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히브리서 강해 제28강(히6:10-1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2. 9. 19:05

히브리서 강해 제28(6:10-1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5 23()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어 성도들의 본이 되자면 교회의 지도자들은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는가?(6:10-12)

 

히브리서의 저자는 본문에 앞서 성도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장치가 성도들을 구원으로 이끌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6:9). 그것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영적으로 임재하여 그 남은 인생을 거룩한 영적인 삶으로 영위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거듭난 삶에 있어서 하나의 중대한 내부적인 위협요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여전히 육신을 입고서 남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실토한 바와 같이 성도들의 속사람과 겉사람은 그 갈등이 심각합니다. 속사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하심으로 말미암아 만민의 생명을 살리는 복음의 일꾼으로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죄에 물들기 쉽고 세상 유혹에 약한 육신이 이기적이고도 현세적인 선택을 하고자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7:21-23).

그와 같은 사실을 직시하고 있는 히브리서의 저자는 본문에서 성도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씀과 더불어 영적인 지도자들부터 부지런하고 소망이 풍성한 성도의 삶의 모범을 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6:10-12). 과연 어떠한 내용으로 되어 있을까요?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a)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b)너희 행위(c)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d)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6:10);

(1)  히브리서의 저자가 참으로 쉽게 불의’(不義, 의롭지 못한 것)가 무엇인지 그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불의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이 잘한 일을 잊어버리고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6:10ad).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불의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잘한 일을 전부 기억하고 계십니다.

(2)  그렇다면 과연 성도들이 어떠한 일을 잘하고 있기에 공의의 하나님께서 그것을 오래 기억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 점에 대한 설명이 본문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1)    첫째, 지금까지 계속하여 성도들을 섬기고 있는 그 행위를 기억하고 계시는 것입니다(6:10bd).

2)    둘째, 그 가운데 특별히 성도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성도들을 섬긴 것을 기억하시는 것입니다(6:10cd).

3)    셋째, 예수님의 이름을 걸고서 베풀고 있는 사랑이기 때문에 그것은 아가페입니다. 그것도 공의의 하나님께서 기억을 하실 만한 선한 행위입니다. 결국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이란 피조물 모두를 차별하지 아니하고 돌보며 그 생명을 전부 살리고자 하는 정신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있는 성도의 입장에서 가능할까요?

1)    육신적인 삶을 살고 있는 동안에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도움을 주기 위하여 성령님을 먼저 임재시켜서 성도들의 속사람 속에 성령의 전을 만드십니다(14:16-17, 고전6:19). 그 다음에는 성부와 성자께서 영적으로 그 성전에 임재를 하십니다(14:18-20, 8:9-16)).

2)    그때부터 성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하게 되면 내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성도가 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14:10-14). 그 결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의 곧 모든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성도의 선한 행위가 발생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6:11);

(1)  성도들에게 내주하여 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은 강제적으로 그 능력을 행사하고자 하시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들이 창조가 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1:26-27). 영혼을 지니고 있는 만물의 영장이기에 자유의지를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성도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 문을 열어 주기를 간절히 원하시며 함께 동행하는 인생을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2)  그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 요한이 계시록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3:20-22). 이미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여 계시면서 자신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성도들은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서 하나님을 창조주요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기만 하면 이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며 영생의 나라에서도 기업을 얻게 됩니다.

(3)  그러므로 문제는 성도들이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고서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을 맞아 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구체적으로 믿음생활을 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믿음생활을 잘하면 되는 것일까요? 우선 히브리서의 저자가 다음과 같이 두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1)    첫째, 모든 성도들이 하나같이 믿음생활에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6:11a). 히브리서의 저자가 초대교회의 공동체적인 삶을 바라보면서 그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능력대로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는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사이에 육신적인 유혹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열심히 부지런하게 일을 하더라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몫은 사람들의 숫자대로 나누어진 n분의 1’에 불과합니다.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성도들과 똑 같은 배분입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하게 일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다른 성도들이 보기에 잘하는 흉내만 내면 됩니다.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여 전신전력으로 부지런하게 믿음생활을 영위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옛날 외식적인 율법생활이(23) 초대교회의 공동체에서도 발생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2)    둘째, 끝까지 천국의 풍성함에 이를 때까지 소망의 끈을 놓지 말고 믿음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6:11b). 성도의 믿음생활이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기업과 상급은 천국에 있지 이 세상 현세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복음의 말씀을 듣고서 죄 사함과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는 있지만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인 것입니다. 그것으로 먹고 사는 문제가 온전하게 해결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질병과 장애가 당장 떠나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영적인 것은 멀리 있고 현실적인 어려움은 당장 마주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생활을 하다가 떠나가는 성도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히브리서의 저자가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6:11).

셋째로,게으리지 아니하고  믿음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6:12);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게으리지 아니하고  믿음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6:12a); 여기서 게으르지 아니하고는 앞절에서 말하고 있는 부지런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끝까지 풍성한 미래를 믿고 소망을 이루고자 노력함으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의 저자가 지금까지 권면한 내용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거듭 말하고 있는 이유는 그가 참으로 성도들이 그와 같은 믿음생활을 영위하기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6:11a).

(2)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6:12b); 히브리서의 저자가 진실로 성도들에게 힘이 되는 말을 해주고 있습니다.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6:12ba)이라고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기록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1)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아들의 영광을 회복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점을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3:13),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17:24).

2)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들의 영광을 혼자서만 누리고자 하시지를 않습니다. 사도와 제자들을 장차 부활 승천시켜서 함께 누리고자 하십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12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22:28-30). 히브리서의 저자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에 그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먼저 향년을 맞이한 사도와 제자들이 동일한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6:12ba). 그래서 단수가 아니라 복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3)    히브리서의 저자는 초대교회의 성도들과 앞으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게 되는 모든 성도들을 대상으로 하여 권면의 말씀을 적고 있습니다. 이미 천국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하나님 아들의 영광을 함께 누리고 있는 믿음의 선배들처럼 믿음생활에서 승리를 하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6:12b). 주님과 믿음의 선배들의 모범을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영생의 상급을 얻는 정답이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어린아이는 부모님과 선생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똑같이 모방을 함으로써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믿음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사도들이 스승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대로 그 공생애의 모범을 따라서 믿음생활을 한 결과 천국에서 영생의 상급을 누리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아 있는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믿음생활의 비결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디 주님처럼 그리고 사도들처럼 살아가십시오. 그들의 신앙생활의 모범을 따라서 끝까지 소망을 잃지 아니하고 부지런하게 믿음생활을 함으로써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아들의 상급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히브리서 저자의 권면대로 살아가심으로써 영생의 축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