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규와 아끼꼬(손진길 소설)

상규와 아끼꼬13(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2. 12. 3. 05:06

상규와 아끼꼬13(손진길 소설)

 

찰스와 케이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뉴욕으로 이주를 한 때가 19578월경이다. 그때 찰스 하야시 맥도웰 26세이고 그의 부인 케이트 맥도웰29세이다. 뉴욕에서 찰스 맥도웰은 역시 하이스쿨 역사선생으로 일하고 케이트 맥도웰은 종합병원 간호사로 근무하게 된다;

그들 젊은 부부의 슬하에는 벌써 11녀의 자녀가 있다. 그들이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을 때에 낳은 아들과 딸이다. 1953년생인 아들의 이름이 피터 하야시 맥도웰(Peter Hayashi McDowell)이고 1955년생인 딸의 이름이 한나 하야시 맥도웰(Hanna Hayashi McDowell)이다.

그 가운데 피터 하야시 맥도웰이 임상규의 아내인 1973년생 아끼꼬 하야시 맥도웰(Akiko Hayashi McDowell)의 부친이다. 그런데 아끼꼬는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자신의 이름을 임상규(林尙奎)에게는 일본어와 한자 그리고 영어를 사용하여 하야시 아끼꼬 맥도웰(林秋子 McDowell)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다.

그 뜻은 자신도 성씨가 ()씨라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같은 성씨를 사용하고 있는 임상규에게 끌렸는지도 모른다. 아끼꼬는 그렇게 맥도웰이라는 미국성씨보다는 하야시라고 하는 임씨 성을 선택하여 임상규의 아내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세워가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끼꼬가 그날 오클랜드에서 임상규에게 설명하고 있는 부친 피터 하야시 맥도웰의 이야기가 다음과 같다; “아버지 피터(Peter)4살 때부터 뉴욕에서 자랐어요. 그래서 자신을 언제나 뉴요커’(New Yorker)라고 자랑스럽게 불렀어요. 하기야 유치원(kindergarten)은 물론 초등학교(primary school)에 들어가서 하이스쿨(high school)까지 전부 뉴욕에서 마쳤으니 그렇게 말할 수가 있지요. 그런데… “;

그 다음에 아끼꼬임상규에게 설명하고 있는 부친 피터의 스토리가 참으로 흥미롭다. 그 이야기의 대략이 다음과 같은 것이다; 피터 하야시 맥도웰(Peter Hayashi McDowell)은 뉴욕시를 참으로 사랑한 사람이다. 그가 유년시절부터 살게 된 뉴욕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문물이 발달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피터는 가끔 모친 케이트가 가족들에게 그 옛날의 뉴욕을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내가 친정아버지 윌리엄의 손에 이끌려서 처음으로 미국 본토의 가장 큰 도시 뉴욕을 방문한 때가 세계 제2차대전이 모두 끝난 다음해 곧 1946년이었어요. 그때 벌써 뉴욕은 세계 최고였지요!... “.

가족들이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보고서 다음과 같이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이다; “그때가 나는 하와이에서 하이스쿨을 마치고 대학에서 간호학을 막 공부하기 시작한 18살의 나이였어요. 그때 내가 거대한 뉴욕을 보고서 나는 나중에 여기서 살아야 되겠다고 결심했어요. 뉴욕이 세계 제1의 도시, 곧 모든 학문과 유행의 중심지이며 경제의 중심지이니 나의 꿈을 여기서 펼쳐보고 싶었거든요, 호호호… “;

그와 같이 말하면서 모친 케이트는 가족과 함께 뉴욕에 살고 있는 것을 만족스럽게 여기며 정말 즐거워했다. 그런데 피터가 하이스쿨에 들어갔을 때에 뉴욕의 젊은이들의 사조가 크게 변하고 있다.

그것이 1960년대 후반에 일어난 소위 히피’(hippie) 문화이다. 길거리로 뛰쳐나온 히피청년들이 미국정부의 무력과 권위에 대한 저항의식 그리고 비폭력 자연평화주의에 물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훗날 포스트 모더니즘’(post modernism)과 맥이 닿아 있다;

한편 전후의 미국은 세계 최강이며 가장 부유한 나라이다. 세계 제2차대전 이전에 세계의 중심이 유럽의 영국과 프랑스였다고 한다면 유럽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세계의 중심이 북아메리카의 미국으로 옮겨진 것이다. 전세계적으로는 대영제국(British Empire)의 영광이 사라지고 이제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시대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역사학을 전공한 찰스 하야시 맥도웰은 가족들에게 그 이유를 두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세계 제1차대전과 제2차대전 당시 두번의 유럽전쟁을 치르고 나자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독일이 경제적으로 몰락하고 만 것이다. 게다가 부유한 가문들이 대거 미국으로 이주하고 만 것이다.

또 하나는, 독일에게 군사적으로 밀리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에서 군사와 군비를 조달한 것이다. 그 대가로 전후에 독립을 허용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렇게 자체적으로 우선 급한 불을 끄고서 영국과 프랑스가 세계의 패권을 신흥강국 미국에게 넘겨준 것이다;

그러므로 19458월에 마지막으로 항전하고 있던 일본제국이 항복을 선언하자 그때부터 미국은 세계최강의 국가가 되고 그들의 경제중심지 뉴욕시는 세계최고의 도시가 되고 있다. 그러한 실정이므로 1957년 여름부터 뉴욕시에서 살고 있는 피터의 가족은 행복한 것이다.

그러한 풍요와 번영을 누리고 있는 미국이 갑자기 1965년부터 동남아의 신생국 월남과 월맹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는 민족 간의 전쟁에 대대적으로 참전하고 있다. 그것도 유엔군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미국이 독자적으로 자신의 동맹국을 동원하여 이른바 다국적군’(multinational army)을 형성하여 그 국지전에 개입한 것이다;

그 결과 매년 얻고 있는 것이 미국 젊은이들의 희생 뿐이다. 경제적 정치적으로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아까운 미국청년들의 피만 그곳에 뿌리고 있으니 자연히 미국내에서는 반전운동(反戰運動)이 발생하고 있다.

전후의 미국은 지상최고의 부국이며 세계최강의 군사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미국이므로 제3세계 가난한 나라에서 발생한 월남전쟁 정도는 단숨에 끝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현실은 그러하지가 못하다.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그 이유를 하이스쿨에서 세계사를 가르치고  있는 부친 찰스 맥도웰이 다음과 같이 처자식에게 말하고 있다; “1950년에 발생한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나는 똑똑하게 한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 그것이 바로 다민족사회 이민국가인 미국과 하나의 민족으로 수천년을 살아온 단일민족국가는 그 결속력에 있어서 엄청 다르다는 점이지. 그러니… “;

찰스 결론을 맺고 있다; “아무리 미국의 군사력이 막강하다고 하더라도 민족통일을 염원하고 있는 공산주의 집단지도체제의 이념국가 월맹의 군대 베트콩을 상대하여 쉽게 승리를 얻을 수는 없을 거야. 한국전쟁에서도 승리를 얻지 못했으니 이번에 월남에서도 그러할 것으로 나는 보고 있어!... “.

피터는 아직 피가 끓고 있는 10대 후반의 젊은 나이이다. 그리고 최고의 번영기를 누리고 있는 뉴욕에서 성장한 청년이다. 그러므로 그는 한국전쟁에 참여한 경험에 비추어 그렇게 설명하고 있는 부친 찰스의 견해에 완전히 승복할 수가 없다. 따라서 그는 하이스쿨만 마치면 자신도 군에 지원하여 월남전에 한번 뛰어들고 싶어한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피터1971년에 하이스쿨을 졸업한다. 그리고 그는 하이스쿨에서 사귄 일본계 미국인 여성 히로꼬 윌슨( Wilson)과 1972년에 결혼을 한다. 그 이유는 두사람이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아기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피터는 이듬해 1973년에 딸 아끼꼬가 태어나는 것을 보고서는 군에 입대하여 곧바로 월남전에 참전을 한다. 그는 일년간 월남에서 복무를 하고 미국으로 돌아온다. 피터는 일년동안 월남에서 전쟁을 치른 결과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고 있다. 그것은 역시 부친 찰스의 말씀이 옳았다는 것이다;

피터 자신은 뉴욕에서 자라났기에 항상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세고 부유한 나라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그러나 그 신화가 동남아의 밀림지역에서 깨어진 것이다. 자연의 힘과 단일민족의 힘이 이익집단으로 똘똘 뭉친 다민족사회 이민국가 미국의 힘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1974년부터 피터는 미국정부가 참전용사에게 주는 특혜를 활용하여 뉴욕 컬럼비아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한다. 그는 아예 대학원과정에서 동남아의 국가들과 미국과의 관계에 대하여 계속 공부하고 연구한다. 그 결과 10년후인 1984년부터 피터 하야시 맥도웰이 그 분야의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정부의 관료로 일하게 된다;

그렇게 지내는 가운데 1973년에 태어난 딸 아끼꼬 외에 아내 히로꼬에게서 1976년에 아들 하나를 얻게 된다. 그 이름이 브라이언(Brian)이다. 물론 그의 풀 네임은 브라이언 하야시 맥도웰(Brian Hayashi McDowell)이다.

피터와 히로꼬 부부는 1984년부터 부모님의 집을 떠나 독립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피터가 정부의 관료가 되어 수도인 워싱턴DC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5년이 지나자 1989년에 그들은 다시 뉴욕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왜냐하면, 피터가 정부관료의 경력을 인정받아 모교인 컬럼비아대학에서 정치학교수로 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터와 히로꼬의 딸 아끼꼬1984년부터 1989년까지 5년의 세월을 제외하면 학창시절을 전부 뉴욕에서 보내고 있다. 특히 뉴욕에서 하이스쿨을 마치고 그녀 역시 컬럼비아대학으로 진학을 한다. 그리고 아끼꼬는 일본어와 일본문학을 전공한 것이다;

 그녀는 어째서 그러한 전공을 선택하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