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강해 제38강(벧전5:12-1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년 9월 1일(금)
베드로전서의 구술을 끝내면서 사도 베드로는 실루아노와 마가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으며 로마시(the City of Rome)를 어째서 바벨론이라고 부르고 있는가?(벧전5:12-14)
사도 베드로가 그의 첫번째 서신을 무사히 마치고 있습니다. 헬라어를 사용할 줄 모르고 있는 그가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고자 결심을 하고서 대필자(代筆者)를 구한 결과 마가가 아니라 실루아노를 선택하고 있습니다(벧전5:12).
사도 베드로가 자신의 영적인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마가가 로마시에 함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롬5:13). 그런데 어째서 그는 실루아노에게 자신의 히브리말을 헬라어로 적어 달라고 부탁한 것일까요?
그리고 사도 베드로는 어째서 로마시를 ‘바벨론’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일까요? 우선 그러한 문제부터 한번 간략하게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마가의 집안은 구브로 섬에서 살다가 예루살렘으로 이주를 한 레위인들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마가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남동생이 구브로 출신인 교포 레위인 바나바이기 때문입니다(행4:36, 12:12, 13:5, 15:37-40, 골4:10). 그리고 마가는 로마식 이름이고 그의 히브리식 이름은 요한입니다. 그것은 그가 교포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마가의 집은 예루살렘에서도 부자입니다. 그 이유는 그의 부모님이 대 저택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저택의 다락방이 매우 넓어서 예수님이 사도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가졌으며(막14:12-18) 주님이 승천하신 이후에는 약120명의 제자들이 그곳에서 기도회를 가졌습니다(행1:12-15). 그와 같이 마가가 교포 유대인이며 부잣집 아들이었기 때문에 헬라어 교육을 잘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2) 둘째, 실루아노는 교포 유대인인 실라의 로마식 이름입니다. 그는 예루살렘교회의 젊은 지도자였는데 총회의 결의사항을 이방교회에 전달하는 임무를 유다와 함께 수행하게 됩니다(행15:27). 의사 누가는 유다와 실라가 히브리정경의 말씀과 복음의 이해에 뛰어난 선지자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행15:32).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선교여행을 함께하고 있습니다(행15:40, 고후1:19, 살전1:1). 특히 제2차 선교여행 때에는 실라와 함께 처음으로 유럽선교를 시작하기도 합니다(행16:14-15, 25). 바울은 실라 역시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행16:37). 그러므로 실라는 히브리정경에도 밝으며 헬라어에도 능통한 인물입니다.
(3) 셋째, 사도 베드로는 주후 32년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여 약 120명의 성도들에게 임재하시고 내주 역사하시게 되자 처음으로 예루살렘에서 히브리말로 설교를 시작하게 됩니다(행2:1-40). 그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초대교회가 형성이 됩니다(행2:41-47). 그때부터 주후 49년경 예루살렘에서 총회가 열리게 될 때까지 그는 예루살렘교회의 강력한 지도자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행15:6-11). 그렇지만 주후 50년대에 들어서자 그만 50대의 나이가 되어버린 사도 베드로는 젊은 40대의 장로들에게 예루살렘교회의 치리를 맡기고 자신은 선교여행에 나선 것으로 보입니다(행21:17-23, 주후50년대 후반에는 장로 야고보마저 뒷방 늙은이로 물러난 것으로 보임). 베드로전서의 제1장을 참조하면 사도 베드로는 소아시아 북부와 동부지역에 이르기까지 선교를 한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벧전1:1).
(4) 넷째, 주후 60년대에는 사도 베드로가 로마시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심장부에서 초대교회의 기반을 다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설교는 히브리말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헬라인이나 로마인이 알아 듣기 위해서는 통역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함께 로마시에 머무르고 있는 마가와 실루아노가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통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주후 6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자 네로 황제가 로마시에서부터 기독교 탄압을 시작합니다. 네로는 여러 속국을 군정으로 다스리고 있는 로마의 총독들에게 기독교의 교회가 그 세력을 넓히지 못하도록 박해를 하라고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교회탄압의 시대를 바라보면서 사도 베드로는 로마제국을 악한 바벨론제국에 비유하면서 특히 로마시를 ‘바벨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벧전5:13, 왕하25:1-7, 계18:2).
(5) 다섯째, 사도 베드로는 그가 선교한 갑바도기아의 교회들과 소아시아 북부 고원지대에 있는 초대교회들에 대하여 로마당국의 박해가 특히 심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하고 있는 그곳의 성도들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어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떠한 마음으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극심한 이 세상의 환난과 고난을 통과하셨는지를 성도들에게 설명해주고 싶어합니다. 그 결과 주님께서 고난의 복음사역과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끝에 얻으신 그 찬란한 승리와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급에 대하여 성도들에게 알려주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히브리말로는 되는데 헬라어로는 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마가와 실루아노 가운데 한 사람에게 대필을 부탁하고자 합니다. 누가 좋을까요? 베드로의 선택은 마가가 아니고 실루아노입니다(벧전5:12).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베드로의 판단은 히브리정경에도 밝은 실라가 적임자라고 생각한 것입니다(행15:32). 말씀의 번역이나 통역은 외국어만 안다고 하여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정경과 성경전체에 대한 깊은 이해가 선행이 되어야 좋은 통역자와 대필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벧전5:12);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벧전5:12a);
1) 신실(信實)하다고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속성에 속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언약의 상대방인 사람들은 그다지 신실하지가 못하지만 하나님만은 여전히 그 언약의 성취를 위하여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언약조차 온전히 믿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연약한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안타까워하시고 동정하십니다. 피조물인 사람들이 육신적인 생각에 빠져서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조차 달면 삼키고 쓰면 뱉아버리려고 합니다(출17:7). 너무나 이기적이고 현세적인 복에 매어 달리고 있는 인간들입니다.
2) 그러한 형편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언약을 어떻게 성취하시는지를 눈으로 보게 하십니다(창12:3, 요3:16, 6:39, 히11:16). 한 마디로, 언약에 끝까지 신실하신 ‘헤세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 은혜를 알고서 많은 선지자들이 초대교회에 나타나고 있습니다(행15:32).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사도 베드로가 ‘신실한 형제’라고 부르고 있는 실라입니다(벧전5:12a). 그의 로마식 이름이 여기서 ‘실루아노’입니다.
3) 조금 더 부연설명을 해봅니다; 사람들은 육신이 연약하고 믿음이 약하여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가 늦어지게 되면 초조해하고 믿음에서 실족하기가 쉽습니다. 그렇지만 영이신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한꺼번에 통찰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한번 약속하신 그 언약은 시공간을 뛰어 넘어서 반드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4) 인간은100년 안팎의 인생만을 이 땅에서 살 수 있는 제한적이고도 연약한 육신을 가진 불쌍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과거의 경험으로 현재만을 살고 있으므로 미래에 대한 통찰의 능력마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미래에 대하여 불안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하더라도 온전히 믿고 의지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이 신실한 언약의 사람이 되자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신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은사를 받아야만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러한 좋은 은사를 실루아노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얻어서 그것을 누리고 있다고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벧전5:12a). 그와 같은 베드로의 증거는 의사 누가가 실라를 선지자라고 부르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하겠습니다(행15:32).
(2)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벧전5:12b);
1) 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밝은 선지자입니다. 특별히 히브리정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여호와의 언약에 대하여 그 신실하심을 믿고 있는 형제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교회와 성도들에게 어떠한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지고 있는가를 히브리 말로 설명하면 그것을 실라가 힘있게 헬라어로 표현해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소아시아 헬라세계에 흩어져서 살고 있는 유대인 성도들은 물론 이방인 성도들도 사도 베드로의 글을 읽고서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2) 사실 5장에 이르고 있는 베드로의 글은 그렇게 짧은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권면의 내용을 간단히 써서 보낸다고 베드로가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두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①하나는 급하게 써서 보낸다고 하는 것입니다. 로마당국의 핍박이 빠르게 전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가 그 핍박과 고난을 이기도록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내용의 글을 빨리 작성하여 보내어 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 긴 내용이 아니라 우선 짧은 글을 작성하여 급히 송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또 하나는 짧은 글이라고 하는 표현은 일종의 겸손의 자세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 속에는 충분한 설명이 아니므로 혹시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양해를 바란다고 하는 베드로의 진심이 담겨 있다고 하겠습니다.
(3)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벧전5:12c);
1) 사도 베드로가 여기서 “하나님의 참된 은혜”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는 일반적인 은혜와는 다르다고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은혜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심이라”(마5:45b). 일반적인 은혜는 마치 자연적인 혜택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태양의 빛과 비를 똑같이 주시는 것입니다.
2) 그렇지만 하나님의 참된 은혜는 특별한 것입니다(벧전5:12c). 하나님의 그 공의의 정신을 이해하고서 원수를 미워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사랑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회개와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중보의 기도를 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은혜입니다(마5:43-45a). 그것은 고난을 통과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에 준하여 하나님의 상급이 성도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영생의 구원은 물론 천국에서의 기업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벧전5:13);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벧전5:13a);
1) 교회와 성도들은 어느 곳에 있든지 그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고 예수님의 제자를 양육하여 온세상에 파송하라는 동일한 지상명령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마28:18-20). 그와 같은 동일한 사명을 감당하고 있기에 주님 안에서 서로 문안하고 격려합니다.
2) 구체적으로, 고난을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지 그 경험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사도 베드로가 로마시에 있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소아시아와 여러 로마제국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들과 그 성도들에게 문안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3) 특히 로마당국이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고 있기 때문에 사도 베드로는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시를 바벨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벧전5:13a). 마치 그 옛날 바벨론제국이 하나님의 제사장나라 유다 왕국을 해친 것과 같은 악한 행동을 지금 로마제국이 수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벧전5:13b); 사도 베드로가 소아시아에 있는 초대교회들과 그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이 글을 적고 있습니다(벧전1:1). 따라서 그는 자신의 영적인 아들 마가의 문안을 그들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두가지 사실을 엿볼 수가 보입니다; ①첫째, 마가가 지금 사도 베드로와 함께 로마시에 머물고 있다는 것입니다. ②둘째, 사도 베드로가 갑바도기아를 비롯하여 소아시아 동부와 북부의 높은 지대에 선교를 할 때에 마가도 동행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곳의 교회성도들에게 마가도 친숙한 인물이므로 그 안부를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벧전5:14); 역시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벧전5:14a); 사랑의 입맞춤은 고대 중동 땅에서 남자들 사이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창세기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리브가의 오라버니인 라반이 평생 처음 만나게 된 생질 야곱을 보고 혈육의 정을 참지 못하고 사랑의 키스를 나누고 있습니다(창29:13). 또한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이 22년 만에 그 옛날 자신을 해친 이복형들을 다시 만나 그들을 용서하고서 사랑의 입맞춤을 하고 있습니다(창45:15).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사랑의 입맞춤은 두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벧전5:14a); ①하나는 혈육과 같은 정을 나누고 있는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②또 하나는 서로 용서하고 화합하는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벧전5:14b);
1) 예수 그리스도는 마치 구원의 방주와 같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 안에 머물고 있는 것과 같아서 성도들이 영생의 구원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자면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만 할까요? ①첫째, 남은 인생 가운데 주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해야 합니다. ②둘째, 자신의 힘과 지혜로 복음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과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지혜로 사역을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실천을 해야만 합니다.
2) 특히 성도들은 그리스도처럼 대속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원수를 용서하고 자신을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성령님의 능력이 성도들로 하여금 연약한 육신을 이기고 영적인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도 베드로의 가르침이 함축적으로 들어있는 구절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벧전5:14b)라고 하겠습니다. 요컨대,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고난을 이기고 승리를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고난 가운데에서도 주님의 평강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고난과 환난 가운데 있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마지막으로 사도 베드로가 권면하고 있는 말씀은 다음 네 가지입니다;
(1) 첫째,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명심하십시오.
(2)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는 자들에게 주신 참된 은혜가 무엇인지 기억하십시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은혜가 참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도록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놀라운 은혜입니다.
(3) 셋째, 주님 안에서 이제는 혈육과도 같은 한 몸인 성도들입니다.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문안하시기를 바랍니다.
(4) 넷째, 그리스도 안에 있는 확실한 구원과 영생을 바라보면서 환난 가운데에서도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평강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위와 같은 의미가 담겨 있는 본문의 말씀을 음미하시면서 오늘날에도 고난을 이기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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