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후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베드로전서 강해 제15강(벧전2:11-1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1. 4. 22:04

베드로전서 강해 제15(벧전2:11-1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8 7()

 

복음전파를 위하여 성도들은 어떠한 삶의 자세를 가져야만 하는가?(벧전2:11-14)

 

사도 베드로는 본문에서 자신의 편지를 받아 보게 되는 성도들을 이방 땅에서 살고 있는 거류민(居留民)과 나그네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벧전2:11-12). 구체적으로는 소아시아 북부와 동부 지역에 살고 있는 성도들을 베드로가 염두에 두고서 그렇게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벧전1:1-2).

그들 성도들은 대부분이 교포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본래 회당(會堂, synagogue)을 중심으로 유대교인으로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찾아와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 복음이 선민 유대인들의 폐쇄적인 유대교리보다 개방적이고 개혁적입니다. 따라서 세계적인 대 제국 곧 페르시아, 헬라, 로마 등으로 이어지고 있는 다민족의 사회에서 대대로 살아오고 있는 교포 유대인들은 그들의 삶과 어울리고 있는 그리스도의 만민구원의 복음을 쉽게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에서 개종하여 기독교인이 되고 있으며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초대교회를 설립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 교포 유대인들이 어떻게 페르시아, 헬라, 로마로 이어지고 있는 제국의 시대 그 넓은 이방인들의 땅에 흩어져서 디아스포라’(Diaspora,  scattering seeds)의 삶을 일구어 오고 있는지에 대하여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한 배경의 역사를 알아야 본문의 이해가 깊어질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 교포 유대인들이 소아시아까지 진출하여 회당을 중심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살게 된 역사적인 배경이 과연 무엇일까요?

(1)  첫째, 선민 유대인들은 주전 586년에 다윗왕조 유다 왕국이 망하고 나자 주후 1세기 사도 베드로의 시절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다윗왕조를 재건한 적이 없습니다. 한때 주전 140년경부터 80여년 동안 레위인들의 하스모니안 왕가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다 지역을 다스린 적이 있지만 그것은 다윗왕조가 아니었기 때문에 뚜렷하게 정통성을 지니고 있는 유다 왕국으로 선민 유대인들이 인정하고 있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2)  둘째, 주전 535년경 일부 유대인들이 페르시아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주전 516년 제2성전을 준공하고 유대 땅에서 선민의 사회를 재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과연 페르시아 제국에 흩어진 모든 다윗왕조 유다 왕국의 백성들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일까요? 분명히 제2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유대인들이 유대 땅에서 선민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에스라와 그의 제자들이 주장하면서 그렇게 역사를 기술하고 있지만 그것은 전체 유대인의 삶을 온전히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주전 6세기 후반에 예루살렘과 유대 땅으로 돌아온 망국의 백성들의 수가 너무나 적기 때문입니다. 전체 선민의 1할도 되지 못하는 정도의 유대인들만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제2성전을 매우 작은 규모로 건설했을 뿐입니다.

(3)  셋째, 바벨론 포로생활을 막 끝내고 고토로 돌아온 백성들은 재산이 없습니다. 따라서 페르시아의 황제가 자신들의 왕조와 제국의 번영을 빌기 위하여 변방 예루살렘에 보국사찰(報國寺刹)을 하나 지어준다는 생각으로 시주를 하였는데 그 재원을 가지고 겨우 그 옛날 솔로몬 성전의 4분의 1규모로 제2성전을 지은 것입니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주전 539년부터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이 되어 그 넓은 페르시아 제국에 흩어져서 자유민으로 대대로 살게 된 선민 유대인들의 삶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4)  넷째, 그들 해외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애환에 대하여 대표적으로 적고 있는 글이 성문서 에스더입니다. 주전 5세기 에스더의 기록은 여호와께서 페르시아 제국에서도 그 역사를 섭리하시며 특히 선민 유대인들을 보호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이방인 여러 민족들에게 똑똑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림절의 제정이 바로 그것입니다. 페르시아 제국에 살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이 회당을 중심으로 하나님신앙을 보전하고 있으며 특히 부림절에는 함께 모여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유대민족의 정통성과 하나님신앙의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는 유민들이 바로 페르시아 제국에 흩어져서 살고 있는 다윗왕조 유다 왕국의 후손들입니다.

(5)  다섯째, 그들 교포 유대인들의 수가 예루살렘과 유대 땅으로 돌아간 자들보다 10배나 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상당수가 훗날 패권국의 변화로 말미암아 자꾸만 서쪽으로 이동을 하고 있습니다. 소아시아에서 마케도니아와 헬라로, 그리고 로마시대가 되자 이제는 이태리까지 진출하고 있습니다. 나라를 잃은 백성들이기에 이방 땅에서 일종의 거류민으로 그리고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6)  여섯째, 그렇지만 그들은 한가지 자부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신앙을 이방인들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해외에서 회당을 중심으로 선민들의 삶을 살아가면서 히브리정경 두루마리를 보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절기가 되면 회당장과 레위인들이 앞장을 서서 예루살렘성전으로 순례를 떠나고 있습니다. 성전참배를 하고 상당기간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새로운 율법에 대한 해석을 듣고 와서 교포들의 회당에 출석하고 있는 동포들에게 종교교육을 계속적으로 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사도행전 제2장에 등장하고 있는 경건한 헬라파 유대인들입니다(2:5-13).

(7)  일곱째, 해외에 살고 있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회당문화를 만들고 또한 회당을 중심으로 하나님신앙을 지키면서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변화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주후 40년대부터 그들 교포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회당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기지가 되고 있습니다. 후속사도인 바나바와 바울이 먼저 서방선교에 나섰으며 그 뒤를 이어서 사도 베드로가 소아시아 동부와 북부의 고원지대를 방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8)  여덟째, 다민족으로 구성이 된 페르시아 제국은 개방적이고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패권국입니다. 인도에서부터 애굽에 이르기까지 그 영토는 광대합니다. 그들은 여러 민족을 별로 차별하지 아니하고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여 거대한 제국을 평화스럽게 다스렸습니다. 그 덕택에 선민 유대인들의 자손들은 성전이 아니라 회당을 중심으로 하여 이방 제국에서 하나님신앙을 지키고 유대교인으로서 살아갈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뒤를 잇고 있는 헬라제국과 로마제국은 더욱 개방적이며 만민평등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9)  아홉째, 그러한 시대가 계속이 되고 있으므로 교포 유대인들은 이제 매우 폐쇄적인 전통을 지니고 있는 자신들의 유대교도 변화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    그러한 분위기가 유대교의 개방과 개혁을 부르짖고 있는 힐렐학파의 주장을 해외의 회당에 퍼뜨리고 있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교 보수파인 본토 유대인들의 샴마이파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서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대 공회 내에서 개혁적인 힐렐학파의 주장은 크게 빛을 보지 못하고 맙니다.

2)    그러한 때에 변방 갈릴리에서 마치 핵폭탄과도 같은 만민구원사상과 영생구원 및 천국사상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들려오고 있습니다. 특히 그 새로운 사상이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섭리의 방향이라고 하는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무덤 속 부활로 생생하게 온 세상에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3)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고서 주장하고 있는 그 기독교의 교리에 경건한 헬라파 유대인들이 크게 동조하고 있습니다. 많은 교포 유대인들이 회당을 떠나서 교회를 건설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로마시대 주후 1세기 후반 시리아, 소아시아,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로마, 그리고 애굽 등지에서 발생하고 있는 대 사건입니다.  

4)    그러한 때에 로마시에서 사도 베드로가 이 글을 구술하고 있습니다. 이방 땅에서 수 백 년 동안 거류민으로 그리고 나그네로 살아오고 있는 교포 유대인들에게 이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 세상을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성도들이 어떠한 자세로 세상살이를 해야만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사랑하는 자들거류민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 성도들이 세상살이를 어떻게 영위하면 될까요? 특히 교포 유대인들과 그들의 교회에 참여하고 있는 이방인 성도들을 위하여 사도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①첫째, 거류민이나 나그네 같이 살아가라고 합니다. ②둘째, 영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합니다.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구체적으로 검토를 해보고자 합니다;

(1)  사랑하는 자들”(벧전2:11a); 사도 베드로가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요?

1)    예수님으로부터 누구를 사랑하라고 배운 것일까요? ①첫째,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동을 하고 있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입니다(8:21). ②둘째, 자신의 친지들과 동족 그리고 이방인들입니다. 그들 모두가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야 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차별을 하지 아니하고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5:44-48, 9:1-2).

2)    그런데 특별히 여기서는 사도 베드로가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이 서신을 작성하여 전해주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벧전2:11a)라고 부르고 있는 대상은 ①우선 제1장 제1절에 이 서신의 수신인으로 등장하고 있는 소아시아 북부와 동부의 초대교회의 성도들입니다. 그들 대부분은 교포 유대인들입니다. ②그 다음에는 이 서신의 사본을 받아 보게 될 로마제국 여러 지역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2)  거류민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벧전2:11b); 거류민과 나그네는 그 성격이 다릅니다. 법적으로 말하자면, 거류민은 거주권이나 영주권을 지니고 있는 자들입니다. 반면에 나그네는 방문객이거나 불법 체류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성도들을 거류민이나 나그네와 같다고 말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 모두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대대로 살고자 하는 욕심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하고 나면 영생의 하나님나라로 들어가기를 원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글 제11장을 참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11:13-14).

(3)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c); 성도들이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이 땅에서는 거류민이나 나그네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거류민으로 살아가는 경우와 나그네로 살아가는 경우가 조금 다르다고 하는 사실을 가지고 여기서 영혼의 소욕과 육체의 정욕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1)    성도의 영혼은 향년을 맞이하게 되면, 영생의 하나님을 찾아서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3:21, 23:46).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성도들의 심령과 그 보이지 아니하는 속사람 속에 성전을 짓고 계십니다(고전6:19). 삼위로 함께 거하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이시기에 성도들에게는 이미 영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내주 역사하고 계십니다(14:16-20). 그러므로 성도들의 구원과 영생 그리고 영적인 삶과 천국의 시민권도 영적으로는 성도들에게 벌써 확실한 것입니다. 그에 따라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영적인 나그네로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2)    그렇지만 향년을 맞이하게 되면 땅의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성도의 육신은 그것이 아닙니다. 땅을 소유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그 육신적인 욕심이 여전히 살아서 정욕으로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불멸의 영광을 얻고자 합니다. 따라서 성도들이 육신의 정욕에 지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종교적인 아성을 짓고 자신이 그 지배자가 되고자 획책하고 있습니다.

3)    그러한 차이점이 있기에 사도 베드로가 정욕적인 육신의 요구는 나그네가 아니라 이 땅에서 적어도 거류민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c)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6:12-14).

둘째로,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하게 가져 너희가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주님께서)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2:12); 사도 베드로가 선과 악에 대한 이야기를 성도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선과 악은 세상사람들이 흔히 말하고 있는 사회정의와 공동체의 통념에 근거하고 있는 선악의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창조주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피조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생명사랑에 대한 관념에서 비롯되고 있는 선과 악의 개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둘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1)  기본적으로 세상사람들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들의 집단에 이익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악이라고 하는 것은 집단의 이익을 해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선과 악의 기준이 자신이 소속된 사회의 집단 이기적인 정의입니다.  그런데 자기 집단에 이익을 가지고 오는 그 세상적인 선함과 정의라고 하는 기준이 다른 집단의 입장에서는 불의한 것이며 손해를 초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화가 한정이 되어 있고 부족한 세상에서 모두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그러한 선함과 의로움을 발견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2)  그에 비해서 창조주 여호와의 입장에서는 의로움이라고 하는 것이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전부 살릴 수 있는 공의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나 자기 집단만이 살고자 하여 남이나 타 집단을 죽이거나 상하게 하는 것은 그 어떠한 경우라고 하더라도 공의의 실천이 아니며 악한 것입니다. 그 반면에 모두를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희생을 스스로 감수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에 맞는 행동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속자의 삶입니다(12:1-2).

(3)  따라서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며 대속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성도들이 이방인들의 사회에서 처음에는 배척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 현지사회의 정의의 개념과 다른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게 되면 달라집니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대속의 삶만이 모두를 살릴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선함이며 진리라고 하는 사실이 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사도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하게 가져 너희가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주님께서)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2:12);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영혼을 살리기 위하여 대속의 삶을 살아가게 되면 처음에는 배척을 받겠지만 결국에는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인간의 모든 제도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벧전2:13-14);

(1)  사도 베드로의 주장이 선민 유대인들의 메시아 사상과 완전히 반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선민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인 로마제국을 물리치고 헤롯 왕가를 쫓아낼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 군정을 실시하고 있는 로마의 총독부도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주님의 뜻이 그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메시아사상을 버리라고 유대인 성도들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2)  선민과 이방인 모두를 구원하여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생의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방인 통치자들까지 미워하지 말고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19:4-6, 벧전2:13-14). 선민 유대인들을 지배하고 있는 이방인 통치자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백성들의 선함을 권장하고 악함을 징계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벧전2:14).

(3)  사실 고대사회에서 인과응보의 법칙과 권선징악의 사상이 선민사회이거나 이방인사회이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상관없이 모든 성도들은 하나같이 주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처럼 살아가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벧전2:13).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모두를 구원하기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한편 성도들이 대속의 삶을 삺아갈 때에 궁극적으로 이방세계 모든 이방인까지 회개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역사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 점을 사도 베드로가 본문에서 굳게 믿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베드로가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천국의 시민권만 생각하고 이 세상에서는 거류민이나 나그네처럼 살아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권면은 특히 예루살렘과 유대 땅을 떠나서 대대로 이방인들의 제국에서 삶을 일구어 오고 있는 교포 유대인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이 바로 디아스포라입니다. 오늘날 조국을 떠나서 해외에서 교포로 살고 있는 크리스찬들도 모두 디아스포라입니다. 오직 이방인들과 함께 살면서 복음을 전하고 민족이기주의를 넘어서는 인류사랑과 영혼구원을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으로 실천해 나가야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생각하면서 사도 베드로의 본문의 내용을 다시 한번 음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이 세상에 대대로 뿌리를 깊이 내리려는 육신의 탐욕과 정욕을 이기고 영생의 천국의 백성답게 나그네로 거룩하게 살아가시는 영적인 성도의 삶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