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후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베드로전서 강해 제5강(벧전1:8-9)(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1. 1. 03:59

베드로전서 강해 제5(벧전1:8-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7 27()

 

사도 베드로가 시사하고 있는 믿음의 정의는 무엇인가?(벧전1:8-9)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적으로 아는 것만으로는 결코 궁극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본문에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벧전1:8-9). ,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구속자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영적으로 정확하게 아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영적인 믿음이 예수님과 3 6개월 동안이나 공생애를 함께한 12사도들에게도 처음에는 없었습니다(26:31). 그리고 예수님의 남동생들인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에게도 없었습니다(7:3). 물론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의 주민들에게도 없었습니다(13:58).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육신적으로만 친하게 알고 지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 골고다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실 때에 그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갔습니다(14:50). 다윗의 후계자로서 그것도 하나님의 능력을 지닌 메시아로서 자신들이 보는 앞에서 멋있게 외세인 로마제국과 헤롯왕가를 물리치고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는 줄 잔뜩 기대를 했다가 그것이 아닌 것을 알고서는 모두들 배신감을 느끼고서 예수님을 떠나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예수님을 선민을 구원하는 다윗과 같은 큰 영웅으로 바라본 것이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유일한 구원자로 믿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환언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를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속죄하고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상관없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들을 모두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이해한 것이 결코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사도 베드로가 강조하고 있는 믿음이란 한 마디로, 육신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현세적인 환난과 핍박을 통과하고 난 뒤에 얻을 수 있는 영생의 영광과 천국의 즐거움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적인 눈으로 보면 보이지 아니하지만 성령님 안에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면 성도들이 궁극적으로 희구하고 있는 영생의 소망과 천국의 즐거움이 이미 현실적인 기쁨으로 성도들에게 밀려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벧전1:8-9).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1:8); 다음과 같이 세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벧전1:8a);

1)    사도 베드로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에 초대교회에 들어와서 신앙생활을 함께하고 있는 성도들은 참으로 귀한 형제 자매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대다수가 공생애 당시의 예수님을 직접 만난 경험이 전혀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2)    베드로 자신은 예수님과 함께 3 6개월간 공생애를 살았으며 또한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서 40일 동안 재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베다니에서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본 증인입니다(24:50-51). 따라서 그의 믿음은 체험적인 것이며 예수님의 생전의 교훈과 그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이 너무나 생생합니다.

3)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나 다른 11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구주로 믿고 그 복음을 실천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다음에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서 초대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성도들은 하나같이 그러한 생전의 예수님에 대한 기억과 추억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4)    그 비결은 한 마디로, 그들이 육신적인 믿음이 아니라 영적인 믿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역사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지도 않았는데 자신들의 구주로 영접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사도들이 전해주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신들의 죄를 회개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5)    그 믿음이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그와 같은 이치를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씀해주신 것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20:28-29). 그것은 한 마디로, 영적인 믿음입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육신의 눈으로 보지 아니하고도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벧전1:8a). 요컨대,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의 말씀과 생애를 자신을 구원하는 유일한 복음으로 굳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2)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벧전1:8b);

1)    여기서 사도 베드로가 이제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지금 이와 같은 환난과 핍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로마제국의 핍박이 로마시를 위시하여 여러 속국에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특히 사도 베드로가 거쳐온 소아시아 북부와 동부의 교회들에 대하여 심한 박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의 성도들이 모진  환난 가운데에서도 좌절하지 아니하고 믿음생활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2)    사도 베드로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어려움과 핍박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과 주님의 승리를 영적인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곳의 성도들이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과감하게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벧전1:8b)라고 서술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1:8c);

1)    영적인 믿음의 눈이 열리게 되면 보이지 않는 미래의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란 육신적으로 시공간에 갇혀 있지만 그 영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시공간을 초월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시각에서 사도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1:8c);

2)    구체적인 예를 집사 스데반의 마지막 설교와 그 순교의 순간에서 다음과 같이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7:54-60).

둘째로,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9);

(1)  사도 베드로가 믿음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한 마디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의 구원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벧전1:9 의역). 흔히 사람들은 현세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구원이란 그러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2)  초대교회 시절부터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고자 하는 구원은 영생의 구원이며 영혼의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현세적이고도 육신적인 구원의 차원을 진작에 넘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의 구원이 없이 그냥 영혼의 구원만을 받는 것이 온전한 구원일까요? 그것 역시 반쪽 구원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특징은 영과 육이 하나로 되어 있는 생령이기 때문입니다(2:7).  

(3)  온전한 구원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무덤에서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그 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직후에 예루살렘에 모여서 벌벌 떨고 있는 사도들을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을 체포한 유대교지도자들이 자신들도 잡으러 오지 않을까 염려하여 모든 출입문과 창문까지 모두 잠그고 숨어 있는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 마치 환상처럼 방안 가운데 들어서십니다(20:19). 그들은 하나같이 놀라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러한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요?

(4)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시공간에 갇혀 있는 몸 곧 향년을 맞이하게 되면 벗어버리게 되는 인간의 육신을 더 이상 입고 계신 것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통하여 새로이 입게 되신 육신은 전혀 새로운 것입니다. 그것은 시공간을 자유스럽게 이동할 수가 있으며 제자들과 함께 식사도 할 수가 있으며(21:13-15) 심지어는 그 새로운 육신을 입으시고 천국으로 승천까지 하시게 됩니다(1:9). 그와 같은 창조주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예수님의 부활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5)  그러므로 이제 성도들도 남은 인생을 예수님처럼 살아가게 되면 그러한 부활과 승천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 베드로가 알기 쉽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9). 요컨대, 성도들의 믿음의 목표는 예수님처럼 영생의 몸을 입고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영혼의 구원입니다.

결론적으로, 영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천지만물과 인류를 창조하십니다(1). 특히 마지막 날에는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셔서 생령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2:7). 창조주 하나님의 생기가 그 코에 머물러 있기에 인간들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그 영혼이 육신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생명이란 영적인 것이라고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6:63),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8:11).

창조주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든 인간의 육신을 치유하고 다시 살리는 것은 쉽습니다. 그것은 동물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입니다(1:20-21, 24-25). 그러나 영혼을 가진 사람을 만드는 과정을 쉽지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올바른 교제를 하며 그 말씀을 따라서 만물을 관리하는 선한 청지기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2:8, 15-17).

실제로 믿음으로 현세적인 육신의 탐욕과 이기심을 이겨내고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한다고 하는 것이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3:1-7). 그러므로 성도들의 믿음의 승리 곧 영적인 승리가 귀한 것입니다. 그에 따라 이 세상을 이긴 믿음의 성도들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로 천국에 받아 들이고 그 영혼에 어울리는 영생의 새로운 몸까지 만들어 주신다고 하겠습니다(21:6-7, 8:11).

그러므로 아무쪼록 그와 같은 믿음의 승리와 영생의 부활을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