우의 약속과 담보물이 있는 경우의 약속과의 차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약속대로 상대방이 이행을 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그 담보물을 차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담보물이란 두가지의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1)    첫째, 그 약속보다 더 큰 것을 내걸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경우에는 아버지의 명예스러운 이름을 내걸게 됩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이 가장 큰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의 경우에는 무엇을 걸고서 맹세를 해야 할까요? 창조주이시므로 자신의 이름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자신의 하나님 이름을 걸고서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6:13).

2)    둘째, 약속을 불이행함으로써 그 담보물을 잃어버리게 되면 더 큰 피해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경우에는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어기게 되면 창조주 하나님의 명예가 훼손이 됩니다. 그것은 창조주가 피조물 앞에서 말할 수 없는 위신의 추락과 전능성에 대한 의심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약속에 대하여 불이행이 된다고 한다면 창조주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스스로 참을 수 없는 자신의 신성에 대한 모독과 참담함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본문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브라함이 약속의 아들인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리려고 했을 때에 발생한 사건에 대하여 기술을 하고 있습니다. 막상 아브라함이 아들을 번제로 바치기 위하여 사지를 절단하겠다고 칼로 내리치려고 하자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어 급히 말리십니다(22:10-12a).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제는 더 이상 시험할 필요도 없이 아브라함이야 말로 진실로 하나님 경외자라고 선언하십니다(22:12b). 또한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서 자손의 번성과 영원한 축복의 약속을 맹세하십니다(22:16-18).

(3)  아브라함이 얻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약속은 복에 복을 더하고 번성에 번성을 더한다는 축복의 약속입니다(6:14); 그 약속의 성취를 이 세상에서 아브라함이 살아 생전에 온전히 자신의 육신의 눈으로 모두 볼 수가 있었을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생전에 자식이 없었던 자신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10명의 아들을 주시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16:16, 21:1-3, 25:1-4). 자신이 여호와의 약속을 믿고서 100년 동안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이방지역을 떠돌면서 체험한 사실입니다.

(4)  아브라함은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약속을 이행하시는 하나님을 보니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더 크게 이행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을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눈이 아니라 이제는 영적인 믿음의 눈으로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루시는 약속의 성취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100년 안팎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인생 가운데 얻을 수 있는 최고 최상의 축복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자신과 자손들의 영생을 볼 수 있다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인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방지역에서 하나님의 증거자로 살아가는 선지자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최대의 축복인 것입니다(22:28-30).

둘째로,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6:15);

(1)  과연 무엇을 그토록 오래 참은 것일까요? 네 단계로 나누어서 생각을 해볼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단계는 하나님의 약속이 10년 동안이나 성취가 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께서 자손의 번성을 약속해 주셨기 때문에 언약의 조건에 따라서 이미 아버지 데라의 집을 떠나 가나안 땅에서 10년 세월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위험을 무릅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약속이행은 감감무소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가신(家臣, 집안의 신하)인 다메섹 엘리에셀을 어쩔 수 없이 후계자로 삼겠으니 그것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할 따름입니다(15:2-3). 그렇게 10년 세월을 기다렸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참은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는 첫번째 요건이 되고 있습니다.

2)    둘째 단계는 아브라함의 합리적인 선택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반대하십니다. 다메섹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는 것을 반대하시고 반드시 아브라함의 몸에서 아들이 태어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15:4). 그 약속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요? 평생 불임여성으로 살아온 늙은 조강지처가 사라입니다. 아브라함 자신도 마음과 몸이 모두 늙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참고서 하나님의 약속을 또 믿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때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알고서 피조물로서의 겸손한 위치에 서게 됩니다. 피조물인 자신의 생각 및 피조세계의 상식과 이치로는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모두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판단을 다시 한번 믿어보고자 한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창조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하고서 아브라함이 창조주의 생각과 판단을 믿으며 참고 있는 것입니다.

3)    셋째 단계는 이스마엘이 후계자가 아니라 약속의 아들 이삭을 태어나게 하여 후계자로 세우신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아브라함 부부가 받아 들인 것입니다. 물론 처음 그 말씀을 들었을 때에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헛웃음만이 나올 뿐입니다(17:17, 18:12). 비록 서자이지만 튼튼한 장자 이스마엘이 13세나 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에게 상속을 해주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하나님신앙이 없는 애굽 여인 하갈에게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하시면서 이스마엘이 결코 하나님신앙을 가진 아브라함과 사라의 후계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4)    그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99세인 아브라함의 몸이 회춘(回春)이 되고 89세인 사라의 몸이 불임(不妊)에서 가임(可姙)으로 바뀌고 또한 회춘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가능할까요?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의 능력으로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17:19, 18:14). 왜 그렇게 일을 번거럽게 만들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인 이스마엘만 후계자로 인정하시면 될 것인데 말입니다(17:18). 그것이 사람들의 편리한 생각이며 상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원칙주의자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관철시키십니다.

5)    넷째 단계는 아들을 바치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까지 수용하는 것입니다. 모든 자손들이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인 사람의 능력과 뜻으로 자식을 생산했다고 하는 생각이 진실로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실은 할례의 의미입니다(17:9-11). 피조물의 판단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판단과 결정을 따르게 되면 기적이 창출이 됩니다. 사람의 생각은 물질적이며 육신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적인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부활과 영생의 차원을 말하고 계십니다.

6)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서 아브라함 부부는 더 이상 하나님의 결정을 비웃거나 자신들의 생각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결정을 끝까지 따르는 그것이 하나님의 기적을 창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모리아 산에까지 이르러 아브라함이 모든 인류의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하나님 경외자의 칭호를 얻고 있다고 하겠습니다(22:12). 결국, 부활과 영생을 믿는 그 자리에까지 이르도록 참고 또 인내하라는 말씀입니다.  

(2)  어째서 약속의 성취를 받아낸 것이 아니라 그저 약속만을 받아내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약속은 창조주의 속성 그대로 영원에 이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약속의 완전한 이행을 보고자 한다면 사람들이 부활하여 영생을 누릴 때에 그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서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는 오직 그 약속의 일부만을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셋째로,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6:16);

(1)  이 세상에서 최후의 유권해석은 누구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그 말은 최종 심판권자가 누구인가 하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다투고 있는 사항에 대하여 과연 최종적인 유권해석을 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일까요? 그 해답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더 이상의 상급의 판정기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2)  흔히 세상사람들은 사람들이 만물의 영장이므로 모든 결정을 사람들이 내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세상의 법정에서 모든 다툼의 결론을 구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1, 2, 3심의 제도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국제간의 분쟁에 대해서는 국제심판소를 따로 국가 간에 합의하여 설치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인 사람들이 만들고 있는 인위적인 재판제도에 불과합니다.

(3)  그 이상의 권위체가 하나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승복할 수밖에 없는 그 유일한 하나의 권위체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에 의한 하늘의 법정의 결정이 모든 피조물들의 다툼과 주장들에 대한 종결입니다. 더 이상의 유권 해석권자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히브리서의 저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6:16).

결론적으로, 어린아이가 서로 다투고 있을 때에 누구의 권위를 빌려서 자신이 더 옳다고 주장할까요?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빌려서 맹세하거나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최후의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상대방인 어린아이도 자신의 아버지의 권위를 빌려서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도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5:19-24).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에는 그 아버지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인자를 포함하여 육신을 가지고 사람으로 태어난 자들 치고서 더 이상의 권위체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과연 창조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가 옳다고 하는 사실을 선언해 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의 주장이 옳다고 역사 가운데 실제로 증명을 해주고 있는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무덤 속 부활입니다. 죽은 선지자의 부활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활사건은 그 인간이 생전에 행한 일과 주장이 옳다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그 자의 영생의 부활로 증명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에 입각하여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장이 옳다는 진리가 그를 부활시키심으로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판정이 되었기에 더 이상의 논쟁은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그의 로마서에서 선포하고 있습니다(1:16-17). 같은 맥락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본문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서로 자신의 주장들이 옳다고 하는 다툼도 창조주 하나님의 최종결정에 의하여 종식이 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언하는 약속을 얻은 인물이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아브라함이 육신적으로는 175세를 살고서 이 세상을 떠나지만 창조주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서 맹세한 그 약속만은 그후에도 살아남아서 이 세상에서 성취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에게 주고 있는 믿음의 자손의 번성과 영원한 생명의 복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후손으로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성취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본문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음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무쪼록 최종결정권이 하나님께 있으며 최후의 축복이 부활과 영생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시는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