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강해 제14강(벧전2:9-10)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년 8월 6일(주일)
출애굽기 제19장의 선민,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의 개념이 사도 베드로에 의하여 어떻게 달리 선언이 되고 있는가?(벧전2:9-10)
사도 베드로가 구술하고 있는 본문의 내용부터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 가운데 시내 산 언약이 어떻게 언급이 되고 있는지를 알아 보고자 합니다.
많은 성도들에게 친숙한 본문의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2:9-10);
(1) 첫째,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을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백성 곧 선민으로 삼으실 때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임재시켜 준 것이 아닙니다. 시내 산 정상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강림을 하시고 산 기슭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잘 지키겠다고 언약식을 거행하는데 그치고 있습니다(출19:17-25, 20:18-21, 24:2-8).
(2) 둘째, 선민사회에 하나님의 영이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들에게 극히 한정적으로 임재하시게 됩니다. 예를 들면,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율법으로 전하고 신정국가를 이끌고 있는 왕과 같은 모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있습니다(출3:12, 4:14-17, 19:3, 34:28-35, 신34:10). 그리고 성령의 세례는 아니지만 제사장들과 왕에게 성소를 출입할 수 있도록 관유를 붓고 있습니다(출29:7, 21, 삼상10:1, 16:13). 그런데 선민 가운데 마치 모세처럼 하나님의 영에 감동을 받아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고 있는 자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선지자들입니다(사6:1-9, 겔1:1-3). 일찍이 모세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처럼 하나님의 영의 임재를 받아 여호와의 말씀을 깨닫는 선지자들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언급하고 있는데(민11:29) 그 일이 아주 제한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셋째, 모세는 출애굽기를 기록하면서 시내 산 언약의 핵심내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되,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19:3-6).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여호와의 말씀을 잘 듣고 여호와의 언약을 지키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제사장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환언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실천하는 언약의 백성은 이방인들의 속죄를 위하여 여호와께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나라가 되며 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의 본을 보여주는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 선민의 사명이자 의무라고 하겠습니다.
2) 그런데 역사적으로 선민이라고 자처하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변의 이방인들을 원수같이 미워하기만 했지 그들을 사랑하거나 이방인들의 속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려준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한 잘못을 시정하라고 선민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5:43-4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12:39).
3) 풀이를 해보자면, 요나처럼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고 그 회개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 그것이 선민들의 의무이며 사명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실천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으며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다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그러한 가르침을 천국복음으로 배운 사도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더 쉽게 설명해주고 있는 내용이 바로 본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다음과 같이 6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벧전2:9a); 선민 유대인들은 택하신 족속이 자신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정경의 해석을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그렇지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8:11-12). 혈통적으로 선민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하여 무조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그 뜻대로 정확하게 실천하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택하신 족속은 이제 혈통적인 선민 유대인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처럼 살아가고 있는 그 제자들인 성도들입니다. 그들 성도들이 여기서 사도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택하신 족속”(벧전2:9a)입니다.
(2)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벧전2:9b);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정국가에서 거룩한 기름부음을 받는 자들이 왕과 제사장들입니다(출29:7, 21, 삼상10:1, 16:13). 그런데 오순절날 함께 모여서 기도하던 120명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갈라져서 각자에서 성령님으로 임재를 하시고 내주 역사하시는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행2:1-4). 그것이 성령세례이며 그렇게 성령의 능력을 얻게 된 성도들이 예루살렘 시내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큰 일 행하심을 증거하게 되자(행1:8, 2:11-22) 드디어 초대교회가 건설이 되고 있습니다(행2:36-47). 그것이 전도와 선교의 시작입니다. 따라서 하나님나라의 건설이라는 측면에서 말하자면 성령세례를 받고 전도와 선교에 나서고 있는 성도들이 바로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그 점을 여기서 지적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벧전2:9b).
(3) “거룩한 나라요”(벧전2:9c);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세상에 전파하고 있는 성도들이 어떠한 백성들이 되고 그들의 공동체가 어떠한 사회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사도 베드로가 한 마디로, “거룩한 나라”(벧전2:9c)가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두가지입니다;
1) 첫째, 성도들이 말 그대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영을 모시고 살아가고 있다는 삶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육신의 욕심과 이익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것이 성화(聖化, sanctification)를 이루어가는 과정입니다.
2) 둘째, 교회라고 하는 성도들의 공동체가 세상적인 나라와는 달라야 합니다. 이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있는 공동체이므로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람이 먼저 교회에서 형제사랑으로 실현이 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이 세상에서도 어느 정도 보여줄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벧전2:9d); 성도들이 지상명령을 실천하면서 성화된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시작하고 그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거룩한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이 세상에 보여주기를 시작하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님의 백성이며 주님의 교회라고 하는 칭찬을 해주실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를 사도 베드로가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벧전2:9d)라고 여기서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5)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벧전2:9e);
1)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영적으로 깊은 어두움이 깃들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를 하지 못하고 또한 제대로 실천을 하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하나님 말씀을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기적으로 왜곡하며 변질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선민사상에 의거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민만 구원하고 선민들에게 현세적인 축복을 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2) 따라서 창조주 여호와의 말씀을 이방인들에게 전해주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축복을 이웃나라와 나누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사고하며 행동하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영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귀머거리이며 소경들입니다(사6:9-10). 그와 같은 영적인 어두움이 언제 이스라엘 사회에서 걷히게 될까요? 선지자 이사야의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선민사회가 황폐화되고 이방 땅에서 많이 고생한 다음에 그 그루터기에서 거룩한 씨가 싹이 날 것이라고 예언의 말씀을 주십니다(사6:11-13).
3) 마치 죽은 고목나무에서 꽃이 피는 것과 같은 기이한 여호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말세에 임하게 됩니다(벧전1:5). 만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 세상에 그리스도로 오심으로 말미암아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요1:14, 3:13-16).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빛이 백성들에게 비추어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요1:4-5, 9, 12-14). 사도 베드로는 여기서 성도들이 그 빛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이제 얻고 있다고 하는 의미에서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벧전2:9e) 은혜를 감사하고 있습니다.
(6)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f);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깨닫고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게 된 자들이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에 감사하여 이제부터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며 예수님의 제자를 양성하여 땅끝까지 파송하는 일입니다(마28:18-20). 그 점을 여기서 사도 베드로가 알기 쉽게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f)고 설명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2:10);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벧전2:10a);
1) 히브리정경 중 소선지서 호세아에 있는 내용을 사도 베드로가 참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선지자 호세아의 음란한 아내 고멜이 바람을 피워서 얻은 자녀가 세명입니다. 그 가운데 셋째가 아들인데 그 이름이 ‘로암미’입니다(호1:8-9). 여호와께서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하는 의미에서 그러한 이름을 작명하여 주신 것입니다(호1:9). 호세아가 살고 있는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이스라엘 10지파가 우상을 섬기고 그 마음이 여호와를 떠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선민의 자격을 박탈하셨다는 사실을 그렇게 선지자 호세아의 셋째 아들의 이름으로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2) 이제 이스라엘 10지파는 이방인과 똑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즉, 선민 이방인 상관이 없이 영적으로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따라서 모두가 하나같이 어두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영적인 어두움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 여호와의 생명의 빛이 기이하게 비쳐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혈통에 의한 구원이나 율법의 행위로 인한 구원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진심으로 대속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요1:12-14). 그렇게 그리스도를 만난 자들이 성도들이며 그들이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주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하고 있습니다(행1:8). 사도 베드로는 여기서 초대교회의 성도들이야 말로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벧전2:10a)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2:10b);
1) 호세아의 음란한 아내 고멜이 둘째를 낳았습니다(호1:6a). 선지자인 호세아의 자녀가 아니라 따지고 보면 아내가 바람을 피워서 얻은 딸입니다(호3:1-3, 5:7). 그 딸의 이름을 여호와께서는 ‘로루하마’로 지으라고 지시하십니다(호1:6b). 그 의미는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을 것임이니라”(호1:6c)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이스라엘 10지파를 버리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긍휼을 베푸십니다. 의사 누가의 복음서를 참조하면, 그와 같은 만민구원이라는 복음의 뜻이 아기 예수님을 통하여 예루살렘성전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눅2:22-38).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께서 8일만에 할례를 받으시고 40일이 지나자 부모님에 의하여 예루살렘성전에 들어가십니다. 그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①하나는 아들을 낳은 지 40일이 지났으므로 산모인 마리아가 제사장에게 제물을 주고 정결의 제사와 속죄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것입니다(레12:1-8, 눅2:24). ②또 하나는 아기 예수님을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기 위한 것입니다(출13:2, 눅2:23).
3) 사실 아기 예수님은 태어나신 지 8일만에 할례를 받으시고 베들레헴에서 다윗의 자손인 목수 요셉의 장남으로 호적정리가 되었습니다(눅2:21). 그러므로 레위 지파가 아니라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이미 등재가 된 아기 예수님을 구태여 성전으로 데리고 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것으로 바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민수기 제3장의 율법규정에 의하여 그 옛날 12지파의 조상들이 속전(贖錢)을 모세에게 주고서 레위인들을 장남 대신에 한꺼번에 여호와의 것으로 바쳤기 때문입니다(민3:41-51).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수 요셉과 마리아는 장남 예수를 성전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바치고 있습니다(눅2:23).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4) 선민 유대인들의 율법조항에 따르면 레위인들을 제외하면 예루살렘성전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일을 다른 지파의 후손들이 수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안식일에 성전이나 회당의 예배에 참석을 하고 3절기를 지키며 대 속죄일의 제례의식에 참여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사내아기는 태어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고 율법생활을 영위하면 됩니다. 그런데 의사 누가는 그의 복음서 제2장에서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부모님에 의하여 레위인처럼 여호와 하나님께 바쳐지는 절차를 거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눅2:23). 그것이 깊은 영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한 마디로, 복음의 시작입니다.
5) 이제는 레위인이거나 유대인이거나 아니면 이방인이거나 상관이 없습니다. 자신의 영적인 아버지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믿고 있는 성도라고 한다면 예수님처럼 자신의 삶을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데 바치는 것이 복음적인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거듭난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이 다시 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2:10b). 그것이 사도 베드로의 지적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날에도 대속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믿고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성도들에게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성도들에게 내주 역사하심으로써 거듭난 영적인 삶이 가능해지고 있습니다. 그 대속의 은혜와 성령님의 능력으로 성도들이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놀라운 은혜와 능력을 부여해 주십니다. 그러한 영적인 장치가 되어 있기에 성도들이 오늘날에도 자신들의 성화를 이루며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고 이방인들을 구원하는 대속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요컨대, 아버지 하나님의 긍휼을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충만하게 맛보게 된 성도들은 이제 온 세상에 그 긍휼과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지 아니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끝까지 주님의 제자답게 복음의 일꾼으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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