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후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베드로전서 강해 제22강(벧전3:10-1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1. 9. 05:09

베드로전서 강해 제22(벧전3:10-1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8 15()

 

사도 베드로가 원용하고 있는 시편 제34 12-16절 말씀에 대하여(벧전3:10-12);

 

로마제국이 군대를 동원하여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을 잡아가고 있습니다. 그 체포의 현장을 바라보고 있는 교회의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로마제국의 무력이 겁이 나서 도망을 쳐야 할까요? 아니면 그 옛날 스승이신 예수님을 지키고자 칼을 빼어 들고서 저항했던 사도 베드로 자신처럼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모두 교회의 지도자들을 지키고자 칼을 빼어 들고서 로마의 군인들에게 대항을 해야만 할까요?

만약 로마제국 내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전부 무장봉기를 하게 되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 결과를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그것이 사도 베드로는 두렵습니다. 짧은 자신의 생각대로 함부로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선동의 메시지를 보내게 되면 틀림 없이 그 옛날 겟세마네 동산에서처럼 예수님의 꾸중을 다시 들을 것만 같습니다(26:47-52).

그 해법을 찾고자 고심을 하고 있는 사도 베드로에게 그 옛날 자신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이 선명하게 다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12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26:52-54). 그리고 그 말씀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드러내고 계시는 주님의 복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교회를 탄압하고 있는 그들도 모두가 멸망의 대상이 아니라 회개와 구원의 대상입니다. 만민구원에서 그들이 제외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들을 대항하여 칼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회개의 역사가 임하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따라서 사도 베드로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폭력에 대하여 폭력으로 대항하지를 말고 도리어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벧전3:9). 그리고 그것이 히브리정경에 담겨 있는 아버지 하나님의 변함없는 말씀의 뜻이라는 사실을 시편 제34편의 말씀을 원용하여 본문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벧전3:10);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며 동시에 시편의 말씀과 대조를 하고자 합니다;

(1)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벧전3:10a);

1)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종은 창조주의 뜻을 받들어 실천하여야 합니다. 그 뜻은 한 마디로 창조주가 만든 피조물들을 잘 돌보고 그 생명을 살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기서는 생명을 사랑하고”(벧전3:10aa)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이 땅에서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사랑하고 살리기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제자인 성도들이 그 일을 계승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제자들도 부활하여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이 좋은 날 보기를 소망하면서 이 세상의 고난을 믿음으로 이기는 자들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2)    사도 베드로가 인용하고 있는 시편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What man is he that desireth life, and loveth many days, that he may see good?)”(34:12). 여기의 시편 말씀은 그 원류를 따지자면 모세가 신명기 제30장에서 기록하고 있는 다음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長壽)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30:20).

3)    다만 유대교인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에 시편말씀이나 신명기의 말씀을 두고서 엄청난 해석의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과 장수에 대한 해석의 차이입니다; ①첫째, 선민 유대인들은 조상들에게 여호와께서 주리라고 맹세하신 약속의 땅은 가나안 땅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장수를 누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②둘째, 기독교인들은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과 3일 후 부활 그리고 40일 후의 승천을 이미 보았으므로 그 약속의 땅은 영생을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4)    사도 베드로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좋은 날’(벧전3:10ab)은 그 의미가 이 땅에서의 장수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만민구원을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는 인생을 살아감으로써 마침내 부활하고 승천하여 얻을 수 있는 천성에서의 영생의 삶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11:13-16). 사도 베드로가 소망하고 있는 그러한 좋은 날을 보기를 사도 바울이 역시 강력하게 원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빌립보서에서 다음과 같이 엿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 가노라”(3:10-12).

(2)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벧전3:10b);

1)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일체 생명을 해쳐서는 안됩니다. 그 생명을 돌보고 살리고자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진심을 진리의 복음으로 선포하고 그 진리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따라서 사도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자신들을 탄압하고 있는 로마제국에 대하여 일체 비난과 악한 말을 그치고 그들의 회개와 구원을 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희생만을 진리의 복음으로 전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벧전3:10b).

2)    그와 같은 베드로의 권면은 그가 인용하고 있는 히브리정경 시편의 다음 말씀과 그 의미가 일치하고 있습니다;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34:13). 사도 베드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종의 모습은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시편 말씀의 인용을 통하여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예수님의 선례) 따르라”(벧전3:11); 역시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벧전3:11a);

1)    ’(, good)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①하나는 절대적인 선이고, ②또 하나는 상대적인 선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선은 인간의 상대적인 선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을 사랑하시는 창조주의 그 절대적인 선입니다(18:18-19). 그것은 생명을 모두 돌보고 전부 살리고자 하시는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육신을 지니고 있는 인간들은 그러한 창조주의 절대선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기적이고도 현세적인 욕심에 사로잡혀 있는 육신의 욕구를 물리칠 수 있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7:21-24). 그러므로 먼저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신의 죄를 발견하여 회개함으로써 하나님의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받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의 임재를 받아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자신의 육신의 소욕을 물리쳐야만 합니다(8:1-4).

3)    그러하지 못하게 되면 집단 이기적인 정의의 개념에 불과한 상대적인 선에 계속 머물게 됩니다. 상대적인 선은 세가지의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①첫째, 사회적인 정의의 구현을 강조합니다. ②둘째, 세속적인 윤리의 확립을 절대시합니다. 셋째, 성도들이 앞장서서 사회정의를 구현하고 사회윤리의 실천에 모범을 보이고 헌신한다면 이 땅에 지상낙원이 건설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4)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그것이 아닙니다. 육신을 지니고 있기에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도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18:17-18). 따라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신신당부를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임재하시기 전에는 복음전파의 지상명령조차 실천하지를 말고 기도하면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24:49, 1:8).

5)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가 시편의 말씀,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34:14a)를 인용하여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벧전3:11a)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도 베드로의 말 가운데에는 두가지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①하나는 폭력으로 로마제국의 탄압에 맞서고자 하는 악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②또 하나는 이 땅에 지상낙원을 건설하는 것이 교회와 성도들의 목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6)    만약 현세적인 목표에 집착하게 되면 상대적인 악을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조차 떠나서 절대적인 창조주의 선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성도들은 원수까지 사랑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대속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창조를 통하여 모두의 영혼을 구원하여 영생의 하나님나라에 함께 들어가도록 조치하실 것입니다.

(2)  화평을 구하며 그것(예수님의 선례) 따르라”(벧전3:11b);

1)    성도들이 자신들을 박해하고 있는 원수와도 같은 사람들과 화평을 추구하는 이유는 그들 역시 회개와 구원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12:18-21). 따라서 그들에게도 그리스도의 대속과 구원의 복음이 전해져야만 합니다. 동시에 어떠한 인생을 살아갈 때에 영생의 부활을 얻게 되는지를 성도들의 희생과 믿음을 통하여 그들에게 눈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2)    그와 같은 선례를 벌써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와 영생의 부활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 제자인 성도들이 로마의 당국자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이 시편에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34:14b)라고 이미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베드로가 여기서 적절하게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주의 눈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두려우신 창조주의 진면목, 33:20)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벧전3:12);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주의 눈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벧전3:12a);

1)    사도 베드로는 주후 32년경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신 후 3일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시고 40일 후에 감람산에서 승천하시는 광경을 바라본 사도입니다(24:50-53). 그리고 그해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120명의 성도들에게 각각 임재하시는 현장을 경험한 인물입니다(2:1-4). 그로부터 30여년 동안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희생과 부활 승천 그리고 대속의 주님을 믿고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의 은혜를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전파하고 있습니다.

2)    지나간 30여년의 전도와 선교의 삶을 통하여 베드로가 깨닫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주의 눈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벧전3:12a)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체험과 깨달음을 이제 초대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는 자가 의인입니다.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전부 살리고자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성도가 바로 의인입니다. 끝까지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로마제국의 박해에 맞선다고 하면 주님의 보살핌과 보호하심이 각별할 것입니다”(벧전3:12aa).

3)    그리고 가해자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얻도록 중보 기도하는 성도들의 기도에 분명히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여 주실 것입니다(벧전3:12ab). 그 응답으로 로마제국이 변화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시편 제34편에 기록이 되어 있는 다윗 왕의 체험적인 깨달음,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34:15)라는 구절을 원용하여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자신 있게 그와 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벧전3:12a).  

(2)  주의 얼굴(두려우신 창조주의 진면목, 33:20)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벧전3:12b); 성도들이 로마제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그 모진 박해와 환난을 이기면서 헌신하고 희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당국자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 역사가 어떻게 될까요? 사도 베드로는 한 마디로 명쾌하게 답변하고 있습니다; “주의 얼굴(두려우신 창조주의 진면목, 33:20)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벧전3:12b). 그 말씀은 이미 시편 제34편에서 다음과 같이 예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를 향하사 그들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34:16). 여호와 하나님의 진면목을 바로 보게 되면 모든 피조물은 죽음을 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33:20). 그러므로 그것은 멸망의 심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들은 만민구원의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말로써만 아니라 행동과 삶으로써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의 제자의 인생이라고 하겠습니다(16:24). 그와 같은 성도의 삶의 모습을 깨닫고 있는 사도 베드로가 본문에 앞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3:9)라고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로마시에 당시 머무르고 있던 사도 베드로는 그러한 결론에 이르기 전에 깊은 고민과 고심에 빠져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초대 예루살렘교회를 시작한 12사도들의 수장인 자신이 이제는 로마제국의 탄압과 박해에 대하여 무언가 대책을 세워서 모든 교회에 메시지를 보내야만 합니다. 과연 무엇이라고 권면하면 좋을까요?

먼저 로마시의 권력자들에 대한 그의 시선이 곱지가 않습니다. 교회를 탄압하고 있는 그들이 미운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로마시를 영적으로 바벨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벧전5:13). 주전 586년 지상 마지막 제사장나라를 멸망시킨 바벨론과 같은 악한 제국이 로마라는 것입니다. 그 심장부인 로마시에 머물고 있는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 대한 적개심이 사라지지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베드로는 자신을 적개심으로 몰고 가고 있는 그 육신의 눈을 잠시 감고 영적인 주님의 세계를 바라보고자 합니다. 이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눈앞에 30여년 전의 그 장면이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그 옛날 스승이신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대제사장의 사주를 받은 로마병정들이 무장을 하고서 한밤중에 겟세마네 동산으로 찾아 왔습니다. 베드로는 용감하게 적들을 제지하고자 칼을 빼어 들고서 휘둘렀습니다. 그때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베드로 자신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30대에 자신이 직면했던 그 일이 이제 60대가 되어 있는 자신 앞에 다시 반복이 되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로마병정들이 그 옛날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체포하려고 왔지만 지금은 로마시에 머물고 있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자신이 선교한 소아시아 북부와 동부지역의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을 탄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글을 실루아노의 도움을 받아서 헬라어로 작성하여 고난 가운데 있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고자 합니다(벧전1:1-2, 5:12).

사도 베드로의 결론은 그 옛날 자신이 30대였던 그때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잡혀 가시면서 자신에게 하시던 그 말씀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 말씀이 만민을 회개시키고 구원하는 진리의 복음이기에 그때나 지금이나 세월이 지나도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진리의 복음을 널리 전하고 실천하시는 귀한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항상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