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강해 제17강(벧전2:18-2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년 8월 9일(수)
믿지 않는 주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종은 어찌해야 하는가?(벧전2:18-21)
사도 베드로는 종이 주인에게 순종하는데 있어서 성도들의 경우에는 그 취지가 세상사람들과는 달라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달라야 하는 것일까요? 그 이치에 대해서 베드로는 진작에 다음과 같이 밝힌 바가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벧전2:13).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이웃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처럼 고난을 받고 참으면 그것을 참으로 기뻐하십니다(벧전2:19-20).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대신 고난을 받으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이웃을 사랑하고 섬겨야만 합니다(벧전2:21). 그 이웃 가운데 세상적인 주인이 당연히 포함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벧전2:18).
그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하므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벧전2:18);
(1) 사도 베드로는 세상에 두가지 종류의 상전(上典, 윗사람)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①하나는 선하고 관용이 있는 상전입니다. ②또 하나는 비위를 맞추기가 참으로 까다로운 상전입니다. 수하(手下, 자신에게 소속이 된 아랫사람)나 종의 입장에서는 어느 종류의 상전 또는 주인이 좋을까요? 당연히 전자(前者, 앞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베드로가 선함과 관용이라고 하는 좋은 용어를 그러한 주인에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여기서 선하다고 하는 의미는 종교적인 깊은 의미가 아니고 일반적으로 사람의 좋은 성품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개념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인간대접을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용이라고 하는 것은 비록 자신의 아랫사람이나 종이라고 하더라도 꾸중을 하기 전에 먼저 그 처지와 형편을 헤아려서 허물을 덮어주고자 하는 마음씨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품성을 지니고 있는 상전을 모시고 있는 부하는 참으로 행운아이며 그러한 주인을 모시고 있는 종은 행복하다고 하겠습니다.
(3)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그러한 좋은 상전이나 주인이 소수입니다. 다수는 그 성격이 까다롭습니다. 그러므로 종이나 아랫사람들은 성격이 고약한 주인이나 상전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벧전2:18). 특히 사도 베드로가 살고 있는 로마제국의 시대에 있어서는 주후 50년대 후반과 60년대가 그러합니다. 제5대 황제인 네로(통치기간이 주후 54-68년임)의 성격이 전형적으로 후자에 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 당시 네로 황제는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로마시민들의 따가운 시선과 책임추궁을 정치적으로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묘책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흥 기독교의 성도들이 로마시민들의 삶의 규범을 파괴하고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기 위하여 정치적 사회적 불안을 조성하고 있다고 선전한 것입니다. 로마시에 머무르고 있는 사도들을 잡아들이고 로마제국내에 있는 기독교계의 지도자들을 탄압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까요? 사도 베드로는 한 마디로 초대교회에 그 처방을 말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고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반항하지를 말고 그리하도록 하십시오”(벧전2:18 의역).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둘째로,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2:19-20);
(1) 고난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고 사도 베드로가 말하고 있습니다; ①하나는 자신의 잘못 때문에 그 죄값으로 매를 맞게 되는 고난입니다(벧전2:20a). ②또 하나는 선하기 때문에 주님처럼 악한 자들로부터 고난을 받게 되는 경우입니다(벧전2:19). 전자의 경우에는 자업자득(自業自得, 자신이 잘못하였기에 당하게 되는 처벌을 말함)이며 인과응보(因果應報, 원인제공에 따라 당연히 받게 되는 보응을 말함)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세상적으로 이치에 맞지가 않고 앞뒤가 어긋나고 있는 사례이므로 별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2)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당하게 매질을 당하고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아무리 아랫사람이며 종이라고 하더라도 세상이치에 어긋나고 있는 박해이며 핍박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베드로는 그러한 부당한 박해를 감내하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두가지 때문입니다; ①하나는 주인이나 상전의 구원을 위하여 그 영혼을 살리고자 하는 뜻에서 수하나 종이 부당한 고난과 핍박을 기꺼이 감내하고 있다고 하면 그러한 고난을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이라고 여기신다는 것입니다(벧전2:19, 20b).
(3) ②또 하나는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미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감내하신 바가 있으므로 이제는 성도가 이웃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벧전2:21). 그것은 마치 사도 바울의 주장과 같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님께 진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하여 성도들이 주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하면서 대속의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데 그것과 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13:8, 고전6:19-20). 어쨌든 후자에 대해서는 베드로가 다음 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1);
(1) 사도 바울은 그의 로마서 제12장에서 성도들에게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롬12:21). 그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①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으로 악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②또 하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 성도들은 이제 주님의 것이며 예수님처럼 살아가야만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롬6:13, 고전6:19-20).
(2) 사도 베드로가 본문에서 바울의 주장을 약간 다른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습니다; ①첫째,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먼저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너희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하여 어떠한 고난을 감수하셨으며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셨던가를 생각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벧전2:21a). ②둘째, 부당한 핍박에 대한 예수님의 감수와 대속의 희생적인 삶이 하나의 본보기가 되어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요구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벧전2:21b).
(3) 구체적으로, 부당한 주인을 비롯하여 성도들을 박해하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을 성도들이 채택하여 그 제자로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선으로써 악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예수님처럼 이 세상의 고난을 이길 때에 영생의 천국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생의 기업을 얻게 될 것입니다(눅22:28-30, 롬8:17).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위와 같은 사실을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쉽게 풀이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12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22:28-30).
사도 바울이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6-17).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 역시 성도들이 세상의 부당한 고난에 대하여 대속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감수함으로써 이웃구원의 사명을 다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대속의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이웃의 구원을 위하여 세상적인 고난을 감수하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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