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강해 제212강(렘37:11-1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년 12월 20일(목)
시드기야 왕 9년에 갈대아 군대가 일단 물러가자 선지자 예레미야야의 신변에 어떠한 일이 발생하고 있는가?(렘37:11-16)
본문에서 알 수 있는 내용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로, 시드기야 왕 9년이 저물고 있는 때에 신바벨론의 갈대아 군대가 유다 왕국에서 물러가고 있습니다(렘37:5, 11). 유다의 성읍들을 점령하고 있던 바벨론의 군대가 물러갔으므로 피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렘37:12). 적군에게 짓밟힌 자신들의 가옥과 토지를 되찾고자 합니다. 그 행렬 가운데 선지자 예레미야가 들어 있습니다(렘37:13). 참고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좀더 알아보고자 합니다;
1) 첫째, 유다 왕 시드기야 9년인 주전 588년말에 신바벨론제국의 군대가 다윗왕조 유다 왕국을 침범했습니다(왕하25:1, 렘39:1). 그 이유는 주전 597년에 신바벨론의 황제인 느부갓네살이 책봉한 유다 왕 시드기야가 주전 593년에 애굽의 바로가 주도하여 결성한 반(反) 바벨론 동맹에 참여를 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왕하24:17, 20, 렘27:3).
2) 둘째, 배은망덕한 시드기야 왕을 사로잡고자 느부갓네살 황제가 대군을 몰고서 침입을 한 전투이므로 유다 왕국의 성읍들은 순식간에 갈대아 군대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맙니다. 유다 왕 시드기야와 신하들 그리고 정예병들은 난공불락의 요새인 예루살렘성에 틀어박혀서 방어에만 급급합니다(왕하25:1).
3) 셋째, 예루살렘성이 함락을 당할 위기 가운데 천우신조(天佑神助, 하늘과 하나님의 도우심)로 애굽의 바로가 동맹군을 이끌고 북상을 하고 있습니다(렘37:5). 그 급보를 들은 느부갓네살은 갈대아 군대의 희생을 최소화하고자 작전상 후퇴를 하고 맙니다(렘37:5, 11). 그들이 그동안 점령하고 있던 유다 왕국을 떠난 것입니다.
4) 넷째, 이번 전쟁으로 유다 지방의 성읍에서 전사자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파난민들이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신들의 기업을 확보하는 한편 사망한 가까운 친척들의 분깃도 서로 차지하려고 경쟁입니다. 그 동안 주로 예루살렘에서 선지자 활동을 하고 있던 예레미야도 차제에 고향을 방문하여 부모로부터 받은 기업과 재산을 점검하고자 합니다(렘37:12).
(2) 둘째로, 선지자 예레미야는 본래 ‘아나돗’ 성읍에 살고 있는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입니다(렘1:1). ‘아나돗’은 예루살렘 북동쪽 4km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베냐민의 성읍인데 그것이 제사장들의 기업으로 여호수아 때에 할당이 된 것입니다(수21:17-19);
1) 예루살렘성에서 북동쪽에 있는 ‘아나돗’으로 가자면 빠른 길이 북쪽에 있는 성문으로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성의 북쪽에는 두개의 성문이 있는데 동으로는 ‘양문’(羊門, the Sheep Gate)이고 서로는 ‘어문’(魚門, the Fish Gate)입니다. 그 두개의 성문을 빠져나가면 예루살렘 북쪽에 자리를 잡고 있는 베냐민의 땅으로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 성문을 모두 ‘베냐민 문’이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다(렘37:13).
2) 그 가운데 선지자 예레미야가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성문은 ‘양문’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북동쪽 4km에 위치하고 있는 ‘아나돗’으로 가는 첩경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예루살렘성 북서쪽의 ‘어문’보다는 북동쪽의 ‘양문’이 더 유명합니다. 그 이유는 ‘양문’의 남쪽에 예루살렘성전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3) 따라서 예레미야 제20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두었더니”(렘20:2). 헤롯 시대 예루살렘성전의 문들을 살펴보면 예루살렘 성곽의 ‘양문’으로 통하는 성전의 ‘양문’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제20장에서 ‘베냐민 문’으로 불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셋째로, ‘양문’(羊門)을 지키고 있는 수문장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적의(敵意, 적대감)를 지니고 있는 ‘이리야’입니다(렘37:13);
1) 그의 조부가 거짓선지자 ‘하나냐’인데 그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함부로 거짓 예언을 퍼뜨리다가 선지자 예레미야와 충돌을 하게 됩니다(렘28:1-12). 그 장면을 보시고 여호와께서는 거짓선지자 하나냐가 여호와의 심판을 받아 시드기야 왕 4년말에 죽게 될 것이라고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예언하십니다(렘28:1, 12-16).
2) 예레미야의 예언 그대로 조부 하나냐가 죽고 말았기에(렘28:17) 그 손자인 성문지기 이리야는 복수의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렘37:13). 마침 자신이 지키고 있는 성문을 사용하고자 줄을 서있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발견한 이리야는 적과 내통하기 위하여 빠져나가는 첩자라고 엉뚱한 죄목을 붙여 예레미야를 체포하고서 그를 주전파 고관들에게 끌고가는 것입니다(렘37:13-14).
(4) 넷째로, 주전 588년에 유다 왕국을 침공하여 지방의 성읍들을 점령하고 예루살렘성 함락을 목전에 두고 있던 신바벨론제국의 군대가 애굽의 바로가 이끌고 북상하고 있는 동맹군이 배후를 치려고 하자 순순히 유다 왕국에서 물러가고 말았습니다(렘37:11). 예루살렘 성내에서는 항전을 계속하고 있던 주전파 신하들의 기세가 오르고 있습니다;
1) 그러한 때에 베냐민 문에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수문장 이리야에게 체포되어 주전파(主戰派) 고관들에게 끌려오고 있습니다(렘37:14). 평소 눈에 가시처럼 보이는 주화파(主和派)의 선지자 예레미야입니다. 그러므로 차제에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2) 자신들을 지지하고 있는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있는 지하감옥에 감금을 하고 굶겨서 죽이려고 시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렘37:15-16). 바야흐로 선지자 예레미야가 목숨이 끊어지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갈대아의 군대가 바로의 군대를 두려워하여 예루살렘에서 떠나매, 예레미야가 베냐민 땅에서 백성 가운데 분깃을 받으려고, 예루살렘을 떠나 그리로 가려 하여”(렘37:11-12);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갈대아의 군대가 바로의 군대를 두려워하여 예루살렘에서 떠나매”(렘37:11);
1) 일단 전쟁이 끝났습니다. 시드기야 왕 9년에 쳐들어왔던 신바벨론의 갈대아 군대는 애굽의 바로가 동맹군을 이끌고 배후를 공격하는 바람에 불리함을 깨닫고 급히 유다 왕국에서 철수를 감행하고 만 것입니다. 그것은 느부갓네살 황제의 빠른 판단과 희생을 최소화하려는 작전상 후퇴입니다. 그런데 적의 포위공격에 시달리던 예루살렘성의 유다 왕과 신하들은 그것이 아닙니다.
2) 애굽의 바로를 수장으로 모시고 있는 반(反) 바벨론 동맹이 견고하다는 사실이 이번에 증명이 되었기에 앞으로 신바벨론 느부갓네살 황제가 다시는 유다 왕국으로 진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성급하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갈대아의 군대가 바로의 군대를 두려워하여 예루살렘에서 떠나게 된 것”(렘37:11)이라고 백성들에게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주전파(主戰派) 고관들의 기세가 등등한 때입니다.
(2) “예레미야가 베냐민 땅에서 백성 가운데 분깃을 받으려고, 예루살렘을 떠나 그리로 가려 하여”(렘37:12); 갈대아 군대가 급히 유다 왕국을 떠났기에 전국의 성읍과 토지가 그대로 유다의 백성들에게 되돌아 오고 있습니다. 피난을 갔던 백성들이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서 집과 밭을 되찾아 보수를 하고자 합니다(렘37:12aa). 그리고 전란 중에 많은 백성들이 희생이 되었기에 가까운 친지들의 초상도 치르고 그들의 땅도 씨족들이 자신들의 기업으로 거두어야만 합니다(렘37:12ab). 그러한 화급한 일이 남아 있기에 선지자 예레미야도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4km 떨어져 있는 고향 ‘아나돗’을 방문하고자 예루살렘 성문을 나서고 있는 것입니다(렘37:12b).
둘째로, “베냐민 문에 이른즉, 하나냐의 손자요 셀레먀의 아들인 이리야라 이름하는 문지기의 우두머리가 선지자 예레미야를 붙잡아 이르되, 네가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는도다. 예레미야가 이르되, 거짓이다.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이리야가 듣지 아니하고 예레미야를 잡아 고관들에게로 끌어가매”(렘37:13-14); 역시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베냐민 문에 이른즉, 하나냐의 손자요 셀레먀의 아들인 이리야라 이름하는 문지기의 우두머리가 선지자 예레미야를 붙잡아 이르되, 네가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는도다”(렘37:13);
1) 참으로 그날 선지자 예레미야는 운이 없습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는 말이 있듯이 그날 그 성문을 지키고 있는 수문장이 하필이면 선지자 예레미야와 대적관계에 있던 거짓선지자 하나냐의 손자인 이리야이기 때문입니다(렘37:13a).
2) 하나냐는 5년 전에 자신의 지지세력을 동원하여 선지자 예레미야를 힘으로 핍박했던 거짓선지자입니다(렘28:1-11). 그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함부로 거짓 예언을 퍼뜨리고 권력자들의 비위를 맞춘 잘못 때문에 여호와에 의하여 그해 말에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렘28:17).
3) 그 죽음의 예언을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나냐의 집안에 전파한 적이 있습니다(렘28:15-16). 그러므로 하나냐의 자손들은 그때부터 예레미야를 집안의 불구대천(不俱戴天, 함께 같은 하늘 아래 살 수가 없는 원수를 말함)의 원수로 여기고 있습니다.
4) 그런데 공교롭게도 하나냐의 손자인 이리야가 지키고 있는 예루살렘 북쪽의 성문인 ‘양문’으로 선지자 예레미야가 고향 ‘아나돗’으로 가고자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리야가 북쪽의 성문을 맡고 있는 이유는 그의 고향이 예루살렘에서 북서쪽 9km 지점인 ‘기브온’인데 그 성읍 역시 예루살렘의 북쪽인 베냐민 땅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5) 복수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난 이리야는 무조건 선지자 예레미야를 체포합니다. 그 죄목은 고향으로 가는 척하면서 예루살렘성을 빠져나가 신바벨론 갈대아 군대를 만나고 내통을 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렘37:13b). 평소 신바벨론과의 전쟁을 적극 반대하는 주화파의 주장을 앞장서서 외친 선지자 예레미야이므로 누구나 수문장 이리야의 주장을 지지할 것으로 그가 생각한 것입니다.
(2) “예레미야가 이르되, 거짓이다.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이리야가 듣지 아니하고 예레미야를 잡아 고관들에게로 끌어가매”(렘37:14);
1) 선지자 예레미야는 억울합니다. 지난 40년간 오로지 조국과 민족을 살리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는 심정으로 한결같이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온 자신입니다(렘1:1-3). 그런데 주전파와 주화파라는 입장의 차이가 있다고 하여 예레미야 자신을 신바벨론의 첩자로 누명을 씌우고 있으니 그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입니다.
2) 그에 따라 예레미야가 강하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이르되, 거짓이다.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지 아니하노라”(렘37:14a). 하지만 개인적으로 예레미야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수문장 이리야는 막무가내입니다(렘37:14b). 기어코 예레미야를 그 자신이 속하고 있는 주전파 고관들에게 끌고 갑니다(렘37:14c). 선지자 예레미야를 평소에 눈에 가시처럼 여기고 있는 주전파 고관들은 차제에 그를 감옥에 가두고 아예 죽여 버리고자 획책을 합니다.
셋째로, “고관들이 노여워하여 예레미야를 때려서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 집을 옥으로 삼았음이더라. 예레미야가 뚜껑 씌운 웅덩이에 들어간 지 여러 날 만에”(렘37:15-16); 역시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고관들이 노여워하여 예레미야를 때려서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 집을 옥으로 삼았음이더라”(렘37:15); 주전파 고관들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적의 첩자로 몰아 부치면서 태형을 가합니다(렘37:15a). 그리고 유죄로 판정하여 자신들의 주전파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있는 감옥에 가두고 맙니다(렘37:15b). 그것은 정상적인 국가의 감옥이 아닙니다. 귀족의 여러 가문들이 모여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운영하고 있는 감옥입니다(렘37:15c). 정적들이 자신들을 공격할 때에 은밀하게 납치하여 고문하고 감금하는 그러한 수용소 성격의 감옥입니다. 그와 같은 파당의 감옥에 투옥이 된 선지자 예레미야의 앞날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2) “예레미야가 뚜껑 씌운 웅덩이에 들어간 지 여러 날 만에”(렘37:16); 선지자 예레미야를 은밀하게 자신들이 운영하는 지하감옥에 가두어 끝장을 내려고 합니다. 주전파 신하들이 예레미야를 죽여버리고자 도저히 탈옥을 할 수가 없는 지하감옥에 가두고 그 뚜껑을 확실하게 닫아 버립니다(렘37:16a). 그리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일체 공급하지 않습니다. 보통사람이 굶는 경우 2주일은 버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실 물을 주지 아니하게 되면 3일을 버티기도 힘듭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수일이 지나가고 있습니다(렘37:16b). 선지자 예레미야는 어떻게 그 지하감옥에서 살아나오게 될까요?
결론적으로, 유다 왕국을 침입한 신바벨론제국의 갈대아 군대는 애굽의 바로가 이끄는 연합군의 군대가 자신들의 배후를 치고자 접근을 해오자 아예 유다 왕국에서 철수를 감행하고 맙니다. 그러자 유다 왕국의 주전파 신하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르게 됩니다.
한 마디로, 선지자 예레미야가 외치고 있는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다윗왕조 유다 왕국이 신바벨론제국과 전쟁을 하는 경우 멸망을 자초한다고 했지만 시드기야 왕 9년말에 발생한 역사적인 사실은 그와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주전파 고관들은 차제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잡아서 죽이려고 의견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러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있는 하나냐의 손자인 이리야가 용감하게 사감(私憾, 개인적인 감정)으로 말미암아 선지자 예레미야를 체포하고 그를 고관들 앞에 끌고 갑니다.
고관들은 자신들의 파벌을 모아 예레미야를 유죄로 판결하고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있는 자신들 종파의 감옥에 가두고 맙니다. 뚜껑이 있는 지하감옥에 집어 넣고 마실 물도 끊어버립니다. 이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까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이미 죽은 목숨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사람을 통하여 신묘하게 역사를 하십니다. 아직 그가 대언해야만 하는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위적인 방법으로 그를 구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본문을 다시 음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깊은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와 그 보호의 손길을 피부로 느끼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예루살렘의 성문들)
(베냐민 땅 아나돗과 기브온의 위치)
(예루살렘성전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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