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후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베드로전서 강해 제24강(벧전3:16-1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1. 10. 07:10

베드로전서 강해 제24(벧전3:16-1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8 17()

 

선한 양심과 악한 양심, 그리고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과 악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과의 차이에 대하여(벧전3:16-18);

 

사도 베드로가 본문에서 주장하고 있는 내용은(벧전3:16-18) 그 바로 앞 절에 있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지 아니하면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베드로가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세상사람들에 대하여 폭력으로 대하지 말고 항상 온유하게 대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벧전3:15).

세상사람들이 특히 로마제국의 권력자들이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고 현인신(顯人神,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으로 섬기지 아니한다고 하여 교회의 성도들을 핍박하면서 제국의 모든 경제적인 혜택에서 제외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이치로 보자면,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배척하고 성도들을 탄압하고 있는 자들에 대하여 모든 세상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저항을 하고 교회를 수호하는 것이 정당합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그러한 폭력적인 대응을 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처럼 영생의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그 뜻을 받들어 이방인들의 영혼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벧전3:15-18). 그리하면 다음과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1)  첫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선한 양심을 가지고 생명을 살리는 선한 행위를 할 때에 그것을 비난하는 모든 세력으로부터 강력하게 보호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벧전3:16). 예수님의 공생애와 그 복음사역의 현장을 되짚어보면 그 점을 생생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1)    안식일에 병자와 장애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율법의 위반이라고 비판했습니다(3:1-2, 5:16). 그리고 예수님께서 귀신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 육신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逐邪)의 기적을 베풀게 되면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그 부하인 귀신을 잠시 쫓아내는 시늉을 하고 있다고 비방했습니다(11:15).

2)    그러한 모함과 비방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선민 유대인들이 틀렸으며 예수님이 옳다는 증거로 예수님을 무덤속에서 영생의 몸으로 부활시키신 것입니다(2:22-24, 36, 1:16-17).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살리는 복음사역에 있어서 세상사람들의 모함과 비방이 두려워서 그 일을 중단할 수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2)  둘째, 성도들이 이방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받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희생과 헌신을 참으로 귀하게 보십니다(벧전3:17). 따라서 그 전도와 선교에 열매가 있게 하며 헌신한 성도들에게는 부활과 영생을 누리게 하십니다.

(3)  셋째, 그 모든 영적인 구원의 이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게 되면 금방 이해가 됩니다;

1)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그 속죄의 희생과 헌신으로 말미암아 우리 성도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함으로 거듭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컨대,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적인 희생이 우리 성도들의 영혼을 살리고 거듭난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놀라운 역사를 초래하고 있는 것입니다(벧전3:18).

2)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 성도들이 모든 이방인들과 성도들을 박해하고 있는 그들의 영혼을 살리기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희생할 때입니다. 그러한 성도의 희생과 헌신이 장차 그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역사로 이 세상에 나타날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16);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선한 양심을 가지라”(벧전3:16a);

1)    여기서 사도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선한 양심은 선하신 하나님 앞에 서있는 사람의 양심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의 양심이므로 기본적으로 모든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선한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와 달리 부패한 양심이 있습니다. 사람의 양심이라고 하는 것이 세상살이와 우상문화에 물들다가 보면 자신도 모르게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있는 두려움을 잊어버린 사람들의 세상을 향하고 있는 양심은 자신의 실리적인 행위에 대하여 고상한 명분을 제공하기에 바쁩니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을 해친다고 하더라도 사회정의의 구현을 위해서는 부득이한 극소수의 희생이었다고 자신과 남들을 설득하기에 바쁜 것입니다(11:47-53).

3)    그러므로 양심이라고 하더라도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 서있는 두려움과 거룩한 영적인 회복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세속화된 양심이며 부패한 양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종교적인 신앙 양심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상대적인 도덕적 또는 윤리적인 선함만을 지니고 있는 양심에 불과한 것입니다. 모든 생명을 살리고 영생의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는 대속자의 양심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2)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벧전3:16b);

1)    생명을 살린다고 하는 선한 행위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는 두가지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①하나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보고 배운 대로 실천하고 있는 제자들의 선한 행위입니다. ②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다른 종교적인 또는 윤리적인 규범을 쫓아서 실천하고 있는 선한 행위입니다.

2)    베드로는 전자에 대해서는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아버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그대로 동일하게 임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벧전3:16b, 18). 그러나 후자에 대해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며 영생을 주는 유일한 구원자로 신앙고백을 하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16c);

1)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통하여 복음사역을 하실 때에 유대교지도자들이 욕하고 비방을 했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 규례와 결례에 대한 율법을 예사로 어기고 있다고 욕하고 있습니다(3:2, 6, 7:5, 6:2). 그리고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잠시 귀신을 쫓아내는 척 사기행위를 하고 있다고 비방한 것입니다(3:22).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은 그것이 아닙니다.

2)    생명을 살리고 있는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율법의 규례를 내세워 방해하고 비난했던 유대교지도자들을 부끄럽게 만드신 것입니다(벧전3:16c). 여호와께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시키시고 천국으로 승천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의 제자로 대속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이방인들의 영혼을 살리고자 하는 성도들에게는 동일한 역사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3:17);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벧전3:17a);

1)    모든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성도들이 온세상에 전파하고 있습니다.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세주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셨으며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이미 부활하여 승천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벌써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백성들에게는 영생의 구원의 은혜가 성령님의 임재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방인들의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는 성도들의 복음사역입니다.

2)    그런데 로마제국에서는 교회와 성도들의 복음전파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유일한 창조주로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세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로마황제를 현인신으로 알고 경배하며 섬기라고 하는 로마제국의 정책을 반대하고 있는 종교활동입니다. 더구나 교회의 세력이 로마시에까지 파고 들어서 무섭게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로마당국이 위기를 느끼고 있습니다. 가능한 빨리 교회의 세력을 뿌리뽑는 것이 로마제국의 안보를 위하여 시급하다고 판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로마제국의 반대에 부딪쳐서 핍박을 당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사도 베드로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복음사역을 위한 평탄한 길을 주지 아니하고 고난과 역경을 주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과 이 세상을 경영하는 세상임금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전부 살리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 사랑이며 공의의 정신입니다.

4)    그런데 세상의 제국은 그것이 아닙니다. 제국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누어지고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으로 양분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지배계급과 피지배민족의 희생 위에 제국이 건설되어 있으며 단지 지배계급과 지배민족만이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편파적인 집단이기주의는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정면으로 위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만민구원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제국의 논리와 어긋나며 갈등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교회의 지도자들이 체포를 당하고 성도들이 제국으로부터 핍박을 당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라고 하겠습니다.

(2)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3:17b); 사람이 악을 행함으로 징계를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은 억울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업자득이며 인과응보의 법칙에 맞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을 행하는데 오히려 징계와 고난을 받는 것은 참으로 억울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하여 고난과 핍박을 당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보상과 상급을 마련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셋째로,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3:18);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3:18a);

1)    사도 베드로는 여기서 의인불의한 자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하나님의 의를 행한 자를 말합니다. 반면에 불의한 자는 인간의 세상적인 의를 행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공의’(公義, righteousness)를 말하고 있으며 그 공의를 온전히 실천한 사람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합니다.

2)    하나님의 공의는 창조주의 입장에서 피조물을 공평하게 사랑하고 그 생명을 전부 살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선민과 이방인 그리고 자신을 영접하는 자와 환영하지 아니하는 자 모두를 살리기 위하여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십자가에서 희생하십니다(3:13-17). 그 결과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기에 그 의로움을 창조주께서 인정하시고 부활의 영생을 허락하십니다(1:16-17).

3)    그리고 이제는 선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상관없이 자신들의 이기적인 정의의 개념을 벗어나서 원수까지 구원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기만 하면 죄의 용서를 받으며 영생의 구원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불의한 자인 죄인들을 회개시켜서 영생의 하나님나라로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 그 놀라운 희생의 의미와 같은 제자들의 십자가의 삶이라고 하겠습니다(16:24).

(2)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3:18b);

1)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 희생으로 말미암아 죄인인 사람들이 회개를 하고서 의인으로 여김을 받게 되었으니 남은 인생을 이제는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요? 정답은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3:18b) 성도들도 예수님의 제자답게 그렇게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2)    그러므로 로마제국의 박해에 맞서서 무력으로 저항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들 원수와 같은 박해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성도들은 자신들의 십자가를 져야만 합니다. 그리하면 육신은 죽을지라도 그 영혼은 살아나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무덤 속에서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게 되는 이른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자신이 죄인인지도 모르고 스스로 정의롭다고 여기고 살아가던 백성들에게 회개와 구원의 기회가 찾아 왔다고 갈파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예수님처럼 자신들의 대속의 십자가를 짐으로써 압제자들을 회개시키고 구원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도 베드로의 외침은 오늘날에도 절실합니다. 여전히 기독교를 탄압하고 성도들의 복음사역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는 세속종교국가들이 즐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육적으로 죽고 영적으로 사는 길을 선택하여 복음에 대한 압제자들이 살고 있는 그 땅까지 복음화를 해야만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그 일을 위하여 함께 기도하고 실천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