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의 2호2룡14(손진길 소설)
당 태종과 백제의 무왕 사이는 돈독하였다. 그들은 무(武)를 숭상하는 임금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그런지 외교적으로 서로 믿고 의지하는 사이였다. 그 뿐만이 아니다. 당 태종 이세민은 마음 놓고 만주의 강대국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하여 외교적으로 백제를 자신의 편으로 삼아야만 했다;
만약 백제와의 관계가 좋지 아니하다면 당이 고구려와 전쟁에 돌입할 때에 백제가 고구려를 돕기 위하여 기병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따라서 외교적인 필요성 때문에 당 태종 이세민이 백제의 무왕에게 허리를 굽히며 서로 친하게 지내자고 겸손의 미덕을 먼저 보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통이 큰 무왕은 호쾌하게 받아들인다. 그것도 그럴 것이 무왕으로서는 신라를 치는데 바빠서 당과 고구려와의 전쟁에는 개입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쟁에 능한 무왕의 판단으로는 어차피 당이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쉽게 승리하지 못할 것으로 보았다;
무왕의 판단의 근거가 다음과 같다; 첫째, 만주의 강대국인 고구려는 주변에 큰 적이 별로 없다. 남쪽에 백제와 신라가 있다고는 하지만 고구려를 정벌할 만한 역량은 없는 소국들이다. 북쪽 시베리아에는 만주의 패자인 고구려를 넘볼 수 있는 세력이 없다. 오직 서쪽 대륙에서 최근에 천하를 통일한 신흥 강대국 당나라가 존재하고 있는데 그것도 큰 문제거리가 아니다.
둘째, 그 이유를 무왕은 두가지로 보고 있다; 하나는, 당나라 주변에는 적대국들이 수두룩하다. 북방에 돌궐제국이 있고 서방에는 토번제국이 있으며 남방에는 만족들이 있다. 그들을 버려 두고 대군을 이끌고 당나라가 고구려를 치겠다고 원정에 나서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도박인 것이다.
또 하나는, 산성에서 수비하고 있는 고구려군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통상 그 3배의 공격군이 필요하다. 고구려의 인구가 4백만명이나 되므로 최악의 경우에는 그 10분의 1인 40만 대군을 전쟁에 동원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군대를 이기기 위해서는 다른 변수가 없는 이상 당나라는 정예병 120만명이 필요하다;
그 정도의 군대를 원정에 내보내자면 또 그만큼의 보급인력이 필요하다. 결국 240만명 정도가 원정에 나서야 하는데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셋째, 그 하나의 변수라고 하는 것이 내홍(內訌)이다. 고구려조정과 군부 내에서 큰 다툼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스스로 안에서부터 무너질 가능성이 존재한다. 권력투쟁에서 밀린 소수파가 어리석게도 외세를 끌어드리는 잘못을 범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때는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할 수가 있다.
백제의 무왕이 그와 같은 냉정한 정세판단을 하고 있다. 그는 고구려조정과 군부가 그러한 분열의 조짐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비록 중원을 통일한 신흥 강대국 당나라라고 하더라도 결코 만주와 한반도를 집어삼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판단에 기초하여 무왕은 당 태종 이세민과 그저 좋은 관계를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우호관계는 무왕이 죽고 그의 아들 의자가 왕이 되어서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서기 648년 겨울에 김춘추를 만난 당 태종 이세민이 군사동맹을 맺은 후부터는 모든 것이 달라지고 있다;
이세민은 호기를 만나면 고구려를 정벌할 생각이다. 그때에는 남에서부터 신라가 고구려를 동시에 칠 것이다. 그러므로 승리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듬해 649년 여름에 당 태종 이세민이 죽고 만다. 그의 아들이 황위를 계승하지만 상당기간 권력의 누수현상을 막고 자신의 기반을 공고히 하기에 바쁘다. 자연히 만주와 한반도에 대해서는 신경을 쓸 여유가 없는 것이다.
서기 650년부터 그와 같은 대외여건이 조성되자 그때부터 집권 10년을 맞이하고 있는 백제의 의자왕의 행동이 좀 이상해지고 있다. 한마디로, 그는 점점 독선적이 되고 국제정세의 엄중함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점을 백제의 왕도 사비성에서 상좌평 성충과 그의 아우인 좌평 윤충이 개탄하고 있다.
한편 산동반도의 등주에 있는 번왕부에서 근무하고 있는 유기룡 부장은 좀더 깊이 그 문제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의 인식은 다음과 같다;
(1) 서기 641년에 백제의 무왕이 승하하자 당 태종은 조복까지 입고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고 집사 주천웅이 말하고 있다;
그와 같이 돈독한 당나라와 백제와의 관계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 심한 균열이 발생한다. 그 이유는 648년 겨울에 신라의 중신 김춘추가 당 태종을 만나 군사동맹을 비밀리에 체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 태종은 북방의 강적 동(東)돌궐을 도모하였기에 이번에는 만주의 강대국 고구려를 정복하여 당제국을 반석위에 올리고 싶어한다. 그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소국이지만 삼한일통(三韓一統)의 의지를 천명하고 있는 신라와의 군사동맹이 필요한 것이다.
(2) 당 태종이 백제와의 외교관계에서 원하고 있는 것은 그저 당나라가 고구려와 전쟁할 때에 백제가 중립을 지켜주는 것이다. 그런데 신라는 백제와 다르다. 그들은 함께 고구려를 도모하자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당 태종으로서는 신라와 손을 잡는 것이 훨씬 이익인 것이다. 그와 같은 역학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백제의 국왕인 의자이다. 그는 부왕 무왕과 절친했던 당 태종이 설마 백제를 버리고 신라를 우방으로 선택할 것으로는 판단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이 의자왕의 심각한 오판이다.
(3) 그런데 의자왕의 판단과는 달리 당 태종이 백제에 세가지로 압력을 행사한다; 첫째, 신라에게 당항성을 되돌려주고 그 주변에서 백제의 군사를 완전히 물리라는 것이다. 둘째, 기타 신라의 성을 더 이상 공격하지 말라는 것이다. 셋째, 등주에 있는 백제의 번왕부는 일체 군사적인 행동을 자제하라는 것이다. 그와 같은 외교적인 압력을 받자 의자왕은 당나라의 진심을 한번 확인하고 싶어한다. 따라서 의자왕은 649년 여름에 당 태종 이세민이 죽고 나자 그해 가을에 전방의 성주인 은상 장군에게 신라의 석토성을 한번 공격해보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당나라 조정의 반응이 생각보다 빠르다. 신라와 더 이상 전쟁을 벌이지 말라고 강력하게 경고성 친서를 보내어 온다.
당시 백제의 왕도인 사비성 군부에서는 유기룡의 친구인 좌백이 계백장군의 부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가 그 다음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1) 당나라의 내정간섭을 받자 그때부터 의자왕은 신라의 성을 더 이상 공격하지 아니하고 있다. 그것을 보고서 일부 대신들이 불만을 토로한다; “국왕께서는 어째서 당나라를 그렇게 두려워하십니까? 우리에게는 북쪽에서 당나라의 군대를 막아주고 있는 든든한 우방 고구려가 있지 않습니까?... “;
의자왕이 판단할 때에 그 말도 일리가 있다. 그래서 그는 고구려와의 군사동맹을 강화하는 한편 바다 건너 일본의 왕자들이 지배하고 있는 왜번(倭藩)에 대하여 필요한 경우 본국 백제를 도울 준비에 만전을 기하라고 친서를 보내고 있다.
(2) 그렇게 지내고 있는데 그해 말과 이듬해 서기 650년 정월에 이상(異常) 난동(暖冬)현상이 발생한다. 한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강에 얼음이 전혀 얼지를 아니하고 있다. 주로 논농사에 의존하고 있는 백제에서는 농업이 산업의 근본이다. 큰 두개의 강이 흐르고 있는 넓고도 비옥한 평야에서 풍년이 들어야 국왕에 대한 칭송이 자자한 법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이상한 난동현상이 발생하자 백성들이 수군거린다; “겨울에 무지하게 추워야 다음해 풍년이 든다. 그런데 강물이 전혀 얼지를 않는다. 땅속의 벌레가 죽지 않고 월동을 하게 되니 다음해 농사는 보나마나 흉작이다;
국왕이 무엇인가 옥황상제에게 큰 잘못을 범한 것이다!... “. 갈수록 민심이 좋지 못하다.
(3) 그것을 보고서 대신들이 한마디씩 의자왕에게 간하고 있다. 그렇지만 벌써 50대 중반의 완고한 의자왕은 신하들의 진언이 귀찮기만 하다. 따라서 일부 대신을 파직하고 그 자리에 자신이 신임할 수 있는 왕자들로 채워버린다. 그러자 아무 경륜이 없는 30대 초반의 왕자들이 오로지 신분에 의하여 좌평의 벼슬을 제수 받는 것을 보고서 중앙귀족들의 마음이 서서히 조정을 떠나기 시작한다.
그러한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강직한 무장 계백이 서기 651년 여름에 그만 사비성을 떠나 전방의 성주로 부임하고 만다. 그는 하동의 북동쪽에 있는 기노강성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 옆에서 가형인 계백성주를 보좌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좌백 부장이다.
좌백은 지난 644년 여름에 무과에 합격하여 무관으로 생활한지 벌써 8년차이다. 나이도 어느덧 27세이다. 이제는 결혼을 생각할 때인데 23살이나 연상인 친형 계백장군을 보좌하다가 보니 배필을 만나는 것이 어렵다.
멀리 전방에서 생활하고 있기에 그 일이 쉽지가 아니하다. 그런 차중에 좌백이 우연히 옛날 ‘곡나 도장’에서 함께 무예수련을 했던 사비성 명문귀족의 자제 사택창수를 만나게 된다. 과연 젊은 두사람의 만남이 어떠한 변화를 좌백의 인생에 초래하게 되는 것일까?...
'7세기의 2호2룡(손진길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7세기의 2호2룡16(손진길 소설) (0) | 2023.01.22 |
---|---|
7세기의 2호2룡15(손진길 소설) (1) | 2023.01.21 |
7세기의 2호2룡13(손진길 소설) (0) | 2023.01.19 |
7세기의 2호2룡12(손진길 소설) (0) | 2023.01.18 |
7세기의 2호2룡11(손진길 소설) (1) | 2023.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