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강해 제237강(렘46:1-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9년 1월 14일(월)
유다 왕 여호야김 4년인 주전 605년에 느부갓네살 황제의 갈대아 군대에 의하여 바로 느고의 시리아 주둔군이 대패를 하고 있는데 그러한 패배가 다시 발생할 것임을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예언하고 계시는가?(렘46:1-7)
선지자 예레미야는 다윗왕조 유다 왕국에 이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치신다고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애굽에 대한 여호와의 징벌은 언제부터 시작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 그 징계는 벌써 유다 왕 여호야김 4년인 주전 605에 시작이 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로, 주전 664년에 앗수르제국의 아슈르바니팔 황제가 애굽 정벌에 나서서 바로를 죽이고 애굽의 제25왕조를 멸망시킵니다. 그 결과 애굽에서는 친(親) 앗수르 성향의 제26왕조가 출범하게 됩니다;
1) 그렇지만 주전 612년에 메대와 바벨론의 연합군의 기습공격에 의하여 앗수르제국의 수도인 니느웨가 함락이 되자 애굽의 바로의 생각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는 앗수르를 도와주는 척하면서 유프라테스강 상류의 요새지 갈그미스를 차지하고 차제에 시리아 땅을 얻고자 합니다. 따라서 주전 609년에 바로 느고가 대군을 이끌고 북상한 것입니다(왕하23:29a).
2) 당시 유다의 성군 요시야도 국제정세의 변화를 읽고서 차제에 사마리아 땅을 상당히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가 넓힌 사마리아 땅을 지키기 위하여 해변길을 따라 북상하고 있는 애굽의 바로 느고의 군대를 막고자 므깃도에 군사를 배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시야 왕의 시도는 실패하고 맙니다. 바로 느고가 므깃도에서 유다의 군대를 쳐부수고 요시야 왕에게 중상을 입힌 것입니다. 신하들이 요시야 왕을 급히 예루살렘으로 후송하지만 도중에 그만 죽고 맙니다(왕하23:39b).
3) 바로 느고는 일단 사마리아 지역을 점령한 다음 다시 북상하여 갈그미스와 시리아 땅을 차지하고 맙니다. 그 다음에 유다 왕국을 침범하여 여호아하스 왕과 주전파 신하들을 잡아가고 괴뢰정권의 수장으로 여호야김 왕을 세우게 됩니다(왕하23:33-35). 그러나 바로 느고의 빛나는 승리의 역사는 단 4년간에 그치고 맙니다. 왜냐하면, 주전 605년에 그가 차지한 모든 땅을 신바벨론의 새로운 황제 느브것네살에게 전부 빼앗기고 말기 때문입니다.
(2) 둘째로, 요시야 왕의 조부인 므낫세 왕이 다윗왕조의 역사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가장 악한 왕입니다(왕하21:11-13, 23:26). 우상숭배와 탐욕이 지나치자 유다의 백성들이 므낫세 왕을 닮아 사악해지고 맙니다(왕하21:9). 그때문에 예루살렘에 무죄한 백성들의 피가 너무 많이 흘러내려서 그 옛날 아모리 족속의 경우보다 심합니다(왕하21:11, 16);
1) 선민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아니하시고 동일하게 공의의 정신으로 처벌하시는 창조주 여호와께서는 그 모습을 보고서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고자 하십니다(왕하21:10-15). 따라서 성군 요시야가 주전 612년 이후에 사마리아 지역으로 진출하지만 주전 609년에 바로 느고에게 그 땅을 다시 빼앗기고 요시야 왕도 죽고 마는 비극이 발생하고 있습니다(왕하23:29).
2) 유다 왕국이 멀지 않아 신바벨론제국 느부갓네살 황제에 의하여 망하고 나면 그 다음은 여호와께서 동일하게 애굽을 치실 것입니다. 따라서 주전 605년에 즉위한 신바벨론제국의 느부갓네살 황제가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 앗수르 부흥운동을 펼치고 있는 잔당들을 완전히 토벌하고 그 여세를 몰아 갈그미스와 시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바로 느고의 군대를 모조리 쳐부수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3) 애굽은 사마리아까지 갈대아 군대에게 내주고 자신들의 본토를 방어하기에 급급합니다. 느부갓네살 황제는 말머리를 동쪽으로 돌려 바로 느고를 섬기고 있는 유다의 여호야김 왕을 치게 됩니다. 여호야김 왕은 얼른 항복을 하고서 주전 605년부터는 느부갓네살 황제를 주군으로 섬기고 매년 조공을 바치기로 맹세를 하고 마는 것입니다.
(3) 셋째로, 본문에서는 주전 605년에 발생하는 느부갓네살 황제의 갈대아 군대와 바로 느고의 애굽 군대와의 전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애굽에 관한 것이라. 곧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4년에 유브라데 강가 갈그미스에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패한 애굽의 왕 바로 느고의 군대에 대한 말씀이라. 너희는 작은 방패와 큰 방패를 예비하고 나가서 싸우라. 너희 기병이여, 말에 안장을 지워 타며, 투구를 쓰고 나서며, 창을 갈며 갑옷을 입으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본즉, 그들이 놀라 물러가며, 그들의 용사는 패하여 황급히 도망하며, 뒤를 돌아보지 아니함은 어쩜이냐? 두려움이 그들의 사방에 있음이로다. 발이 빠른 자도 도망하지 못하며, 용사도 피하지 못하고, 그들이 다 북쪽에서 유브라데 강가에 넘어지며 엎드러지는도다. 강의 물이 출렁임 같고 나일 강이 불어남 같은 자가 누구냐?”(렘46:2-7).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말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1) 첫째, 유다 왕 여호야김4년 곧 주전 605년에 갈그미스와 북부 시리아에서 갈대아 군대와 애굽 군대 사이에 전쟁이 발생합니다.
2) 둘째, 여호와께서는 다윗왕조 유다 왕국의 우상 섬김과 여호와 앞에 죄악 행함을 더 이상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느부갓네살의 갈대아 군대를 불러서 처벌하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애굽과의 전쟁에서도 신바벨론의 느부갓네살 황제에게 승리를 주고 계십니다.
3) 셋째, 애굽 군대는 중무장을 하고 있습니다. 적의 화살과 창을 막기 위하여 작은 방패와 큰 방패를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기마대는 빠른 말을 타고서 창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갈대아 군대의 편을 들고 계시기에 애굽의 군대는 겁을 집어 먹고 도망치기에 바쁜 것입니다.
4) 넷째, 애굽 사람들은 자주 나일강의 범람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프라테스 강물이 크게 출렁이며 갈대아 군대가 물밀듯이 덮쳐오자 그만 오금이 저려 오고 있습니다. 변변히 대항도 못하고 전속력으로 도망을 치기에 바쁩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패전입니다. 여호와께서 먼저 애굽부터 치시고 70년 후에 신바벨론을 치시고자 작정하셨기에 그와 같은 어이가 없는 역사가 발생하고있는 것입니다(렘25:11-12, 19, 25, 29, 롬11:33-36).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이방나라들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애굽에 관한 것이라. 곧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4년에 유브라데 강가 갈그미스에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패한 애굽의 왕 바로 느고의 군대에 대한 말씀이라”(렘46:1-2);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이방나라들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애굽에 관한 것이라”(렘46:1-2a); 주전 586년에 마지막 선민의 나라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이 여호와의 진노와 재앙으로 말미암아 신바벨론 갈대아 군대에 의하여 역사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이제는 유대인들처럼 여호와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고 자신들의 세상적인 탐욕과 육신적인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우상에게 복을 비는 이방인들을 동일하게 여호와께서 처벌하고자 하십니다(렘25:15-29, 46:1). 그 시작이 바로 애굽이라는 사실을 여기서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밝히고 계시는 것입니다(렘46:2a).
(2) “곧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4년에 유브라데 강가 갈그미스에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패한 애굽의 왕 바로 느고의 군대에 대한 말씀이라”(렘46:2b);
1) 신바벨론제국의 갈대아 군대와 애굽제국의 바로의 군대 가운데 어느 쪽이 훨씬 우세할까요? 세상적으로 전력을 평가하자면 별로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전쟁의 승패는 다른 두가지 요소에 의하여 결판이 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①하나는, 정신 전력입니다. 어느 쪽이 더 결사적이며 동기부여가 확실한가? 하는 것입니다. ②또 하나는,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분은 창조주이시며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풀이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2) 첫째, 신바벨론제국의 느부갓네살 황제는 앗수르제국의 잔당을 모두 소탕하고 명실공히 메소포타미아의 패권국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앗수르제국의 모든 땅은 자신의 신바벨론제국의 영토로 편입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 가운데 시리아와 애굽이 아직 정복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느부갓네살 황제는 그 땅들을 전부 점령하기 위하여 필사적입니다.
3) 둘째, 애굽의 바로의 입장은 좀 다릅니다. 그는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놓고서 앗수르와 신바벨론이 전투를 하고 있는 틈을 타서 쉽게 시리아 땅과 그 땅을 지배하고 있는 갈그미스 요새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잘 지키라고 애굽의 군대를 주둔시키고는 있지만 그것은 워낙 쉽게 차지한 여분의 땅이므로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그렇게 필사적이지가 않습니다. 그저 부자가 몸조심하는 정도의 정신전력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필사적인 갈대아 군대에게 밀리고 있습니다.
4)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신바벨론제국 느부갓네살 황제의 갈대아 군대를 동원하여 우상을 섬기며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있는 유다 왕국과 애굽제국을 치시겠다고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예언하고 계십니다(렘44:13-14). 따라서 그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하여 애굽제국과 신바벨론제국 사이의 전쟁에 있어서는 느부갓네살 황제의 손을 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애굽 군대가 갈대아 군대를 보자 마자 혼비백산하며 무조건 두려워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렘46:5).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요단 강을 건너 여리고로 접근하자 그 성의 주민들이 싸워보기도 전에 간담이 서늘하여 무조건 패배의식에 빠져버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수2:8-11).
둘째로, “너희는 작은 방패와 큰 방패를 예비하고 나가서 싸우라. 너희 기병이여, 말에 안장을 지워 타며, 투구를 쓰고 나서며, 창을 갈며 갑옷을 입으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본즉, 그들이 놀라 물러가며, 그들의 용사는 패하여 황급히 도망하며, 뒤를 돌아보지 아니함은 어쩜이냐?”(렘46:3-5b); 역시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너희는 작은 방패와 큰 방패를 예비하고 나가서 싸우라. 너희 기병이여, 말에 안장을 지워 타며, 투구를 쓰고 나서며, 창을 갈며 갑옷을 입으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46:3-5a); 여호와께서는 바로의 군대에게 완전무장을 하고 전력투구를 하여 원없이 한번 싸워보라고 말씀하십니다(렘46:5a). 구체적으로, 적의 화살을 막는 큰 방패 그리고 적의 창과 칼을 막는 작은 방패를 모두 손에 쥐고서 전진을 하라는 것입니다(렘46:3). 기병대는 갑옷을 입고 큰 말 안장 위에 올라타고서 투구를 머리에 쓰고 날카로운 긴 창을 손에 쥐고 적진을 향하여 힘차게 달려나가라고 말씀하십니다(렘46:4). 그들은 전쟁의 승리를 얻기 위하여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승리를 얻을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과연 그들이 믿고 있는 대로 승리가 찾아올까요?
(2) “내가 본즉, 그들이 놀라 물러가며, 그들의 용사는 패하여 황급히 도망하며, 뒤를 돌아보지 아니함은 어쩜이냐? ”(렘46:5b);
1) 전쟁에서의 승패는 반드시 무장의 정도와 군사들의 훈련의 정도에 상대적으로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온전히 여호와의 역사섭리에 따라 결정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애굽의 군사들에게 완전무장을 하고 원없이 전투를 잘 치러보라고 말씀하십니다(렘46:3-4). 그리고 나서 한가지 사실을 분명히 깨달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하게도 전쟁의 승패가 그렇게 사람들의 철저한 준비와 우세에 따른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2) 요컨대,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시는 분이 따로 계십니다. 그 분이 ‘바로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이십니다(출17:10-16). 전쟁마당에서 여호와께서는 신바벨론 갈대아 군대의 편을 들고 계시기에 아무리 애굽의 군대가 애를 써도 소용이 없습니다. 따라서 적에게 겁을 집어 먹고 두려워서 자신들도 모르게 앞다투어 도망을 치기에 바쁜 것입니다(렘46:5b).
셋째로, “두려움이 그들의 사방에 있음이로다. 발이 빠른 자도 도망하지 못하며, 용사도 피하지 못하고, 그들이 다 북쪽에서 유브라데 강가에 넘어지며 엎드러지는도다. 강의 물이 출렁임 같고 나일 강이 불어남 같은 자가 누구냐?”(렘46:5c-7); 역시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두려움이 그들의 사방에 있음이로다. 발이 빠른 자도 도망하지 못하며, 용사도 피하지 못하고, 그들이 다 북쪽에서 유브라데 강가에 넘어지며 엎드러지는도다”(렘46:5c-6);
1) 여호와께서는 갈대아 군대에게 엄청난 자신감을 불어 넣고 계십니다. 반면에 바로의 군대에게는 열패감과 적에 대한 근거 없는 두려움을 잔뜩 불어 넣고 계십니다. 따라서 전쟁마당에서 바로의 군대는 사방에 적이 끊임없이 덮쳐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유프라테스 강 상류의 요새지 갈그미스를 적에게 내어주고 살기 위하여 애굽을 향하여 남쪽으로 도망을 치기에 바쁩니다(렘46:5c-6).
2) 시리아에서 사마리아를 거쳐 해변길로 애굽에 들어갈 때까지 얼마나 많은 바로의 군사들이 갈대아 군대에게 희생이 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 결과 바로가 나일 강 유역에서 패잔병 애굽의 군대를 재정비하고 있지만 그 수가 너무 적습니다. 그 때문에 동쪽 국경을 제대로 지키지를 못하고 ‘믹돌’과 ‘다바네스’를 적에게 내주게 됩니다(렘44:1). 하(下) 이집트의 수도인 ‘놉’에서 전열을 가다듬어 갈대아 군대와 격전을 벌이지만 역시 역부족입니다. 따라서 바로의 군대는 상(上) 이집트의 요새지 ‘테베’에 집결하여 갈대아 군대와의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2) “강의 물이 출렁임 같고 나일 강이 불어남 같은 자가 누구냐?”(렘46:7);
1) 애굽에서 현인신으로 추앙을 받고 있는 바로입니다. 바로는 천하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고 백성들이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로의 눈은 하늘을 나는 매의 눈과 같다고 하여 ‘호루스의 눈’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바로는 이집트의 주신인 태양신 ‘라’의 아들이므로 ‘파라오’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는 이디오피아에서 수단을 거쳐 이집트에 이르고 있는 그 장대한 강 나일의 지배자 악어와 같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2) 그렇게 살아 있는 신으로 추앙을 받고 있는 바로이지만 나일 강물이 출렁이는 것을 잔잔하게 만들 수가 없습니다(렘46:7a). 그리고 나일 강물이 불어나서 황금의 들녘을 쓸어가 버리는 범람의 역사를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렘46:7b). 그것은 바로의 능력의 바깥입니다. 신의 영역입니다. 이번 신바벨론 갈대아 군대와의 전쟁이 그와 같이 애굽의 황제이며 현인신인 바로의 능력의 바깥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바로의 군대와 갈대아 군대와의 전쟁은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역사섭리에 따른 것이지 결코 바로의 역량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갈대아 군대를 불러들여 유다 왕국을 심판하시고 이어서 애굽을 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바로의 군대는 연전연패를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세상적인 탐욕과 정욕을 이루기 위하여 우상에게 복을 빌고 있는 자들은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상관하지 아니하고 모두 처벌하겠다고 여호와께서는 말씀하십니다(렘25:29).
그 처벌의 대상이 ①첫째가 유다 왕국이고(렘25:11) ②둘째가 애굽제국입니다(렘44:12, 46:2-7). 그리고 ③셋째는 70년후에 신바벨론제국이 페르시아의 고레스 황제에게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렘25:12).
그와 같은 여호와의 역사섭리를 이해하고서 아무쪼록 여호와의 종으로 신실하게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이스라엘 12지파의 땅과 므깃도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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