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후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베드로전서 강해 제20강(벧전3:5-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1. 7. 16:55

베드로전서 강해 제20(벧전3:5-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8 13(주일)

 

남편들은 믿음의 아내를 어떻게 귀하게 여기고 사랑해야만 하는가?(벧전3:5-7)

 

사도 베드로가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부부생활의 복음적인 기초에 관한 것입니다. 두가지 내용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①하나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의 신뢰관계가 어디에 기초하고 있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벧전3:5-6). ②또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부부로 살아간다고 할 때 그 관계의 기초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벧전3:7). 그 대체적인 내용을 다음과 같이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사도 베드로는 히브리정경에 등장하고 있는 수많은 믿음의 가정에서의 부부생활 가운데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벧전3:5-6). 그것은 두가지 측면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1)    첫째, 아브라함 나이 75, 사라의 나이 65세에 북부 시리아 하란에 있는 아버지 데라의 집을 떠나서 독자적인 가나안 선교에 나서고 있습니다(12:1-4, 17:17). 그 결과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의 흉년을 피하여 비옥한 나일강변과 그랄 평야로 들어갔을 때에 두차례 심각한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12:12, 20:2). 고대 중동의 강대국인 애굽제국이나 블레셋 왕국에 있어서는 피난민이 아름다운 아내를 가지고 자기들의 땅에 들어 오는 것을 보게 되면 원주민들이 그 남편을 죽이고 여자를 차지하는 일이 예사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자신의 누이동생이라고 선전하면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합니다.

2)    그것은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기더라도 자신의 목숨만은 살리고자 하는 참으로 비겁한 처사입니다. 그런데 그 제안을 두 차례나 사라가 선뜻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내 사라가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남편의 제안을 받아 들이고 그를 살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남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는 사라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사도 베드로가 초대교회의 성도인 유부녀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벧전3:6a). 그것이 하나님의 딸이 지녀야만 하는 남편에 대한 순종의 미덕이기 때문입니다(벧전3:6b).

3)    둘째, 평생 불임여성으로 늙은 89세의 사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예언을 듣게 됩니다. 남편 아브라함과의 사이에 약속의 아들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하겠다는 것입니다(17:15-19, 18:9-15).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그 약속이 현실로 나타나게 됩니다. 90세의 사라가 100세가 된 남편 아브라함에게 적자 이삭을 생산하여 후계자로 안겨준 것입니다(21:1-7).

4)    그런데 이삭이 17세쯤의 청소년으로 성장하게 되자 남편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약속의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라는 것입니다”(22:1-2). 아브라함은 이삭의 생물학적인 부모는 자신들이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난 아들이므로 사실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아내 사라에게 설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5)    그리고 이삭으로 말미암아 자손의 번성이 이루어진다고 이미 약속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므로(17:4-8, 19) 무언가 다른 뜻이 있을 것으로 알고서 순종을 하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 사라의 심정이 어떠하였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사라는 그 말에 순종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라가 남편 아브라함을 믿고서 그 말에 순종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사라는 불가능한 아들 이삭을 창조해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은 것입니다(15:6, 11:1-2).

6)    죽은 것과 같은 자신의 몸을 살려서 아들 이삭을 얻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번제의 희생이라고 하는 불꽃 가운데에서도 아들 이삭을 다시 살려서 자신들에게 돌려주실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11:18-19). 히브리서의 저자가 믿음의 장인 제11장에서 그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사도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사라의 믿음의 본질이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와 부활의 능력을 믿고 있는 것이므로 그 점을 알고서 남편에게 순종하고 그 영혼을 구원하라고 권면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벧전3:6).

(2)  둘째, 믿음의 가정에 있어서는 남편과 아내가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남편들도 아내를 바라보는 안목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육체적인 안목이나 정욕적인 대상으로만 상대를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세상적인 혼인관계로 맺어진 부부관계로만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부부로 맺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도 베드로의 지적은 마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사도 요한의 언급과 같은 것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9-14).

2)    둘째, 그러므로 남편들이 아내를 바라보는 안목이 믿음의 가정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이 달라져야만 한다고 사도 베드로가 강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7). 간략하게 풀이를 해보자면, ①첫째, 영적이며 복음적인 지식을 가지고 상대방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②둘째, 육체적으로 연약한 아내이므로 힘으로 남편이 지배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③셋째, 하나님의 축복을 남자와 여자에게 나누어 주었는데(1:26-27) 그 축복을 가정생활을 통하여 온전히 받아서 누리라는 것입니다. ④넷째, 그렇게 영적인 배필로 알고서 아내와 연합할 때에 남편의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이 될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벧전3:5);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벧전3:5a);

1)    여기서 사도 베드로가 전에’(벧전3:5aa)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초대교회의 시대 이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 곧 히브리정경에 등장하고 있는 믿음의 인물들의 시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2)    그 구약의 시대 하나님 신앙을 가지고 남편을 섬기며 살아간 믿음의 아내들에 대한 경우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벧전3:5ab). 그 가운데 사도 베드로는 과연 누구의 사례를 대표적으로 들고자 하는 것일까요?  

(2)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벧전3:5b);

1)    사도 베드로는 본문에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신앙을 가진 아내들이 불신앙의 남편을 믿음의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주님 안에서 남편에게 순종하고 착한 행실을 보여 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벧전3:1-2). 그러한 믿음을 가진 아내의 삶은 외모를 중시하고 화려하게 치장을 하는 세상적인 여인들의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벧전3:3). 요컨대, 아내의 내면적인 아름다움과 영적으로 변화된 삶이 남편을 불신앙에서 믿는 성도의 삶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벧전3:4).

2)    그와 같은 인식을 가지고 사도 베드로는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벧전3:5b)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다음 세가지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①첫째, 주님께서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구원하라고 불신앙의 남편을 자신에게 보내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②둘째, 그러므로 그 구원을 위하여 주님을 섬기듯이 남편을 섬기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③셋째, 그러한 믿음의 아내의 성숙한 영적인 아름다움이 이 세상의 그 어떠한 외적인 화려한 치장보다 더욱 아름다운 단장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사라아브라함에게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벧전3:6);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사라아브라함에게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같이”(벧전3:6a); 사도 베드로가 히브리정경에 나타나고 있는 그 수많은 믿음의 아내들 가운데 특별히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사라가 이방 땅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로 살아가고 있는 남편 아브라함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 그 미덕이 너무나 돋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남편 아브라함을 마치 주님을 섬기듯이 그렇게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경우를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요?

(2)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벧전3:6b); 사라의 경우에서 엿볼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을 사도 베드로는 선을 행하고 두려움을 극복한 것이라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 뜻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파악해봅니다;

1)    첫째, 가나안 땅의 흉년을 피하여 아브라함이 식솔을 이끌고 두 차례 비옥한 이웃나라로 이주를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애굽제국이고 두번째는 블레셋의 그랄 평야입니다. 그런데 난민이 되어 이웃나라로 입국을 하는데 있어서 큰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아내 사라가 너무나 미인이기 때문입니다. 힘센 원주민들이 틀림없이 남편인 자신을 살해하고 사라를 강탈할 것만 같습니다.

2)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묘책을 사용합니다; “사라를 자신의 누이동생이라고 속이는 것입니다”(12:12-13, 20:1-2). 아내 사라의 동의를 구하고 있습니다.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그 희생을 감수합니다. 두차례나 후궁으로 끌려가는 위험을 감당합니다. 그것이 남편 아브라함의 생명을 살리고자 자신을 희생하는 선이라고 하겠습니다(벧전3:6ba).

3)    둘째, 기적의 아들이며 약속의 아들인 이삭이 17세쯤이 되자 하나님으로부터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바치라고 하는 명령이 떨어집니다(22:1-2). 남편 아브라함이 어쩔 줄을 모르고 아내 사라에게 방법을 묻고 있습니다.  물론 기적의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하여 자손의 번성을 주신다고 언약하셨으니 어떤 방법을 사용하시더라도 그 약속을 지키지 아니하시겠느냐? 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설득이 함께하고는 있습니다(11:17-19).

4)    그렇지만 부모의 입장에서 약속의 아들을 선뜻 하나님께 번제로 바친다고 하는 것은 늙은 부모의 몸을 대신 바치는 것만큼이나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렇게 놀랍고 두려운 일을 사라는 아브라함과 함께 기도하는 심정으로 그리고 부활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심으로 극복을 하고 있습니다(벧전3:6bb). 그 결과 사도 바울의 말과 같이 그들 부부가 히브리정경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우뚝 서고 있습니다(4:16). 그리고 모리아 산 그 번제의 현장에서는 하나님 경외자라고 하는 놀라운 칭호를 얻고 있습니다(22:12).

(3)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벧전3:6c);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자신의 대속자로 영접한 성도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 제1장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1:12).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이 주님처럼 지상명령을 실천하면서 대속의 삶을 살아가게 되면 영생의 부활을 통하여 천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성도인 아내들에게 남편에게 순종하고 주님을 섬기듯이 그들을 믿음으로 섬겨서 불신앙의 길에서 믿음의 길로 인도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성도인 아내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딸이 되고 남편과 함께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구절이 바로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벧전3:6c)고 하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

셋째로,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7); 다음과 같이 네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벧전3:7a);

1)    여기서 사도 베드로가 지식을 따라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히브리정경에 실려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따라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으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적인 시각에서 하나님의 영적인 말씀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그 지식으로부터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성도들이 깨달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2)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3:18). 간략하게 풀이를 해보자면, 하나님 말씀을 복음적인 시각에서 깊이 묵상하고 이해를 하게 되면 진리의 성령님께서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을 깨닫고 실천할 수 있도록 능력으로 역사를 하신다고 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도 베드로는 남편들이 아내와 가정생활을 영위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영적인 하나님의 말씀의 뜻 안에서 행하라고 강조를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벧전3:7a).

(2)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벧전3:7b);

1)    육신적인 생각으로 아내와 동거하게 되면 그 가정에서는 남편의 힘의 우월함이 질서를 유지하는 관건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육신적으로 힘이 약한 아내는 마치 노예와 같이 주인인 남편을 섬기게 됩니다. 그것은 불행한 부부생활입니다. 마치 약탈식 성생활과 같은 그러한 부부생활에 있어서는 창세기 제2장에 기록이 되고 있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가정의 창조가 사라지고 맙니다(2:20-25). 그러므로 가정이 구원의 도구가 되지를 못합니다. 도리어 가정폭력의 만연으로 홍수심판과 같은 멸망을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6:1-5).

2)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 monogamy)의 가정질서를 만드시고 아담과 하와를 부부로 맺어 주신 그 이치를 창세기 제2장의 말씀으로 깨닫게 되면 부부생활에 있어서 남편인 성도는 아내를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자신보다 육신적으로는 연약하지만 함께 영육간의 반려자가 되어서 평생을 신앙의 공동체로 살아가라고 하는 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아내의 연약함을 사랑하고 그것을 보완해주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그러한 모습을 사도 베드로가 여기서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벧전3:7c); 사도 베드로가 창세기 제1장 제26-27절의 말씀에 근거하여 본문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십니다. 그들 남자와 여자에게 세상을 함께 다스릴 수 있는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남자나 여자는 혼자 있을 때에는 반쪽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이나 모양도 절반만 나타날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세상경영의  축복도 절반만 성취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생명의 동반자로 그리고 귀한 반쪽’(better half)으로 여길 때에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대로 경영이 되어 나갈 것입니다. 나아가서 영생의 구원은 그 가정을 통하여 후손들에게 상속이 되고 또한 온세상으로 전파가 되어 나갈 것입니다.

(4)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7d); 사도 베드로가 영적인 믿음 안에서 부부가 함께 가정생활을 영위할 때에 어떠한 성령님의 역사가 당장 나타나게 되는가를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기도는 약합니다. 그러나 두세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되면 하나님의 역사가 강력하게 나타납니다(18:18-20). 그 약속이 부부의 합심기도 가운데 당장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벧전3:7d). 반대로, 남편이 부부생활을 폭력과 권력적인 지배관계로 영위하고 있다면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에게 상달이 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부부사이에 영적인 믿음과 서로를 귀하게 여기는 사랑이 없는데 어떻게 성령님께서 그들 사이에서 역사를 하시겠습니까?

결론적으로, 사도 베드로는 믿음의 공동체의 기초로서 가정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부부생활이 믿음 안에서 이루어질 때 그 공동체는 구원과 영생의 방주를 얻게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지금 로마제국의 교회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성도들이 마치 바람 앞의 촛불처럼 그 믿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러한 위기 가운데 가정에서부터 특히 부부생활에 있어서 서로가 서로를 아껴주고 영적인 믿음의 결속을 단단히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말로만 사랑하지 말고 아내는 선하고 착한 행실로 불신앙의 남편을 믿음의 길로 인도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장 빠른 전도의 방법입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환난 가운데 가장 든든한 동역자를 구하는 방법입니다. 바울의 권면은 오늘날에도 그 의미가 생생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부부생활에서부터 믿음충만한 기도와 보살핌이 성도들의 가정에 풍성하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