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강해 제226강(렘42:1-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9년 1월 3일(목)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이 이끄는 무리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애굽으로 가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가나안 땅에 남아서 독립전쟁을 벌이는 것이 좋을지에 관하여 여호와께 여쭈어 달라고 부탁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을 위한 정치적인 목적인가?(렘42:1-6)
본문의 말씀은 유다 왕국 말기의 왕과 신하들과 백성들의 타락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점을 먼저 다음과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첫째로, 성군 요시야가 주전 609년에 불의의 화살을 맞고 후송 도중에 급서를 하고 나자 그의 아들 3명과 1사람의 손자가 왕위를 계승하지만 하나같이 여호와신앙의 회복과는 거리가 먼 통치자들입니다. 다윗왕조의 왕 뿐만 아니라 신하들과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받아 피를 토하듯이 여호와의 진노와 재앙의 길에서 돌이키라고 외치지만 그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전혀 다릅니다. 그 반대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망국의 백성들과 지휘관들이 먼저 선지자 예레미야를 찾아 와서 부디 여호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자신들에게 말씀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둘째로,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상황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유다의 왕족 이스마엘 일당의 반역사건이 미스바에서 발생하여 신바벨론 느부갓네살 황제가 임명한 유다 총독 그다랴를 살해하고 총독부를 초토화시켜버렸습니다. 이스마엘 일당은 총독부의 재물을 약탈하고 그곳의 유대인들을 사로잡아 암몬 자손들의 왕이 망명정부를 세우고 있는 아라비아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2) 둘째, 유다 지방에서 사병들을 거느리고 있던 귀족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유다의 장군 출신 스라야 그리고 마아가 출신의 용병장 여사냐 등이 연합하여 반란의 무리 이스마엘 일당을 무찌르고 총독부의 재물과 포로가 된 유대인들을 되찾아 왔지만 유다의 총독부의 상급기관인 시리아 총독부에서는 그 공로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차제에 황제의 영토가 된 유대 땅에서는 총독부의 통치에 위협이 되는 그 어떠한 무장세력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신바벨론의 갈대아 군대의 말발굽 아래 유다 지역이 짓밟히게 될 것입니다.
3) 셋째, 한치 앞도 짐작할 수가 없는 전운이 감돌고 있는 위기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유다 땅의 군벌들과 남은 백성들이 하나같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몰려와서 여호와 하나님께 여쭈어 달라고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그 질문은 그들이 유다의 땅에 계속 살아도 되는 것인지 아니면 애굽으로 피난을 가야만 하는 것인지 양자택일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무장세력의 연합을 이끌고 있는 수장 격인 귀족 가레아의 아들인 요하난의 입장은 내심 결정이 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들의 목숨을 시리아 총독이 이끌고 들어오는 갈대아 군대의 손에 맡기는 것보다는 애굽에 들어가서 유대인의 정착촌을 형성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애굽제국도 역사적으로 분열기인 제3중간기이며 작은 나라들이 전국시대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옛날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거주하던 애굽의 동북면 고센 땅에 그들이 무장을 하고 많은 백성들과 함께 들어가면 충분히 유대인 정착지역을 개척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애굽에서 망명생활을 해본 경험이 있는 가레아의 아들들의 판단입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살아본 경험이 없는 다른 지휘관들과 백성들의 마음은 그것이 아닙니다. 익숙한 고향을 떠나 물 설고 낯선 땅 남의 나라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고역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택의 기로에서 그들은 열심히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매어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부디 여호와 하나님께서 갈 길을 인도해주시고 살길을 열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이에 모든 군대의 지휘관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호사야의 아들 여사냐와 백성의 낮은 자로부터 높은 자까지 다 나아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의 탄원을 듣고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해 주소서. 당신이 보는 바와 같이 우리는 많은 사람 중에서 남은 적은 무리이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렘42:1-3);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이에 모든 군대의 지휘관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호사야의 아들 여사냐와 백성의 낮은 자로부터 높은 자까지 다 나아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르되”(렘42:1-2a);
1)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신에게 찾아온 사람들을 열거하면서 특이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백성의 낮은 자로부터 높은 자까지 다 나아와”(렘42:1c)라는 구문입니다. 그것은 몇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2) 첫째, 하의상달(下意上達)이라는 말과 같이 민심이 아래에서부터 시작하여 위로 올라가면서 하나의 민의(民意)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찾아가서 먼저 행동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도움을 얻자고 하는 것입니다(렘42:2a).
3) 둘째, 그러한 백성들의 뜻을 수렴하여 그렇게 하자고 적극 나서고 있는 자들이 모든 군대의 지휘관들입니다(렘42:1a). 그들은 본래 유다의 지방의 성읍에서 병사를 지휘하고 있던 유다의 장군과 장수들입니다. 비록 다윗왕조 유다 왕국은 갈대아 군대에 의하여 멸망을 당했지만 그들은 남은 군사들을 이끌고 빨치산 전투를 계속한 인물들입니다. 그들의 기반은 유다의 땅에 남은 백성들입니다. 그러므로 민의를 적극 수렴하여 선지자 예레미야를 찾아 나서는데 앞장을 서고 있습니다.
4) 셋째, 귀족인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이 그들 군벌들의 우두머리이며 그가 돈을 주고 고용하고 있는 용병들의 수령이 여사냐입니다(렘42:1b). 용병들은 본래 아람에 살고 있던 마아가 사람들이므로 가나안 땅이든지 애굽 땅이든지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렘40:8). 그리고 요하난의 입장에서는 그에게 친숙한 애굽으로 들어가서 살면서 애굽제국의 힘을 빌려 함께 신바벨론의 갈대아 군대에 대항을 하는 것이 한결 수월합니다. 따라서 유다의 장군들과 장수들의 뒤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기가 막힌 선지자 예레미야의 표현상의 기법이라고 하겠습니다.
(2) “당신은 우리의 탄원을 듣고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해 주소서”(렘42:2b);
1) 유다의 장군 출신인 스라야가 앞장을 서서 기타 지휘관들과 군벌들 그리고 유다의 백성들을 이끌고 선지자 예레미야를 찾아와서 상세하게 자신들이 처한 형편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탄원의 성격입니다(렘42:2ba);
2) 첫째, 왕족인 이스마엘이 그의 부하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그다랴 총독을 치고 그 재산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암몬의 망명정부가 있는 아라비아로 탈출하려고 했으므로 시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갈대아 군대가 곧 유다의 땅으로 진격할 것입니다. 자신들은 반도 이스마엘의 세력을 치고 모든 재물과 백성들을 되찾아 왔지만 시리아의 총독이나 신바벨론의 황제가 볼 때에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다의 땅에서 저항하는 무리나 무장을 한 자는 무조건 쳐부술 것이므로 자신들은 소탕의 대상에 불과합니다.
3)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은 유다의 백성들과 함께 유다의 땅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지 아니면 귀족인 가레아의 아들들이 주장하는 말과 같이 애굽으로 들어가서 난민으로 정착을 해야만 하는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디 당신의 여호와 하나남께 간구하여 살길이 어느 것인지 알려 달라는 것입니다.
4) 본문에서 선지자 예레미야의 기록 가운데 특기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해 주소서”(렘42:2bb)라는 대목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지휘관들과 백성들의 인식은 여호와 하나님께 워낙 뵐 면목이 없어서 자신들이 간구하면 살길을 예언으로 말씀해주시지 아니하실 것이기에 부디 선지자 예레미야가 섬기고 있는 당신의 여호와 하나님께 잘 말씀을 드려서 그 해답을 구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렘42:2bb).
5) 그것은 한마디로, 성숙한 직접신앙이 아니라 미숙하기 그지없는 비겁한 간접신앙의 모습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선지자 예레미야를 여호와 하나님의 신탁의 말씀이나 받아 주는 일종의 무당과 같이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당신이 보는 바와 같이 우리는 많은 사람 중에서 남은 적은 무리이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렘42:2c-3); 그들의 탄원은 절박합니다. 다윗왕조 유다 왕국이 신바벨론의 갈대아 군대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이제 유다의 땅에는 자신들과 약간의 무리들 만이 남아 있습니다. 자신들이 잘못 선택을 하여 갈대아 군대의 표적이 되면 전부 죽은 목숨입니다. 그러면 유다의 땅에는 여호와의 뜻을 구하는 백성들이 거의 남아 있지를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선지자 예레미야께서는 당신이 지극정성으로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께 잘 간구하여 자신들에게 살길을 알려 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얼마 남지 아니한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렘42:2c-3).
둘째로,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말을 들었은즉, 너희 말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무릇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시는 것을 숨김이 없이 너희에게 말하리라”(렘42:4);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말을 들었은즉, 너희 말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렘42:4a); 지휘관들과 백성들의 탄원과 부탁의 말을 들은 선지자 예레미야가 두가지로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1) 하나는, 당신들의 요청에 따라 여호와 하나님께 자신이 기도할 것이며 그 답변의 말씀을 듣고서 반드시 일러주겠다는 것입니다(렘42:4aa).
2) 또 하나는, 하나님을 “예레미야의 여호와 하나님”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부디 당신들의 “우리 하나님 여호와”로 인식하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렘42:4ab). 그렇게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삼고서 매사 여호와의 뜻을 묻고 그 답을 받아 순종하면서 살아가게 되면 그것이 온전히 구원을 얻는 살길이라는 것입니다.
(2) “무릇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시는 것을 숨김이 없이 너희에게 말하리라”(렘42:4b); 거짓선지자와 진짜 선지자의 차이가 무엇인지 여기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지휘관들과 백성들에게 정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①진짜 선지자는 무릇 여호와께서 응답하시는 것을 권력자들이나 백성들에게 숨김이 없이 정직하게 대언하는 자입니다(렘42:4b).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진짜 선지자로서 정확하게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받아서 그것을 그대로 전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②그와 달리 거짓선지자는 여호와의 응답의 말씀을 왜곡하여 백성들이나 권력자들에게 전달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정치적 종교적인 지위를 유지하고 또한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셋째로,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진실하고 성실한 증인이 되시옵소서.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 하니라”(렘42:5-6);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진실하고 성실한 증인이 되시옵소서”(렘42:5); 다음과 같이 그 옛날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시내 산 앞에서 모세에게 말한 내용과 같습니다;
1) 첫째,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말씀하시는 그곳 시내 산 정상으로 올려 보내고 있습니다(출20:19-21). 여기서는 유대 땅에 남은 백성들과 그들의 지휘관들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보내고 있습니다(렘42:5a).
2) 둘째, 모세가 시내 산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하산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대언하면 백성들이 그대로 실천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출19:7-8, 24:3).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도 지휘관들과 백성들이 그렇게 실천하겠다고 약속합니다(렘42:5b).
3) 셋째, 시내 산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만약 자신들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실천하지 아니하면 그것을 여호와께서 지켜 보시고 처벌하셔도 기꺼이 감수를 하겠다는 언약의 피의 맹세를 하고 있습니다(출24:5-8). 그와 같은 의미에서 본문에서는 백성들이 “여호와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진실하고 성실한 증인이 되시옵소서”(렘42:5c)라고 맹세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렘42:6a);
1) 유다의 지휘관들과 백성들이 중요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선지자 예레미야 당신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렘42:6aa). 그와 같은 변화가 발생한 이유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에게 유리하든지 불리하든지 따지지 아니하고 무조건 피의 맹세로 지키겠다고 스스로 약속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렘42:6ab).
2) 지휘관들과 백성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운명을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에 맡기고 그 뜻에 무조건 순종하고자 결심을 하고 보니 이제는 여호와께서는 자신들의 생명의 주인이신 우리의 여호와 하나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찰하시고 그 실천에 대해서는 상급을 베푸시고 그 불순종에 대해서는 처벌을 하시는 자신들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3) 그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신들을 대신하여 여호와를 만나고 간구하던 시대에서 이제는 자신들이 직접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그 손에 자신들의 운명을 맡긴다고 하는 그러한 직접신앙의 모습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 옛날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그토록 원하고 있었던 성숙한 직접신앙의 경지라고 하겠습니다(민11:29, 신6:4-5, 30:19-20).
(3)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 하니라”(렘42:6b);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을 하게 되면 어떠한 창조주의 축복을 받게 되는지를 백성들이 스스로 고백하고 있습니다(렘42:6b). 자신의 백성을 사랑으로 돌보고 아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기에 살길을 말씀하여 주시고 그 생명을 보전하는 방법을 반드시 가르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벌써 모세 시대에 선포한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신8:1). 요컨대, 오랜 세월 잊어버리고 살다가 망국의 백성이 되어 자신들의 앞길이 깜깜할 때에 비로소 다시 찾은 믿음의 길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애굽에서 들어온 귀족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은 자신의 내심을 숨긴 채 여러 지휘관들과 백성들이 원하는 탓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방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지휘관들과 백성들은 진심입니다.
멀지 않아 유다의 땅에 갈대아 군대가 다시 들어오게 되면 전란에 휩싸일 가능성이 큽니다. 옥석을 구별하지 아니하고 유대인 무장세력을 모두 처벌할 것이며 그 틈바구니에서 백성들이 많이 희생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 땅에 남아야 할지 아니면 애굽으로 들어가서 난민생활을 해야 할지 참으로 선택이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미래지사를 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탁의 말씀을 듣고자 그들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찾아온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응답을 얻어서 정확하게 말씀을 전해주겠지만 무엇보다도 백성들에게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 자신들의 인생의 주인으로 섬기는 종으로 살아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성숙의 길이며 영원한 여호와의 구원과 축복을 얻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말씀을 거듭 묵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여호와의 진리의 말씀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온전한 실천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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