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후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베드로전서 강해 제23강(벧전3:13-1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1. 9. 05:11

베드로전서 강해 제23(벧전3:13-1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8 16()

 

세상의 고난과 핍박을 성도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하여도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벧전3:13-15)

 

사도 베드로가 지금까지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권면한 말씀을 본문에서 다시 한번 알기 쉽게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벧전3:13-15). 그 내용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성도가 열심으로 창조주 여호와의 절대 선을 행하게 되면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강력하게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성도들을 해칠 수가 없다고 사도 베드로가 단언하고 있습니다(벧전3:13). 여기서 절대 선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전부 살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창조주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살리고 있는데 누가 시비를 걸겠습니까? 시비를 거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言語道斷,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2)  둘째,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은 사람들의 이기적이거나 집단 이기적인 정의의 원칙과 다른 것입니다;

1)    공의’(公義, righteousness)라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안목으로 피조물을 동등하게 사랑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사랑이 편협하고 이기적입니다. 나 자신을 가장 먼저 사랑하고 그 다음이 가족이고 또 그 다음이 친지들입니다. 가장 큰 인간의 사랑이 정의사회의 실현으로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조차 동족의 테두리를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2)    그 이유는 재화가 한정이 되어 있는 살기다툼의 세상에서 투쟁적인 삶을 사람들이 영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소위 제로 섬 게임’(zero sum game)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이익을 보는 자가 있으면 다른 한편에서는 반드시 손해를 보는 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나 자기 집단이 손해를 감수하고 타인이나 타 집단에게 이익이 되도록 의사결정을 하거나 그렇게 행동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3)    그러한 제로 섬 게임을 고상하게 포장하고 있는  명분이 바로 자신들만의 정의의 개념입니다. 따라서 정의라고 하는 사람들의 명분은 당연히 모든 인류의 공평한 분배를 의미하고 있는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과 배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 예수님처럼 아버지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고자 하면 동족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억울한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한 것이므로 반드시 그 보상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3일 후 무덤 속 부활이 있으며 40일 후에는 승천하여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시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의 제자들인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처럼 아버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세상의 핍박을 견디게 되면 그 과정을 통하여 창조주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22:28-30, 8:17-18).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가 그러나 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있는 자니”(벧전3:14a)라고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3)  셋째, 성도들이 그 마음속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그 종으로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 땅에 전하고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벧전3:15a) 부활과 영생의 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타락과 세속적인 영광의 추구를 물리칠 수가 있게 됩니다. 세상적인 권력과 목숨의 위협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벧전3:14b). 그와 같이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거룩한 성도의 삶을 끝까지 살아가라고 사도 베드로가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벧전3:12b).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벧전3:13);

(1)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열심히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절대 선을 실천하라고 말합니다(벧전3:13a). 그리하면 그 어떤 피조물이라고 하더라도 그 일을 방해할 수가 없으며 창조주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각별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벧전3:13b).

(2)  그러한 사도 베드로의 주장은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견해와 같은 맥락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6-39).

(3)  열심으로 선을 행한다고 하는 말은 그 일을 나중으로 미루거나 남는 시간에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거듭난 삶 자체가 죽은 영혼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살리는 일입니다. 아울러 불신자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당장 생계의 위기에 빠진 소자와 같은 자를 돕고 살리는데 있어서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4)  오늘날 현대 복지국가에서는 사회적으로 극빈자에 대하여 생계보조와 의료지원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복지국가에 세금을 잘 내고 필요하다면 자비량으로 복지사업을 돕는데 헌신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삶을 닮아가도록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그것을 실천하며 생활화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영적인 생명의 살림이 우선이 되지 아니하면 육신적인 삶의 지원과 보조는 한시적인 도움으로 끝나버릴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벧전3:14);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벧전3:14a);

1)    사람들의 집단 이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정의의 개념과 창조주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공평한 대접을 말하고 있는 공의의 개념은 대립적인 갈등관계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선민 유대인들의 선민구원사상 및 선민우월사상과 비교할 때 예수님의 만민구원사상 및 영혼구원사상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2)    한 마디로, 선민사상과 만민구원사상은 양립할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의 선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여 선민들에게 선물하여 주는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선민사상에 입각한 유대인들의 메시아 사상입니다. 그러나 그 기대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버리십니다.

3)    선민들에게 제국의 영광을 주고자 주변국의 백성들을 정벌하고 멸망시키는 악을 행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배반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선민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을 원수로 여기지 말고 구원의 대상으로 알고 사랑하라고 역설하십니다(5:44-45). 그 결과는 선민 유대인들로부터 예수님이 배척을 받고 유대교에 대한 이단으로 정죄가 되어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벧전3:14aa).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복이라고 하는 반대급부를 가져오고 있습니다(벧전3:14ab).

(2)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벧전3:14b);

1)    예수님께서는 골고다 언덕 십자가 처형장에서 자신들의 죄가 무엇인지를 모르고서 하나님의 아들을 감히 처형하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의 어리석음과 죄악을 부디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 하나님께 속죄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23:34, 43). 그 결과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희생하신 예수님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3일만에 창조주의 능력으로 영생의 몸으로 부활시키십니다. 그리고 40일 후에는 천국으로 승천을 시키십니다.

2)    나아가서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삶을 배워서 고난 가운데 대속의 삶을 살아가라고 하십니다(16:24, 28:18-20). 그 일을 능히 실천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영을 성도들에게 내주시켜 주십니다(14:16-17, 2:1-4). 그 결과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고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할 수가 있게 됩니다.

3)    세상사람들이 비록 자신들만의 정의를 내세우고 성도들의 복음사역을 방해하고 핍박하고 있지만 결코 물러설 수가 없습니다. 그 일을 통하여 영생의 부활이 성도들에게 확보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22:28-30, 고전15:20-23, 3:10-12).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의 목숨을 빼앗겠다고 위협하고 있는 로마제국의 박해와 탄압을 마냥 두려워할 수가 없습니다(벧전3:14b). 그 고난을 통과할 때에 놀라운 하나님의 복을 영생의 상급과 기업으로 얻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벧전3:14ab).

셋째로,너희 마음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너희 마음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벧전3:15a);

1)    사도 베드로가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자신의 삶을 모범으로 삼아 여러분들도 그렇게 살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베드로는 그 마음속에 진작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고서 남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2)    그렇지만 과거를 생각해보면, 자신은 스승이신 예수님 앞에 참으로 거짓말쟁이이고 배신자입니다. 끝까지 스승님을 지키고 떠나지 아니하겠다고 다짐하고 맹세를 했지만(22:33) 헌신짝처럼 그 약속을 버려버린 죄인입니다(14:50). 대제사장 집의 하인들이 나사렛 예수와 한패라고 말할 때에 끝까지 자신은 예수와 전혀 관련이 없다고 부인하고서 그 자리를 모면하고 자신의 목숨을 살린 비겁한 인간입니다(22:56-62).

3)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로 베드로와 사도들을 찾아 왔을 때에 그는 회개를 했습니다(21:15-22). 이제부터는 목숨에 연연하지 아니하고 영생의 부활을 바라보며 주님의 제자로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습니다. 그 동안 헤롯 왕가의 탄압도 주님의 은혜로 이기고 이제는 로마제국의 박해 앞에 서 있습니다.

4)    그 엄청난 박해마저 그리스도를 주인님으로 모시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극복을 하고자 합니다(벧전3:15aa). 그리고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끝까지 세상을 이기는 거룩한 성도로 살아가자고 외치고 있습니다(벧전3:15ab).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자신과 함께 순교의 고난을 통과하자고 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벧전3:15b); 사도 베드로는 초대교회에 있어서 설교자이며 전도자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선교사로서 소아시아를 거쳐 로마시에까지 들어와 있습니다. 그는 12사도의 대표로서 항상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설교를 하고 또한 간증을 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성도들은 물론 이방인들이 사도 베드로에게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의 모든 유혹과 환난을 이기고 영생의 구원을 얻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을까요?”(벧전3:15ba). 베드로는 그 질문에 대하여 항상 답변을 준비하고 스스로 그 해답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러 성도들이 베드로 자신처럼 그렇게 살아가면서 간증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벧전3:15bb).

(3)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c);

1)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성도의 삶은 한 마디로, 온유해야 합니다(11:28-30). 결코 칼이나 무력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고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고 예수님의 온유함을 제자들이 이방인들에게 보여 주어야만 합니다(벧전3:15ca). 그들이 성도들을 핍박한다고 하여 같은 방법으로 대응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복음전파와 전도의 문을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2)    성도들은 세상의 환난과 박해를 바라보고 그것을 마냥 두려워하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영원한 생명과 부활을 주관하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성도들이 항상 서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의 주관자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라고(벧전3:15cb)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10:28).

결론적으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마치 그 옛날 이삭처럼 성도 자신을 산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십니다. 성도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22:1-2, 12:1). 그 명령 앞에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영생과 부활의 능력을 믿고서 자신의 목숨과 인생을 바쳐야만 합니다(11:17-19).

그때에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칭찬 하나님 경외자라고 하는 칭호를 성도들이 얻으며(22:12) 하나님 자녀에게 주어지는 천국에서의 영생의 기업과 면류관을 얻게 된다고 하겠습니다(22:28-30). 그러한 의미를 함유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사도 베드로처럼 주님을 모시고 고난을 통과하는 은혜가 성도님들에게도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