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강해 제18강(벧전2:22-2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년 8월 10일(목)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겪으신 그 고난의 특징이 무엇이며 그 본을 성도가 따르게 되면 어찌 되는가?(벧전2:22-25)
사도 베드로는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의 특징과 그 대속의 삶의 목적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는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은 참으로 이상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①하나는 그러한 고난을 당하실 이유가 없는데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벧전2:22). ②또 하나는 고난을 받지 아니하실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지니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그 고난을 감수하신 것입니다(벧전2:23). 그 이유와 목적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2) 둘째, 예수님께서 자진하여 고난을 감당하신 이유와 목적이 다음과 같다고 사도 베드로가 적고 있습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3-24);
1) 예수님께서 유대교지도자들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시고 부당한 모욕과 처벌을 감수하신 것은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속죄의 제물로 자신을 희생하셨기 때문에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서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이제 의인으로 여김을 받게 된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게 되는 역사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 결과 성도들은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아가면서 땅끝까지 주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3) 셋째, 의사 누가는 사도행전 제1장에서 성도들에게 내주하신 성령님께서 복음전파와 선교의 능력으로 역사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행1:8).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 되셔서 그 앞길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벧전2:25).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적어도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두가지의 뜻을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1) 하나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역할만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를 길러내는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마28:18-20). 그것이 목자로서 양을 치는 행위에 해당합니다(요21:15-17). 그 목자의 삶을 먼저 경험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의 목자로서의 삶을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주님을 목자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2) 또 하나는 주님께서 성도들의 목자의 삶과 복음전파의 삶만을 인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말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다음에 부활 승천하여 천상의 큰 대제사장으로 사역하고 계십니다(히4:14-16).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예수님처럼 대속의 삶을 살게 한 다음에 천국으로 인도하여 영원히 하나님의 일을 같이 하자고 하십니다(눅22:28-30).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벧전2:22);
(1)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은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세상적인 상식과 이치에 어긋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사람들이 철칙이라고 믿고 있는 인과응보(因果應報, 원인에 따라서 결과가 나타나듯이 잘못에 대해서는 반드시 보응이 있다는 것)의 법칙이나 사필귀정(事必歸正, 모든 일은 결국 올바른 결론으로 돌아간다는 것)의 이치에 전혀 맞지가 않습니다. 더구나 권선징악(勸善懲惡, 선행을 권장하고 악행을 징계하는 것)이라고 하는 통치자의 상벌의 도리를 내세울 수도 없습니다.
(2)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거짓말을 하신 적이 없으신데도 불구하고 유대교지도자들로부터 비난과 박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벧전2:22). 그리고 끝내는 십자가에서 처형을 받게 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육신의 죽음으로 모든 일이 끝난다고 하면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은 분명히 이상한 것이며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죽은 지 3일만에 창조주의 도우심으로 예수님께서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심에 따라서 인류의 역사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죽음으로 모든 일이 종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의 부활까지 합하여 인과응보와 사필귀정 또는 권선징악의 의미를 논의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3) 그와 같은 새로운 이치를 예수님께서는 진작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십니다;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가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가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막10:37-40).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고난과 대속의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 대가는 이 세상에서 얻지를 못합니다. 그 대신에 영생의 부활로 천국에서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현세의 고난과 내세의 영광이라고 하는 관계를 설정하고 있는 새로운 영적인 질서입니다(롬8:17-18).
둘째로,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3-24);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2:2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독생자의 영광을 가지고 계십니다. 비록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셔서 육신을 입고서 제자들과 함께 공생애를 사시고 계시지만 이 세상에서 일개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들이 함부로 비난하거나 핍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유대교지도자들의 핍박과 비난을 그대로 감수하고 계십니다.
(2)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2:24a);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있는 12군단의 천사들까지 동원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시는데 어째서 그 권세를 사용하지 아니하시고 유대교지도자들의 불법체포에 순순히 응하신 것일까요?(마26:52-54) 그 의문이 풀리기 시작한 것은 골고다 언덕에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3일만에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신 다음입니다. 그 설명이 뒤이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3)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4b); 두가지 사실을 생생하게 알 수가 있게 됩니다;
1) 첫째, 예수님의 사명이 백성들에게 하나님말씀의 정확한 뜻을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이라고 하는 천국복음으로 가르쳐 주는 것이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난과 모함에 대하여 반박하지 아니하시고 처형장까지 끌려가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성도들도 예수님처럼 대속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자신에게 임하고 있는 세상의 비방과 박해를 감수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2) 둘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서 고난 가운데 사명을 감당하셨기에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영생의 천국으로 들어가십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서 복음사역과 대속의 삶을 살아가는 제자들에게는 영생의 부활과 천국에서의 하나님 자녀의 영광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시사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 왔느니라”(벧전2:25);
(1) 선민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방해하고 그리스도를 유대교의 이단으로 정죄하여 십자가에 처형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뜻을 저버리고 예수님을 배척한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에수님께서는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대속의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서 이제는 많은 유대교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초대교회의 성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회개하고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탕자와 같습니다(눅15:16-24). 따라서 사도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 왔느니라”(벧전2:25).
(2) 선민 유대인 출신들만이 아닙니다. 로마제국에 살고 있는 많은 이방인들이 또한 초대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소위 이방인 출신 성도들입니다. 그들 역시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고서 제멋대로 인생을 살다가 이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에게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영혼의 목자와 믿음의 감독자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당면한 로마제국의 탄압과 박해를 이기고 올바른 믿음생활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유대교지도자들의 고난과 핍박을 감수하시고 자신을 희생하셨던가를 깊이 묵상해야만 합니다. 그리하면 이 세상에서 성공적으로 성도의 사명을 완수하고 영혼의 주인이신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가는 영광을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베드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과 그 교훈만을 명심하고서 초대교회의 지도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의 믿음생활의 특징은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을 자신도 똑같이 따라간다는 것입니다(마16:24-28). 주님께서 유대교지도자들로부터 부당한 비난과 핍박을 받으셨지만 그것을 감내하셨습니다(마26:52-54). 마찬가지로 사도 베드로도 로마제국의 탄압과 박해를 감수하고자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적에게 칼로 대항하신 것이 아니라 대속의 희생으로 그 고난을 짊어지셨기에 회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임한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주님처럼 그렇게 대속의 삶과 죽음을 살아갈 차례입니다. 그러한 결심을 하고 있는 사도 베드로가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도 부디 그렇게 예수님의 본을 따라 믿음의 삶을 살아 주기를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사도 베드로처럼 이제는 주님의 뒤를 따라가시는 성도님들의 믿음생활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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